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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19일 10시 11분 등록
가족, 프랑크 쉬르마허, 나무 생각, (이코노미스트)

살을 에는 듯한 추위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새하얀 눈뿐이다. 1846년 11월, 80명 남짓한 사람들은 시에라 네바다의 눈보라 속에 고립되었다. 그들은 새로운 삶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떠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가족들이었다. 인형을 가지고 노는 8살 여자아이부터 나이든 할아버지 할머니들까지 포함된 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중 15명은 홀로 온 젊은 남자들이었다. 건강하고 신체적으로 자신감이 넘치고 서부황야의 위험에도 제법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눈보라는 계속되었고, 돈너 계곡에 갇힌 이 사람들은 이듬해 3월 23일 첫 구조대가 도착할 때 까지 갇혀있었다. 이때 까지 아무도 풀지 못하는 끔찍한 주술에 걸리 듯 여러 달을 극한 상황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누가 살아남았을까 ? 육체적으로 강인하고 자유로운 15명의 젊은 사람들이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들이 아니었다. 이들 독신 15명 중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겨우 3명이 불과했다. 신체적 건강은 살아남기 위한 절대적 조건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족들이 훨씬 더 잘 살아 남았다. 그 중에서도 여자들이 훨씬 더 많아 살아남았다.

남자들의 2/3 가 죽었고, 여자들의 2/3가 살아남았다. 첫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 일행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65세의 조지 돈너는 손에 심한 상처를 입고도 아직 살아 있었다. 부인 톰슨의 극진한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이다. 톰슨 부인은 세 딸을 1차 구조대에 실려 보냈지만 부상당한 남편을 떠나지 않았다. 조지 돈너는 헌신적인 아내의 도움으로 3월 26일 까지 살아 있다 죽었다. 그리고 이틀 후 톰슨 부인이 남편의 뒤를 따라 눈을 감았다.

비극적인 돈너 계곡의 사건을 연구하던 인류학자 도널드 그레이슨 Donald Grayson 은 ‘ 강자인 척하는 남자들은 파리처럼’ 죽었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여성들은 달랐다. 배고픔과 고난을 잘 견뎠고, 식량의 수요도 적었다. 낮은 체온에도 잘 견뎠다. 그뿐이 아니다. 그들은 가장 극한적인 조건 속에서도 가족을 위해 헌신했다. 굶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심지어 남의 식구까지 돌보았다. 가족의 의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도 여자들은 신뢰와 우정의 동맹을 맺었다. 가족은 생존의 보증수표였고 여성은 생존의 기계였으며 가족 관계의 핵심이었다.

이 책은 또 하나의 장면을 제공한다. 이른바 섬머랜드 화제사건이다. 1973년 8월 어느날, 3천명의 휴가객들이 대형호텔에서 이른 저녁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저녁 8시 1분, 섬머랜드는 거대한 연기 기둥 속에 쌓이기 시작했다. 8시 20분 현장에 도착한 BBC 카메라 팀은 이 아비규환의 장면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최대의 화재 사건으로 기록된 이 날의 사건이 종료되었을 때, 최소한 51명이 사망하고 400 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 몇 년 후 조나단 사임 Jonathan Sime 이라는 심리학자는 화재당시 불타는 호텔의 내부에서 벌어졌던 일들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아비규환의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 불길과 연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흩어져 혼자 출구를 찾는 강한 자들이 더 많이 살아남았을까 ? 그렇게 추측할 지 모른다. 그러나 사임의 연구 결과는 달랐다. 화재가 발생하자 가족 단위의 휴가객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엄청난 효율성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혼란의 와중에서도 서로를 잃지 않고 함께 도망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같이 온 사람들끼리의 당연한 행동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았다.

가족들의 2/3는 함께 움직였지만 친구끼리 온 사람들은 불과 1/4만이 서로 찾았다. 화재 시점에서 서로 떨어져 있던 가족들은 혼란의 와중에서도 필사적으로 서로 찾았고 심지어는 출구의 반대편으로 가기도 했다. 어떤 희생이라도 각오했던 것이다. 화재 당시 대형 야외 정원에 흩어져 있던 30 가족 중 절반이 가족을 찾아 헤맸고, 실제로 가족을 찾았다. 그리고 전원이 무사히 건물을 빠져 나왔다. 그러나 친구끼리 온 19팀 중에서 화재당시 서로를 찾아 헤맨 경우는 한 팀도 없었다. 사임은 이렇게 말한다.

“ 결과적으로 가망이 없는 상황, 완전한 패닉에 의해 심리적 결합의 붕괴가 일어난 상황에서도 절반의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 가족들의 마음 속에는 원시시대의 신뢰가 깃들어 있다. 그날 섬머랜드에 혼자 왔거나 친구끼리만 온 사람들이 더 많았더라면 사망자 숫자는 훨씬 많았을 것이다.

저자는 이 두 사례를 놓고, 아이를 적게 낳고, 친족의 숫자가 결정적으로 줄어들고 있는 지금, 우리 사회의 운명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물론 가족이 늘 찬양을 받아 온 것만은 아니다. 가족의 울타리는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기도 했고, ‘젊음의 용기를 무너뜨리는 노화의 신호’로 비난 받기도 했다. 1971년 영국의 서정시인인 필립 라킨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를 쓰기도 했다.

“너의 엄마와 아빠가 너를 망친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너를 망친다. 그들이 저지른 실수로 너를 살찌우고..... 인간은 인간에게 불행을 물려주고, 불행은 해안의 대륙붕처럼 날로 깊어진다. 최대한 빨리 끝장을 내고 아이를 낳지마라“ 그러나 지금의 문제는 불행을 물려준다는 것이 아니라 후손이 사라지면서 불행과 더불어 행복과 가치있는 다른 것조차 물려줄 대상 자체가 사라져 간다는 데 있다. 가족의 소멸과 더불어 돈너 계곡과 섬머랜드에서 보여준 가족의 이타적 행동과 사랑과 헌신 역시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가족이 사라져가는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을 강조한다. 여성이야 말로 가족과 개인의 중재자였다. 여성들은 가족의 의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도 신뢰와 우정의 동맹을 맺는 방법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

여자들은 친족과 더불어 사는 집단에서 아교와 풀의 역할을 해왔다. 그들은 관계를 만들어 내고 상호성과 공평함에 대한 감수성을 훈련해 왔다. 사회적 자산이 소비되고 파괴되는 곳에서 사회 자산을 만들어 내는 노하우를 유전자 속에 축적해 왔다. 이런 사회적 지능은 어머니에게서 딸로 유전 되었다. 그리고 세상의 딸들은 가족을 떠나 다시 남편이나 파트너의 공동체로 들어간다. 남자들이 팽창하는 시기의 사회의 우두머리 역할을 맡았다면 여성들은 수축하는 사회에서 부족한 모든 것, 즉 사회능력, 공감력, 이타주의, 협동심등을 통해 그 주역을 맡아 왔던 것이다.

앞으로 전통적인 가족을 대치해 갈 ‘친구들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안정화 시키는 데도 여성은 중추적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이것은 인간만의 특성이 아니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암컷생명체는 시회진화를 조종해 왔다. 힘이 약하고 새끼가 딸려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남성과 달리 사회적 연대와 유대를 통해 이득을 보는 방법을 체득하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여성은 ‘강력한 결합을 구축하고 유지할 수 있는 일련의 심리기제’를 발전시켜올 수 있었다.

자연은 영원히 여성적인 것에 올인을 한다. 새로운 사회에서도 돈너 계곡에서 그랬듯이 남성은 여전히 나무꾼과 사냥꾼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 밖에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여성들은 사회적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지만 여전히 가족을 비롯한 내적 유대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양성의 기능을 떠맡게 될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여성이 더 나은 인간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공동체를 새롭게 탄생시키는 방법을 결정할 당사자들은 바로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딸들이다.” 지나친 말이라고 생각하는 남성들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인식은 ’공동체를 가장 깊은 내면에서 결속시키는 힘은 시장이나 국가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공동체가 지속되고 성장하려면 돈너계곡과 섬머랜드의 가족들이 보여준 그 위대한 정신과 실천이 필요하다. 우리가 남겨줄 진정한 유산은 가족들이 서로에게 한 그 행동들이 바로 만인을 위한 행동이어야 한다는 깨달음이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의 삶에서 실천되기를 바랐던 모습들을 내면화할 수 있다면 진정한 유산을 남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200 페이지 남짓한 얇은 책이다. 그러나 반드시 보아야 할 책 중의 하나다. 가족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축소되는 가족의 역할을 대신할 새로운 시대의 공동체에 대한 진지하고 흥미로운 탐색과정을 즐길 수 있다.

IP *.128.22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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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12.20 22:39:47 *.70.72.121
“여성이 더 나은 인간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공동체를 새롭게 탄생시키는 방법을 결정할 당사자들은 바로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딸들이다.”

<공동체가 지속되고 성장하려면 돈너계곡과 섬머랜드의 가족들이 보여준 그 위대한 정신과 실천이 필요하다. 우리가 남겨줄 진정한 유산은 가족들이 서로에게 한 그 행동들이 바로 만인을 위한 행동이어야 한다는 깨달음이다. 우리가 우리 아이들의 삶에서 실천되기를 바랐던 모습들을 내면화할 수 있다면 진정한 유산을 남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

변.경.연을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이러할 수 있기를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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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
2008.03.18 13:57:34 *.248.237.31
여자로서 엄마로서 직장인으로서 또한 인간으로서의 무게에 힘이 들 때 막중한 사회에대한 책임이 오히려 절 일으켜 세웁니다.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발견하는 것만이 삶을 의미있게 한다는걸 점감합니다.
오늘 하루도 저의 존재가 무척 가치있는 존재임을 깨닫고
스스로 그 가치를 높여가는데 하루를 보내고자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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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13 16:02:49 *.212.217.154

개인화 되어가는 현대에

'가족'의 가치는 어때야 하는지,

'회사'안의 '가족'의 가치는 무었인지?

우스겟 말로, '가족'같이 일하는 회사는 '가축'같이 일할 사람을 찾는다는 말이 있지요,

지금은 오히려

'가족'이란 단어가 무조건적인 희생의 변질된 단어가 아닐지...

흥미로운 책 입니다,

소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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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6 10:12:41 *.212.217.154

말씀하신 여성적 가치가

기업안에서 하나의 문화로 뿌리내릴 수 있다면,

그 조직은 든든한 울타리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회사와 가정은 분명히 다른 존재이지만,

그 차이 만큼 동질한 부분을 강화한다면.

분명 큰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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