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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18일 21시 44분 등록

이 이야기는 가슴 아픈 이야기다. 그러나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송희갑(宋希甲) 이라는 인물이 있다. 충남 회덕에서 서자로 태어나 배움의 때를 놓쳐 불우했다. 그러나 뜻을 꺾지 않고 좋은 스승을 얻기 위해 애썼다. 일찍이 권필의 명성을 사모하여 강화로 찾아간다. 권필(權韠 1569-1612)은 선조 때 시인으로 조선조 역대의 시인 중에서 두보의 시의 경지에 가장 근접하게 다다랐다는 평가를 받는 당시(唐詩)에 정통한 인물이다. 송희갑은 총명하고 성실했다. 권필은 그를 제자로 받아들여 10년을 기약하고 함께 공부하게 되었다. 송희갑은 스승을 지성으로 섬겼다. 때때로 훌륭한 시를 지어 스승을 경탄케 했고, 스승은 잘된 시를 가리켜 '나보다 낫다' 칭찬해 주었다. 스승이 장티브스에 걸려 죽음의 길을 헤맬 때, 수 십일 간을 그 옆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고 보살펴 주었다. 땔나무를 하고 집안 일을 도맡아 했다. 스승은 충직한 제자를 각별히 아꼈다. 어느 날 스승이 제자에게 말했다.

" 사람이 널리 천하를 보지 못하면 시가 좁아진다. 나는 이미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네 근골을 보면 능히 이 일을 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압록강 북쪽은 관문의 방비가 몹시 엄하니 반드시 어두운 길을 택해 숨어 엎드려 있다가 물을 헤엄쳐 건너야 중국에 갈 수 있다. 너는 모름지기 중국어를 배우고 수영을 익히도록 해라"

멀리 가서 넓은 세상을 보지 못하고는 시가 툭 터지는 통쾌한 경지를 얻을 수 없기에 스승이 제자에게 이른 말이다. 순진한 제자는 허구한 날 물에 뛰어들어 수영을 익히다 기혈이 삭아 일찍 죽고 말았다. 나는 송희갑이 언제 몇 살에 죽었는지 알고 싶었으나 그의 생몰 연대를 찾을 수 없다. 그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우암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全)' 중 '남운경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 사연이 적혀 있다. 그리고 이 편지의 말미에 송희갑의 시 '춘일대인'(春日待人) 한 수가 남아있다.

산에는 꽃피고 언덕엔 수양버들
이별의 정 안타까워 홀로 한 숨 내쉰다
지팡이 굳이 짚고 문 나와 바라봐도
그대는 오지 않고 봄날 해만 저문다

     - 송희갑, '봄날 사람을 기다리며', 춘일대인'(春日待人), 정민 번역

이 시는 송희갑이 병들어 고향에 가 있을 때, 죽음을 앞두고 지었다는 시다. 그가 누구와 헤어졌고 기다리는 그리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우리는 모른다. 떠나 온 스승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특정한 대상이 있는 것이 아닐 지 모른다. 그저 곧 세상을 떠나야 하는 사람이 가지는 세상에 대한 모든 그리움을 망라한 것인 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필생 그가 다다르려고 했던 시의 경지에 대한 그리움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생각한다. 시가 사람을 죽였구나. 그까짓 시를 위해 불법 밀입국을 계획하고, 생사람을 잡아 목숨을 걸고 애쓰다 죽게 했으니 그 스승이 미친 사람이고, 시킨다고 따라하는 고지식한 제자 또한 딱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이야기가 슬프고 마음 아프나  이야기 속의 스승과 제자가 사람다워 정겹다.

권필은 평생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권필은 정철의 문하생이었으나 선생이 귀향가는 것을 보고 과거의 뜻을 접고, 야인으로 살았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과는 1569년 같은 해 태어나 동갑내기로 서로 흠모하여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의 재주를 아끼는 벗들이 벼슬을 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홀로 즐길 만한 몇 권의 고서가 있고, 비록 졸렬하나 시로 마음을 풀 수 있고, 가난하나 스스로 막걸리를 댈만하다'라는 이유로 이러쿵저러쿵하는 자들 속에 끼기를 싫어했다. 타고난 시인으로 불의를 참지 못했다. 삶의 의미를 오직 시에서 찾았던 천생의 시인이었다. 자신의 삶을 '희제'(戱題)라는 시 속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시는 고민을 걷어가 때로 붓을 잡았고
술은 가슴 적셔 줘 자주 잔을 들었지

좋은 시는 독자에게 심장을 내 주는 것이다.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시늉이라도 해야한다.   
작가도 마찬가지다. 







IP *.160.3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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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호
2011.07.19 04:51:12 *.117.112.48
좋은 스승을 만나고 좋은 제자를 만나는 것은 살아온 덕이 쌓이고 그때가 형성이 되어야 하는것 같습니다.
그리고 함께 공동의 목표를 향해 간다는것.
그것이 설령 험한 산을 헤치고 두려운 바다를 건너고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을 횡단하게 될지언정
함께 나누며 간다는 믿음괴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을때에는 행복할것 같습니다.
새벽 일어나 고속 터미널로 지방 출장의 길을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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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11.07.19 07:31:45 *.97.72.158

  emoticon  절연되지 않는 영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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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1 18:01:24 *.212.217.154

인연을 맺고

그 인연을 이어간다는 것.

정답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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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9 12:52:40 *.212.217.154

스승과 제자.

스승의 스승, 제자의 제자의 이야기.


시란 그 시를 쓴 시인의 삶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시같은 삶.

시같은 회사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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