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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3월 21일 22시 29분 등록
아리스토텔레스와 미덕의 경영 - 특별 에세이 ( 삼성에세이, 2004)

인간이란 대단히 흥미로운 동물이다. ‘호모 루덴스’ ( Homo Ludens)라는 책으로 유명한 호이징하( Johan Hoizinga) 는 ‘ 인간의 문명은 놀이 속에서 놀이로서 생겨나며, 놀이를 떠나는 법이 결코 없다’ 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은 괜찮은 말로 내 마음에 여운을 남겨 두었다.

그러다가 프랑스의 철학자 쥘 들뢰즈가 자신은 다른 철학자들의 글을 뒤적이다가 마음이 끌리는 철학자를 만나면 그를 뒤에서 덮쳐 ‘계간(鷄姦)을 했다’ 라는 말을 듣고 무릎을 치며 웃은 적이 있다. 어쩌면 그것이 철학자들이 사유를 통해 노는 방식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재미있지 않고야 굳이 생각하는 직업을 가졌겠는가 ?

뒤에서 덮쳐 사생아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어떤 철학자의 사상을 찾아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철학자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을 만나게 하여, 제3의 생각을 만들어 낸다는 뜻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만남의 기쁨일 것이다. 물론 계간을 당한 사람이야 억울하기 짝이 없겠지만, 대부분 이미 죽었으니 달려와 항의할 수 없을 것이다.

쥘 들뢰즈의 견해에 따르면 지금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난다는 것은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미 죽어 뼈조차 찾을 수 없는 인물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기 위한 것이 그를 읽는 목적이 아니다. 그를 읽는 이유는 그의 생각을 통해 나의 사유를 즐기기 위함이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아리스토텔레스를 이해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의 사유를 통해 지금도 살아있는 경영의 요체를 이해하기 위한 사유의 재료로 삼으려는 것일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코노미의 어원이 된 ‘에코노미아’라는 말을 사용한 인물이다. 그는 에코노미아를 ‘가정이나 국가를 꾸려나가기 위해 필요한 자연스러운 경제 활동’으로 규정했다. 그런가하면 돈벌이 자체가 목적인 활동을 ‘크레마티스티케’ (chrematistike)라고 규정하고 이를 부자연스러운 활동이라고 불렀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생활필수품을 구하기 위한 경제활동만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생필품이야말로 진정한 부를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더 나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재산은 무한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돈을 버는 것, 즉 돈벌이 기술이 창출하는 부는 한이 없다. 이것은 개인이 취득하는 부와 재산은 무한하다는 개념을 가정한다. 무제한의 돈을 버는 것은 가계를 경영하는 마땅한 방법이 아니다.

예를 들어 이자를 얻기 위해 돈을 빌려주는 행위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고리대금업은 돈의 자연적인 사용을 통해서가 아니라 돈 자체에서 이득을 얻는 것이다 돈은 교환에 사용하라는 것이지 이자를 받아 더 늘이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돈이 돈을 낳는다는 의미의 토고스(totkos)라는 말은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것 처럼 ‘돈의 양육’ 현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돈벌이 중에서 고리대금업이 가장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
--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제 1권


2 천년도 전에 존재했던 조그만 도시국가의 한 사상가가 지금의 경제에 대한 적절한 충고를 해주리라고 기대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어떤 경제학자들은 이제는 에코노미아라는 말 대신 크레마티스티케라는 개념을 경제학의 대체언어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돈이 돈을 낳은 행위 - 즉 무역, 유통, 금융의 모든 성격이 지금의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적 활동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나 경제의 양태와 규모의 차이를 넘어 이미 매우 정확하게 경제행위의 본질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 나는 적군을 정복한 사람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정복한 사람이 더 용감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가장 어려운 승리는 곧 자신에 대한 승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뛰어난 점으로 연결된다. 개인적으로 욕망의 절제와 중용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그는 정책적으로 시장참여자의 어느 부분을 규제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사회적 불만을 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존속을 위해서 규제는 필요한 도구라는 것을 지적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점을 명쾌하게 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현대적 사례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회계부정과 관련하여 파산보호 신청을 한 광케이블 통신업체인 글로벌 크로싱이라는 회사가 있다. 이 회사의 부사장이었던 사람의 진술에 따르면, 최고 경영진들은 수천명의 직원을 해고시키면서 파산보호신청을 하면 그들에게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직원들은 퇴직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고위 간부들은 회사를 떠나면서 상당한 퇴직금과 보너스를 챙겨간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의 행위는 합법적인지 모르지만, 비윤리적인 처사임에 분명했다. 이것은 그대로 방치될 수 있을까 ?

우리가 ‘사람들 사이의 마땅한 신뢰 관계’를 의미하는 윤리를 생각하게 될 때, 돈이라는 경제적 힘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사회적 힘의 크기 사이에는 매우 분명한 항등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돈이 사람 사이의 관계를 주도하면 사회는 서로에 대한 신뢰를 잃고 타락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사람 사이의 신뢰가 사라지면, 자본주의 역시 설 땅을 잃게 된다.

예를 들어 동구권의 공산주의 정권이 무너지면서 엄청난 서방 기업들이 이 거대한 예비 시장 속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대부분 실패하고 철수하였다. 이유는 하나였다. 그곳에는 계약을 준수할 수 있는 사회적 신뢰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동안 공산주의 정권 하에서 존재했던 유일한 사회적 조직은 정치집단 밖에는 없었다. 종교적 활동과 집회는 위축되었다. 같은 취미를 가진 동호인의 모임도 없었다. 같은 생각을 나누는 사회적 공익 집단도 없었고, 어떤 봉사 집단도 없었다. 신뢰를 생산할 수 있는 모임과 활동이 없는 곳에서 사회는 아무런 사회적 신뢰를 만들어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는 돈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회적 신뢰라는 토양 위에서만 꽃 필 수 있는 나무였다. 돈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회는, 아마도 정치가 모든 것을 결정하던 체제가 정치적으로 몰락하듯, 역시 스스로를 버티게 해주는 신뢰의 땅을 황폐화시킴으로써 몰락할 수 밖에 없게 될 것이다. 엔론과 월드컴의 회계부정과 파산은 이것을 증명하는 경고의 시작에 불과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 5권에서 돈에 대하여 ‘모든 것을 같은 단위로 재어 균등화하는 하나의 척도’로 정의한다. 이것이 돈의 위대함이다. 그러나 바로 이점 때문에 상업만능주의가 발생하게 된다. 상업주의라는 것은 바로 하나의 척도로 잴 수 없는 것들을 돈이라는 균등한 척도로 재는 것을 의미한다. 즉 돈이 양적인 차이로 모든 것의 가치를 매기게 될 때, 우리는 상업화하고, 획일화되면, 윤리는 가치체계로서의 자리를 잃게 된다. 그러면 자본주의 역시 번영하고 성장할 수 없다.

그리스. 로마 문명과 더불어 서양의 정신 세계를 창조해온 그리스도교가 부와 재물을 보는 눈도 경제적 시선이 아니라 윤리적 시각임을 확인 할 수 있다.

“ 너희가 사는 땅에는 가난한 사람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사는 땅에는 너희 동족으로 억눌리고 가난한 사람이 어차피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의 손을 뻗어 도와 주리고 이르는 것이다. ” 신명기

“ 부자가 되려는 애쓰는 사람들은 유혹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리고, 어리석고도 해로운 온 갖 욕심에 사로 잡혀 파멸을 구렁텅이에 떨어 지게 된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니라. 디모데 전서

성경 역시 부의 추구는 경제적인 활동이 아니라, 부를 추구하는 자가 도덕성을 희생해서 얻은 사적인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부의 추구가 사회라는 큰 집단을 활력있게 만들고 융화시키는 매커니즘의 일부로 인식되기 이전에,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하는 것을 어겨서는 안된다는 교훈 즉 윤리학의 영역으로 인식되고 있다. .

인간의 윤리적 행동과 관련하여 그 당위성에 대하여 검토해 온 생각들을 바탕으로 이제 ‘경영자 혹은 직장인은 모름지기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을 정리해 보자. 이것이 지금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사유한 목적이 되는 것이다. 기업 경영의 우선적 과제는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윤리경영이 기업의 이익에 도움을 주는 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대단히 긍정적이다. 윤리경영이 장기적으로 훌륭한 경영 성과에 기여한다는 몇 가지 조사 결과를 살펴보자.

경영컨설팅업체인 타워스 페린(towers Perrin) 은 윤리경영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기업을 매년 25개 씩 뽑아 심층조사를 했다고 한다. 15년 동안 이 기업들의 실적을 분석한 결과 윤리경영을 하고 있는 기업의 경우 주주수익률이 43 %인데 반해, S & P 에 등록된 500 개 기업의 평균 주주 수익률은 19 %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직장내 직원 만족도를 조사하는 전문 기관인 워커 인포메이션( Worker Information)사의 조사에 따르면, 자신의 회사가 윤리경영을 한다고 믿는 경우, 직원이 회사를 떠나지 않는 확율은 그렇지 않은 경우 보다 6배나 높았다. 반면에 직장 상사의 윤리적 판단을 불신하고 회사의 활동에 수치심을 느끼는 경우에는, 직원 다섯명 중 네 명은 직장에서 기만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조만간 회사를 떠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윤리경영은 기업의 명성에 대단히 중요한 영향력을 미친다. 홍보컨설팅 회사인 힐 앤 놀턴 ( Hill & Knowlton)이 실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고객과 투자자의 경우 의사결정을 할 때 기업의 명성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인 다섯명 중 네명은 제품을 고를 때 그 제품을 만든 기업의 명성을 고려하며, 이들 중 36%는 구매 결정의 결정적 요인으로 기업의 명성을 꼽았다. 또 70 % 이상의 투자자들은 금융소득이 줄더라도 투자처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기업의 명성을 중요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성과들은 모두 윤리경영 자체가 전략적 관점에서도, 장기적으로 직원이나 고객, 그리고 투자자 모두를 위해 매우 바람직한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이제 윤리경영을 준수하기 위해서 윤리경영의 내용을 좀 더 들여다보도록 하자. 윤리경영이란 무엇일까 ?

‘미덕을 따르는 영혼의 활동’으로서 경영을 이해할 때,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마 다음과 같은 간결한 세 가지 핵심적 개념에 대해 동의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이 그의 사유를 통해 내가 만들어 낸 ‘사생아’ 들이다.

첫째는, 개인으로서 자신의 이해 관계를 조직의 이해관계와 일치시키는 것이다, 경영자는 경영자대로, 구성원은 구성원대로, 개인적 이해와 조직의 이해를 병존시킬 수 있는 정신적 태도와 방식으로 일을 해야한다는 점이다. 누구도 사회적 존속을 위해 규제되어야 한다.누구도 개인적 이해를 조직의 이해 위에 놓아서도 안되고, 반대로 조직은 그 구성원의 희생을 강요해서도 안된다. 조직의 구성원들은 장기적으로 조직 속에서 희생당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고 번영해야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기업은 스스로 시장의 일부가 아닌 좀 더 커다란 지역공동체의 일부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 땅에서 벌었으니 그 이익을 이 땅에 있는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훌륭한 직원은 반드시 먼저 훌륭한 기업시민이어야 한다. 미덕이 곧 행복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기업의 활동에 관련이 있는 모든 사람들, 즉 직원, 고객, 주주, 관련업체 종사자, 지역주민등에게 자사의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정보, 경영 성과에 대한 정보, 환경보호적 정보등 중요한 경영 정보에 대한 투명하고 적절한 공개 방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법을 어기지 않는다는 것이 윤리적이라는 말로 대치되어서는 안된다. 세금을 낸다하여 지역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한 것이 아니다. 경영 역시 그 속에 경영의 도를 가지고 있는 어진 상술이어야 한다. 경영모델이 모색되고 온갖 경영적 실험이 행해져야한다. 이것이 혁명적인 세계 속에서 기업이 번성할 수 있는 힘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실험은 반드시 하나의 게임의 원칙, 사회적 신뢰를 증진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윤리 경영은 이 방향으로 기업을 인도하는 등불이고, 경전이며, 행동 철학이다.

스승 플라톤이 이데아의 세계를 추구한 이상주의자였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뛰어난 현실주의자였다. ‘지나치게 고삐가 풀려’ 스승으로부터 버림을 받기도 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적으로 불행한 인생을 살았지만, 결국 스승의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사이의 적절한 조화를 모색함으로써 스승을 빛나게 하였다. 그가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주는 충고는 이익을 구하더라도 ‘미덕을 따르는 영혼의 활동’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이 행복한 삶이기 때문이다.
IP *.229.146.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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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21 17:56:39 *.212.217.154

기업의 사회적 윤리과 책임에 대해서 적극 공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주주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서

기업이 추구하는 '주주이익의 최대화'를 거슬러, 윤리와 책임을 질 수 있는지는 회의적입니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자본주의 시스템을 어떻게 구조적으로 고쳐나가는가 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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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4 14:42:19 *.107.214.115

'미덕'을 따르는 영혼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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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0 11:26:06 *.241.242.156

기업의 사회적 책임.

이런 거창한 구호가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사고가 가능하다면

어떻게 몇조원의 분식회계를 저지르고도

뻔뻔히 주식시장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또 그 주식이 가치있다 하여 매수하는 행위,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대 자본주의 체제는

몇천년 전 살았던 사상가의 말로 설명하기 힘들게 복잡해졌기 때문일지?


자본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악의적인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사건을 지켜보면서 생각해봅니다.


하지만 마음의 한 구석에는,

결국 그런 부정은

언젠가는 결국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삼성바이오가 스스로 행한 악행을 벌할 것임을 믿고 있습니다.

역사는 결국 그렇게 흘러가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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