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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7월 14일 22시 11분 등록
혹시 그 길이 날 닮은 길일까 ?

공주에서 강경까지 금강을 따라 가다 . 2006년 6월 12-13 월간중앙
(8월 게재 예정)

길은 통한다. 길이 막히면 흉하다. 누구도 막힌 길 앞에서 당황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마치 꼭 막힌 운수처럼 막다른 길에 갇히게 되면 흘러 나갈 수 없어 되돌아 빠져 나와야 숨을 쉴 수 있다. 길은 길에 연하여 흘러가야 길이라 불릴 수 있다. 그래서 길은 강과 같다. 흘러가되 다다르는 곳이 있다.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여행자가 늘 길 위에 있어 쉬지 못하면 피로하다.

나는 강과 길을 다 즐기고 싶었다. 그래서 강을 따라 그 곁을 나란히 흘러가는 길을 따라 나서기로 했다. 나는 금강을 마음에 두었다. 그리고 그 강변에 존재했던 백제의 고도와 산야를 거쳐 굽이굽이 흘러 가 보고 싶었다.

내 마음 속에는 백제를 그리워하는 무엇인가가 들어 있다. 느린 듯 유장하고 정이 깊어 짠하고 멋을 아는 백제인들의 가슴을 흘렀던 그 강을 닮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백제의 도읍지였던 공주로부터 시작하여 부여를 거쳐 강경까지 따라가리라 마음먹었다.

공주에 도착했다. 배가 고팠다. 강가에 유명한 국밥집이 있다하여 그곳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맛은 소문만 못하지만 주인은 곰살궂다. 밥을 먹으며 여행의 출발지를 훑어보았다. 지도 위에 금강을 따라 흐르는 651 지방도가 짧은 여행기간동안 내 길이 되어 줄 것이다. 이 길은 연기군을 남북으로 지나가는 또 다른 지방도인 591 도로와 부용에서 만나 길의 일생을 시작한다. 금강의 남쪽 기슭을 엄마 치마 자락처럼 붙들고 동에서 서로 따라 흐르다 부여에 이르러 끝이 난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다. 부여의 백마장교 다리를 건너면 방향이 바뀌어 이때부터 남북으로 흐르기 시작하는 금강의 서쪽을 따라 흐르는 625번 도로로 다시 환생한다. 여전히 강줄기를 놓지 않고 강경으로 흘러든다. 나는 이 두 개의 길을 주축으로 따라 가되 그 길가를 넘나들며 주변의 구경거리들을 이리저리 즐기기로 작정했다.

651번 도로가 시작하는 출발점 부용을 향해 가는 동안 연기군 남면 진의리 일대를 지나게 되었다. 이곳은 신기하게도 서울의 경복궁 근처의 지형을 축소시킨 듯 꼭 빼닮았다. 청와대의 뒷산인 삼각형의 북악산을 닮은 작은 산이 가운데 위치하고 인왕산과 낙산을 쏙 빼 닮은 지형이 좌우로 펼쳐진다.

새로운 행정도시로 태어나게 될 지역을 지나며 문득 역사의 명멸에 대해 여행자다운 멜랑콜리가 밀려들었다. 온조왕에 의해 한강가에서 태어난 백제는 금강의 공주로 천도한 후 다시 부여로 옮겨 그곳에서 일생을 마치게 되었다. 망국의 한은 의지할 곳을 잃은 궁중의 여인들이 백마강에서 꽃처럼 떨어져 죽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다. 백제의 수도는 공주와 부여로 이어져 맥이 끊기더니 1350년의 시간의 강이 흐른 다음 옛 백제의 땅에 21세기 한국의 행정종합도시로 환생하게 될 운명이었다.

여행의 출발지인 부용으로 가는 동안 남면 양화리의 은행나무 한 쌍을 잠시 만나러 갔다. 이 한 쌍의 부부 나무는 고려말 최영 장군을 도와 탐라정벌에 공이 컸던 임난수장군이 역성혁명으로 고려 왕조가 바뀌자 은신하여 살면서 심은 것이라 한다. 이미 600 살 이상이 된 것이다.

‘숭모각’이라는 작은 사당을 향하여 왼쪽에 서 있는 것이 암나무고 오른쪽에 있는 것이 수나무다. 이 둘은 서로 가지를 뻗어 마치 손을 맞잡고 있는 듯 가까이 붙어 다정하다. 한 낮의 햇볕이 따가웠지만 바람이 일어 나뭇잎 소리가 시원하고 그 그늘이 커 더위를 식힐 만 하다.

은행나무는 워낙 오래 살기 때문에 600 살 정도로는 명함을 내밀 수 없다. 유명한 양평의 용문사 은행나무는 신라의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고 금강산가는 길에 심었다고 하니 1100년은 된 것이다. 모두 망국의 한을 품은 사람들이 심은 나무들이다. 아마 오래 살아 길이 장수를 누리는 은행나무를 심어 나라가 스러짐의 슬픔을 달래려 했는지도 모른다.

팻말에 이 한 쌍의 은행나무는 영험하여 국가에 큰 일이 생기면 큰 소리를 내어 이를 알린다고 쓰여 있다. 8.15 해방과 6.25 전쟁이 날 때 크게 울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글귀는 큰 나무가 있는 곳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영험의 징표니 그대로 믿을 만한 것은 못된다.

다만 오랜 세월을 사람과 함께 살아오면서 온갖 영욕을 겪었을 것이니 나무라 하여 어찌 신령한 초능력이 없겠는가. 우리는 긴 세월을 살아 온 것들에게 그 오램 때문에, 그 인고와 성실 때문에 감동하는 것이리라.

아름다운 두 그루 은행나무 밑에서 잠시 땀을 식힌 후 우리는 합강리 합호서원으로 갔다. 뜨거운 태양 아래 서원의 문은 잠겨 있었다. 맑은 여름 날 2 시의 이글거리는 태양은 우리로 하여금 얼른 이 고가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고 싶게 만들었다. 동네 아낙에게 부탁하여 열쇠로 잠김 문을 따고 들어갔다.

고려말 주자학을 들여온 안향 선생을 모신 조촐한 사원인데, 매년 삼월 삼짓날 각처에 퍼져있는 친족과 관계자들이 모여 크게 제사를 지낸다 한다. 얼마 전까지 이 서원에 한 가족이 살아 관리를 했다고 하는 데 지금은 이 사람들이 떠나고 마을에서 품을 사서 풀을 뽑고 관리한다고 한다.

마을 마다 나이든 사람들만 남고 젊은이들은 도회지로 몰려가지만 나는 앞으로 농촌에 더 많은 기회의 땅이 열려 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아름다운 가게’ 이사인 박원순 변호사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농촌이야 말로 천지가 다 벤처인데 왜 젊은이들이 농촌으로 가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의아해 했다. 그 많은 웰빙 먹거리와 그 아름다운 공간 모두가 앞으로 엄청난 시장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걸 버리고 기업의 머슴이 되기 위해 도시로 몰려오는 것이 안타깝다고 한다.

아마 젊은이들은 그 성장의 특성상 이렇게 조용하고 변함없이 지루한 자연을 마음 속 깊이 받아들이기 아직 어려울지 모른다. 그들은 강남역과 홍대앞 근처의 밤의 열기와 다이나믹한 몰려다님과 자유로운 만남을 그리워 할 것이다. 그러나 기회는 아무도 하지 않는 것들 사이에 널려 있다. 우리의 비극은 늘 그런 사실을 나중에야 깨닫기 때문에 생겨난다.

서원의 오래된 기와와 그 기와 사이를 비집고 솟아 오른 잡초를 보며 문득 농촌은 마흔이 넘어 회사에서 밀려나기 시작하면서 인생과 자연의 깊은 맛을 느끼지 시작한 사십대 이후의 중장년층이 마음을 먹고 제 2의 인생을 개척하고 새로운 비즈니스를 시작할 수 있는 훌륭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비즈니스, 말 그대로 벤처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원의 뜨락을 거닐며, 이 공간의 아름다움과 이 정적과 한가함을 휴식과 명상의 충전소로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해 보았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피로함과 상업성에 대항하는 새로운 개념의 청정 벤처 - 자본주의가 잃어가는 사회적 신뢰를 증진 시킬 수 있는 자연친화적 문화공간으로서의 서원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왜 이 아름다운 날 서원의 문이 잠겨 있어야할까 ? 한때 이 서원은 제당이었고 학교였고 사람들이 드나드는 마을의 중심이었을 것이다. 서원의 문이 누구에게나 원하는 사람을 위해 열리고, 그곳이 시장이 아니라 지친 몸을 쉬고 삶의 근본적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합호서원을 나섰다.

우리는 부용을 거쳐 651번 도로를 찾아들었다. 그 사이 금강을 한 번 건너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꽤 오래된 임시 철재 다리가 200 미터 길이로 놓여있었다. 마침 지나가는 우체부가 있어 이 다리의 이름을 물었다. 다른 이름은 없고 그저 마을 사람들이 철다리라고 부른다고 했다.

조금 높직한 강둑 위에서 보니 넓은 개울처럼 퍼져 흐르는 금강 위에 걸린 철다리는 묘한 시간적 착각을 가져다주었다. 마치 해방 직후 어느 낯선 마을에 들어 선 기분이었다. 주변이 모두 골재를 채취하여 가공하는 공장들이 널려 있고 그 철다리도 골재채취용으로 임시 가설된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에서 어수선한 개발의 한 가운데 시달리는 유구한 강의 피곤함이 느껴졌다.

철다리 위를 통과하여 강을 건넌 후 둑방길을 따라 달렸다. 제격이었다. 비포장의 높직한 길에서 오른 쪽으로 강을 굽어보며 달리는 맛은 일품이었다. 군데군데 모래가 채취되고 있어 그 풍광이 종종 깨지긴 했지만, 우리는 이 구간이 주는 특별한 이미지를 즐겼다. 종종 인삼 밭이 보이고, 복분자 밭도 보인다. 왼쪽으로 까페들이 몇 개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이 부근에서 가장 풍광이 좋은 곳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해가 지고 난 직후, 잠시 그 한가한 회색빛 어슬렁거리는 시간에 여기를 지났더라면 훨씬 더 운치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651번 도로를 타고 봉기리 반곡리를 거쳐 마암리에서 빠져나가 월암으로 들어가 갑사로 향했다.

갑사는 나무가 좋은 절이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계곡의 물이 흘러나오고 고목이 그 운치를 더해준다. 느티나무와 회화나무가 우선 그 위용을 자랑하고 군데군데 아름다운 적송이 몸을 비틀어 용처럼 하늘로 뻗어있다. 나무도 사람과 같다. 어느 나무든 그 수종에 관계없이 잘 자라 준 것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은 보는 순간 ‘참 예쁘다’라는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대웅전을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갑사의 종무소가 있는 데, 이 종무소 앞쪽 공간에 아주 아름다운 고목이 한 그루 있다. 굶은 기둥 줄기 하나로 오르다 높지 않은 곳에서 여럿으로 갈라져 구비구비 틀며 오르는데 키는 크지 않지만 그 휘어짐이 마치 무릎을 구부려 한삼자락을 휘날리며 춤의 절정으로 빠져든 탈춤꾼처럼 보였다.

이 나무 이름을 알아 맞추는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시골에 사는 이들이야 흔히 보았던 나무겠지만 그 크기 때문에 쉽게 ‘이 나무가 바로 그 나무’라는 연결을 해 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나도 이 나무를 우리 집 정원에서 늘상 보아왔지만 쉽게 연결시키지 못했다. 살구나무다. 갑사에 가면 종무소 앞 담 쪽으로 조붓한 공간에 크게 춤추듯 자란 살구나무를 잠시 들러 보는 맛을 잊지 말 일이다.

이 절을 바라보고 오른쪽 계곡으로 접어들면 찻집이 하나 있다. 찻집과 절 사이 길로 100 미터 쯤 가면 계곡의 물을 마주하고 조그만 약사여래 입상이 서 있다. 원래 사자암에 있는 석상을 이곳으로 옮겨왔다는데 기도하면 그 효험이 커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왼손에 약병을 들고 중생을 병마로부터 구하는 약사여래는 과거에 약왕보살로 수행을 하면서 12개의 염원을 세웠다고 한다. 그 중에 7번째의 염원이 ‘모든 중생들 중에서 내 이름을 한번만이라도 들어 본 사람은 질병에서 벗어나 심신이 안락해 지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약사여래가 서 있는 곳의 주변은 숲이 깊고 계류가 흘러 한 여름에 잠시 들러 땀을 식히고 분주한 생각은 계류에 실려 떠나보내기 좋은 곳이다. 심신이 안락해 진다는 뜻은 바로 그런 것일 것이다.

갑사를 떠나 강을 끼고 잠시 달리다 공주 시내로 들어가기 위해 옛다리를 찾았다. 자세히 보면 많이 다르지만 첫 인상이 흡사 작은 한강 철교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트러스트교를 건너면 왼쪽에 공산성이 있다. 지금은 공주시민들의 공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곳이다. 공산성에서 내려다 보는 금강은 생각만큼 시원하지는 않았다. 산성의 높이가 낮아 그런 모양이다.

성문을 들어서자 마자 좌측 11시 방향으로 내려가면 옛날 마을이 있던 공북루 광장이 나타난다. 공산성 내에서 가장 시야가 좋은 곳이다. 왼쪽으로 막 건너온 공주의 옛 철교가 보인다.

이 철교와 공북루 사이에 자세히 보면 낮은 제방처럼 돌무더기가길게 쌓여있고 나무 기둥이 수 십개 삐죽거리며 나와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긴 돌무더기 뚝방 흔적이 옛날 다리의 잔해라고 한다. 돌무더기를 쌓아 바닥을 단단히 하고 나무 말뚝들을 박아 넣은 다음 다시 돌무더기를 길게 쌓아 나무기둥들을 고정시키고 그 위에 나무다리를 놓아 이 긴 금강을 건너는 목교를 놓았던 것 같다.

일설에 이 나무다리는 백제 때부터 만들어져 사용되었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그 진위를 알 길이 없다. 다만 저렇게 건너던 작고 가늘고 긴 나무다리가 그 옆의 철교로 바뀌는 긴 세월 동안 금강은 얼마나 많은 물에 숫한 애환을 담아 바다로 바다로 실어 날랐겠는가.

한나라의 자연은 결코 그곳에 살았던 인간의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자연이 그곳의 사람을 키웠을 것이고 그렇게 자란 사람들이 그 자연과 어울려 특별한 역사를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공산성에서 공주의 외곽으로 빠져 부여로 가는 도로는 이곳에서 아주 커진다. 편도 2 차선의 준자동차 전용도로로 변해 금강을 따라 부여까지 달려가게 되어있다. 마침 해가 지기 시작했다. 금강이 서서히 그 너비를 줄여 깊어지기 시작할 때 저 멀리 산 뒤로 해가 붉게 지고 깊은 강물 속에 제 자취를 남겨 매우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어 내었다.

우리와 함께 대동한 권기자는 오래 동안 지는 해의 자취를 카메라에 담아두었다. 해가 지기 시작한다는 것은 좀 슬픈 일이기도 하다. 그 속에는 하루가 그 생을 마쳐가는 지극히 선한 알 수 없는 슬픔이 묻어 있다. 슬픔이 선함과 어떤 관련이 있는 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새는 죽을 때 그 울음이 예쁘고, 사람은 죽을 때 그 말이 선하다’ 라는 말이 있다. 증자의 말로 기억된다. 무엇인가 그 생을 마쳐갈 때, 그 모습에는 참으로 고운 비장미가 있다. 석양 역시 사라지는 것의 슬픔을 담고 산 뒤로 강물 속으로 지고 있었다.

우리는 일단 부여를 스쳐 지나갔다. 하루 밤을 묵기에 좀 더 조용한 곳을 찾아보려 했기 때문이다. 해가 저물어 어두어 지기 시작할 때 우리는 무량사에 도착했다. 배가 고팠다. 객지에 나서면 먹는 것이 단단히 한 몫을 한다. 여기저기 다니며 맛있는 것을 찾아 먹는 재미도 여간 좋은 것이 아니다. 나처럼 먹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더욱 그렇다.

이 날 우리는 맛있는 것을 먹지 못했다. 잔뜩 기대를 하고 왔지만 무량사 앞에는 식당이 3군데 밖에 없었다. 그것도 한 군데를 빼놓고는 모두 불을 꺼 버렸다. 유일하게 불이 켜진 식당 안에서는 주인내외와 또 한 쌍의 초로의 남녀들이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간단한 비빔밥과 막걸리 한 되를 시켰다. 오늘 밤은 그저 소박한 저녁으로 만족해야하나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는 운이 좋았다. 이 집 음식 맛이 보통이 아니다. 묵은 김치를 삶아 볶은 것과 열무김치만으로도 안주인의 내공을 짐작하게 했다. 하나하나 내온 시골 음식은 껌벅 너머 갈 만큼 맛있었다. 운이 좋아 좋은 식당을 골라 들게 되었던 것이다.

갑자기 기운이 솟아 난 우리는 떠들썩하게 즐거운 저녁 식사를 마쳤다. 은혜식당 주인에게 하룻밤을 묵을 만한 시골스러운 집 한 곳을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같이 있던 초로의 사내가 자기 집에서 자고 가라했다. 우리는 모두 그 사내의 집으로 옮겨 갔다. 그는 작은 중소기업을 하다 고향에 내려와 산을 사서 옻나무 농장을 만드는 중이라고 했다. 우리는 하루 밤 잘 곳을 선선히 제공해준 그에게 감사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무량사로 갔다. 무량사에는 대웅전이 없다. 그 대신 아름답기 그지없는 극락전을 가지고 있다. 아마 원형이 잘 보존되기로 이만한 절집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그곳에 서 있었다. 절의 입구 멀리서 사천왕상 사이의 공간 너머로 피안의 빛남 속에 이승의 것이 아닌 양 그렇게 서 있었다.

나는 그 풍광이 주는 아름다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마음도 뗄 수 없었다. 무료한 사람은 여기에 와서 극락전을 보라. 죽여준다. 그래 죽여준다는 이 상스러운 말이 참으로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그 공간은 매혹적이었다. 나는 넋을 잃었다.

극락전 안으로 들어가 그 서늘한 한기를 즐겼다. 극락전은 밖에서는 2층으로 보이지만 안은 아래 위가 통해 있는 하나의 공간이라 천정이 아주 높아 시원하다. 건물의 벽과 지붕이 품고 있는 서늘한 기운은 나를 경건하게 만들었다.

잠시 바닥에 엎드렸다. 엎드린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이냐. 그것은 땅에 심장을 가져다 대는 것이니 잠시 그곳에서 왔고 그곳으로 가야하는 운명의 겸허함을 느끼게 해 준다.

극락전 위로 암자가 하나 있다. 아주 젊었을 때, 그 방황의 한 끝자락을 잡고 헤매다 이 암자까지 온 적이 있었다. 대학 3학년을 마치고 군대 가기 직전의 일이었다. 비가 쏟아지는 날 나는 그 암자로 올랐다. 그리고 그 툇마루에 털썩 주저 않아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보고 있었다.

방문이 열리고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스님 한분이 이 비속에 암자를 찾아 온 젊은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도 무료했는지 모른다. 한 사람은 수행에 지쳐 심심하고, 한 사람은 세속의 번거로움에 시달려 암자를 찾아 왔으니 우리는 거기 그렇게 앉아 몇 마디 말을 나누게 되었다.

그 암자에는 은행나무가 한 그루 밖에 없다. 암수 딴 그루인 은행은 보통 늘 한 쌍을 마주보고 심어두는 것인데, 이곳에는 눈에 띄는 큰 나무가 딱 한그루 밖에 없다. 그때 그 스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은행나무가 한 그루 밖에 없어도 그 은행나무에서 해마다 숫하게 은행을 딴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은행나무가 땅바닥에 고인 빗물에 자신을 투영하여 빗물 속의 자신과 수정을 하기 때문에 해마다 그렇게 많은 은행을 맺게 된다는 설명이다.

그때 나는 그 은유가 좋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물가에 은행나무를 심으면 물속에 자신을 보고 연정을 품어 은행을 주렁주렁 달게 된다는 말은 잘 알려진 이야기였다. 은행은 나르시스 같은 나무인가 보다.

무량사는 매월당 김시습과의 인연으로도 유명하다. 세조 찬탈이후 산하를 떠돌던 김시습은 설잠이라는 이름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집필하게 된다. 잠시 환속했다가 아내가 죽은 후 다시 승려가 되어 무량사에서 영면한다. 그를 모신 사당에는 차양모를 쓰고 일상적 야복을 입은 영정을 모셔두었다. 깊이 파인 미간의 주름은 불행했던 한 천재의 일생을 대변하는 상징처럼 보였다.

매월당은 나면서부터 말보다 글과 더 친숙한 인물이었다. ‘시습’(時習)이라는 이름도 논어의 첫 구절 ‘학이시습’(學而時習)에서 따온 것이다. 3세에 이미 시를 지어 신동으로 불렸다. 소문을 듣고 당시 재상이었던 허조가 김시습을 찾아가 테스트를 했다. ‘늙은이 로’ (老)자로 시를 지어 보라 했더니 금새 시를 지어 노인의 마음을 위로 한다.

노목개화심불로 (老木開花心不老)
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

어린 아이만 봐도 예뻐지는 나이에 이런 신동을 만났으니 늙은 재상이 얼마나 기꺼웠겠는가 ? 어린 천재에 대한 소문은 궁중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5세가 되어 부름을 받고 궁중에 들어가 테스트를 받고 세종의 귀여움을 받았다고 한다.

야사에는 대왕이 상으로 비단을 내려 주며 어떻게 가져 갈 것인지를 물었다고 한다. 비단을 모두 풀어 끝을 이어 한쪽 끝자락을 끌며 사라지는 김시습은 그후 ‘5세문장’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단종을 몰아내고 끝내 죽게 한 세조의 찬탈은 그의 인생 역정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끝까지 이를 용납할 수 없었던 그는 학문을 굽혀 세상에 아부할 수 없었기에 세상을 떠돌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울분과 분노를 보여 주는 일화가 있다.

세조의 수족이었던 한명회가 늙어 자찬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청춘부사직(靑春扶社稷)
백수와강호(白首臥江湖)
젊어서는 사직을 구하고
늙어서는 강호에 누었다

김시습은 이것을 그냥 두지 않았다. ‘부(扶)’를 ‘망(亡)’으로 바꾸고 ‘와(臥)’를 ‘오(汚)’로 바꾸었다. ‘젊어서는 사직을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 사람들이 이 글을 보고 모두 웃었다 한다. 이율곡은 김시습전에서 ‘재주가 넘쳐 그릇 밖으로 흘러 내리는’ 천재라고 평했다.

절 밖으로 나와 매표소 앞 왼편 다리를 건너가면, 그의 부도가 있다. 죽기 전에 ‘3년 동안 매장했다 꺼내 화장하라’ 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 후 3년 후 화장하기 전에 시신을 꺼냈더니 생전의 모습 그대로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가 성불했다고 믿었다.

무량사를 나와 지난 저녁 스쳐지나온 부여로 다시 돌아갔다. 구드레 나룻터에서 배를 타고 백마강을 거슬러 고란사로 갔다. 낙화암이 보이고, 조룡대가 보였다. 평일이라 사람들이 없어 우리가 전세 내듯 배 한척을 다 썼다.

고란사는 지붕을 보수 중이었다. 절 뒤 편으로 돌아가 고란사 약수를 한 모금씩 했다. 잠시 절 앞의 커다란 나무 밑에 앉아 강이 흐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부여는 어떤 슬픔이 머무는 곳이다. 부여 사람들은 그 슬픔과 비감함을 지워 버리고 싶었던지 최근에 부여의 한 복판 로타리에 황금빛 ‘성왕’의 좌상을 만들어 두었다. 성왕은 백제의 수도를 이 곳 부여로 천도한 왕이다. 망국의 한이 서린 비장한 공간을 백제의 부흥기의 화려한 수도의 이미지로 일신해 보고 싶었던 것일까 ?

그러나 오랜만에 부여를 찾은 한 낯선 객인으로 그 로타리를 지나며 나는 그 황금빛에 질려 당황했다. 오히려 부여는 그 비감함으로 차별화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 슬픔이 찬란함으로 승화하여 가슴 속에 잔잔한 무욕의 고요함이 명상처럼 스쳐가게 만들면 안 되는 것일까 ? 잠시 신동엽 시인의 집 근처를 지나며 그의 시를 떠올렸다. 한 때 나는 그의 시를 참 좋아했다.
‘.... ....
다시는
못 만날지라도 먼 훗날
무덤 속 누워 추억하자
호젓한 산골길서 마주 친
그날, 우리 왜
인사도 없이
지나쳤던가, 하고 ‘
- ‘그 사람에게’ 후반부, 신동엽, 1968년

우리는 백마장교를 지나 625 도로를 타고 강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장하리 3층 석탑을 보았다. 이 석탑은 참 늘씬하다.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을 본 따 만든 것이라고 하는 데, 그 당시는 아마 졸작으로 평가되었을 지도 모른다. 후덕한 비례가 아니라 탑신은 새의 날개처럼 펄럭일 듯 길고 몸통도 가늘고 길어 마치 박복한 꼬챙이처럼 늘씬한 석탑이니 그 당시 사람들이 좋아했을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장하리 석탑은 전지현을 닮았다. 늘씬하고 키가 크며 잘 빠졌다. 어떤 장인이 그 당시 패러다임과는 다른 ‘늘씬’모드로 탑을 만들어 두었는 지 궁금했다. 슬그머니 웃으며 탑을 등지고 다시 강경길로 올랐다.

강경을 지나며 금강은 그 폭이 넓어지고 깊어진다. 긴 황산대교를 지나자마자 왼쪽으로꺽어지면 죽림서원이 나타나고, 작은 동산 위에 ‘임리정’ 이 서 있다. 죽림서원은 원래 지방의 유림들이 이이, 성혼, 김장생의 학문과 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황산사(黃山詞)하고 불렸다. 그 후 현종 때 ‘죽림’ 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 조광조, 이황, 송시열 등이 더해져 조선조 6현을 배향하게 되었다.

죽림서원에서 1분 정도 동산을 오르면 ‘임리정’을 만날 수 있다. 임리정은 김장생이 후학을 기르던 강론처였다. ‘임리’(臨履)라는 이름은 시경의 ‘여림심연 여리박빙’ (如臨沈淵 如履薄氷)에서부터 따온 것이라 한다. 즉 ‘조심하기를 깊은 연못에 임하는 것 같이 하고, 마치 얇은 얼음 위를 밟는 것처럼 하라’는 뜻이다. 무엇을 그리 두려워 근신하라 했던 것일까 ?

잠시 툇마루에 앉아 스스로 근신하고 절제하여 선비의 풍모를 잃지 말라는 경계의 말을 되새겨 보았다. 한없이 가벼워지고 경박해진 사회다. 사람의 존재의 무게가 사라지고 상품으로서의 교환가치만이 무성한 시대다. 이 동산에서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타고 면면히 흘러가는 역사의 교훈을 지켜보며 호연지기와 학문을 배우던 선비들이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은 덧없는 한 때의 성공에 우쭐대고 거만하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마침 점심 때가 되어 우리는 시장으로 들어가 강경에 가면 꼭 먹어봐야하는 우어회 한 접시를 시켰다. 봄에 많이 잡히는 우어회는 끝물이었지만 값이 싸고 고소하여 먹을 만 했다.

강경에 이르러 금강은 옛날 백제의 시대에 기벌포라 불리던 장항으로 가는 마지막 여정을 서두른다. 우리는 이 정도에서 강 따라 흐르는 길을 그만 놓아 주었다.

되집어 돌아오는 길에 성흥산성에 올랐다. 이 성은 백제 때 쌓은 석성이다. 여기에 오르면 수도였던 웅진과 사비 그리고 강경으로 빠지는 모든 길목이 한 눈에 들어온다. 당시 대단히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백제가 망한 후 복위운동의 중심 거점이 되기도 했었다. 이 산성의 정상에는 수 백년 묵은 느티나무 고목이 있는 데, 그 줄기의 커다람 때문에 그늘도 두텁고 크다.

잠시 산 아래 펼쳐지는 부여 강경의 길들과 산들을 보며 어제부터 서두를 일 없이 유유히 돌아 다녔던 우리의 족적을 따라가 보았다. 마치 바둑을 복기하듯 짧은 여행의 행적을 더듬어 정리하기에는 참 그만인 장소였다.

시원한 고목 밑에 자리 잡고 앉고 누운 촌로들을 보며, 문득 몇 년 전 회사를 그만두고 걸어서 두 달간 돌아다니던 남도배낭여행을 생각했다. 그때 두 달 동안의 여정과 감회를 ‘떠남과 만남’이라는 여행 단상집 속에 담아 두었었다. 그 책의 서문에 나는 다음과 같이 써 두었었다.

“여행은 자유다. 그리고 일상은 우리가 매여 있는 질서다. 질서에 지치면 자유를 찾아 떠나고 자유에 지치면 다시 질서로 돌아온다. 떠날 수 있기 때문에 여행을 늘 매력적인 것이며, 되돌아 올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비장하지 않다. ”

이제 우리는 다시 2006년 여름의 서울로 되돌아가리라. 다시 일상의 질서로 귀환하리라.
IP *.116.34.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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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
2006.07.15 19:18:17 *.145.231.128
같은 길을 같이 다녔음에도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나니...
아직도 배우고 또 배워야 함을 느끼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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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
2006.07.15 20:44:27 *.190.84.143
일상의 한가로움에서 창조를 만들어내는 멋 언제나 배우고 따라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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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탄
2006.07.18 23:59:40 *.225.18.189

안녕하세요? 소장님. 꿈벗 프로그램은 잘 마치셨는지요?
늘 도보여행에 대한 꿈을 갖고 있는데, 소장님의 금강기행을 보고 여쭙니다. 혹시 추천해주실만한 도보여행 코스, 혹은 자료가 있으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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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욱
2006.08.12 23:00:45 *.73.197.31
한편의 장대한 인간드라마 같습니다.
넘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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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탄에게
2006.08.25 22:22:21 *.116.34.219
주로 차를 타고 다녀서 많이 걷지 못했지요. 걸으려면 흙길을 골라야지요. 전 국토가 다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덮혀있어 흙을 밟을 수 있는 곳은 산 뿐일 것입니다. 산을 좋아하나요 ?

나는 두 군데가 생각나요.

6년 전에 나는 흑산도를 한 바퀴 돌은 적이 있어요. 역시 ' 떠남과 만남'에 그 소회를 적어 두었지요. 최고지요. 만일 그 순환 도로가 아직 포장되지 않았다면.

역시 또 하나의 섬이지요. 여수에서 배를 타고 떠나면 되는데, 거문도 등대까지 가는 짧은 길이 기가 막혀요. 동백이 필 때 가세요. 그대는 그만 죽고 말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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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6.11.28 18:22:39 *.70.72.121
눈물 뚝뚝 동백꽃송이... 사부님 좇아 여행 함께 할 수 없으려나...
매일 아침 밥하라해도 기꺼이 따라 나설 것 같은데, 막내님! 왜 그리 사부님 속으로 들어가려 하는지 알 것 같으이... 용감한 귀자님의 행보도... 10기 "따로 또 같이" 우리 함께 마련해 보면 어떨까요? 미루어만 두는 꿈들이 저절로 살아 꿈틀거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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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훈
2007.01.10 07:40:44 *.173.139.94
와^^ 가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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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12 11:31:36 *.212.217.154

머릿속으로 선생님의 여정을 되집어보았습니다.

마치 눈앞에 펼쳐지는듯이 생생하게 다가왔어요^^

선생님의 산문집도 한번 구해 읽어봐야겠습니다.

이렇게 좋은 글로 아름다운 우리산천을 다시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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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22 12:06:13 *.196.212.201

여행은 마음의 여유가 있을때 많은것들을 느끼고 배우게 되는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새로움과 배움이 들어갈 수 있게

내 마음 한켠을 비워둘 수 있는 여유

그런 여유가지는 삶을 살수있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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