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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1월 5일 19시 51분 등록

쓰고 있는 글들이 햇빛에 바싹 마른 종이들처럼 바스러지며 부서질 때, 모자를 쓰고 밖으로 나와 땀을 흘리는 것은 내게 좋은 일입니다.

울력은 선방에 앉아 수련을 하는 것 못지 않은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노동은 생각을 몰아 냅니다. 노동은 노동만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땀을 흘리고 잠시 탁자에 앉아 물을 마시고 쉬면, 그것이 즐거움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어쩐 일인지 모르지만 그렇게 잠시 쉬고 있으면 삶이 푸른 하늘에서 흘러가는 구름처럼 지나가는 소리를 듣습니다.

흙일을 할 때는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옷 중에서 가장 초라한 옷들을 골라 입습니다. 흙이 묻어도 좋은 그런 막 옷을 창고에 걸어 두었다가 갈아입습니다. 초라한 옷일수록 편한 것이 노동입니다.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나는 내가 ‘누군가에서부터 아무나’가 되는 듯 합니다. 사회적 인간에서 성도 이름도 중요치 않은 그저 자연 속에 쭈그리고 앉아 푸성귀를 뜯고 김을 매고 북돋아 주는 장면 속의 한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노동은 우리가 땅과 가장 가까이 다가가도록 도와줍니다. 인생으로부터 겉돌다가 겨우 인생 속으로 사심 없이 스며들도록 도와줍니다. 인생이 이렇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주는가 하면, 잎사귀 하나 꽃 한 송이가 이렇게 위대한 아름다움인 것을 느끼게 해 줍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이름 없는 것을 버리고 누군가가 되려고 애를 씁니다. 누군가가 되는 것, 그것을 성공이라고 부릅니다. 누군가가 되는 순간 우리는 그 누군가에 갇히게 됩니다. 성공을 즐기고 성공 속에 갇히게 됩니다. 우리가 성공을 향해 끊없이 움직여 왔다는 사실, 구름 같은 변화가 곧 성공 자체였다는 것을 잊고 맙니다.

햇빛이 아름다운 푸른 날 구름을 보면, 그것이 늘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소나 말처럼 보이다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다시 커다란 코끼리처럼 보이거나 웅크려 도약하려는 호랑이가 되기도 합니다. 물론 또 다시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스르르 흩어져 버리지요. 모든 흘러 가는 것들은 그 일회성 때문에 유일합니다. 그래서 소중합니다. 간혹 무엇이 되어도 좋고, 다시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돌아가도 좋습니다.

요즈음은 책이 잘 읽혀지지 않습니다. 유혹이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이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눈을 창 밖으로 돌리면 더할 나위 없이 눈부신 계절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부처럼 장미가 피어나기 시작하고, 푸른 산 위에 이제 여름다워지는 그 매력적인 흰구름이 걸려 있습니다. 화려한 유혹입니다. 이런 날 책을 읽는 것은 따분한 일입니다. 나는 본능을 따릅니다. 정신보다는 육체의 에너지와 손발을 움직이는 쾌감의 안내를 받게 됩니다.

내가 밖으로 나가려고 훍 묻은 옷을 주섬주섬 입으려고 하면 처는 내 얼굴에 선크림을 발라 주려고 합니다. 좋은 옷을 입고 흰샤츠에 타이를 매고 강연을 할 때 촌놈처럼 새까맣게 보이면 안된다는 것이지요. 난 그걸 잘 바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처가 짐짓 화를 내고 발라 주면 가만히 있긴 합니다. 모처럼 무릎을 배고 누워 얼굴에 부드러운 손길이 닿는 것을 즐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냥 뛰쳐나가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저 소년처럼 미래가 지금의 즐거움을 갉아먹지 않도록 심호흡을 하고, 지금 아름다운 순간을 서둘러 즐기기 위해 장화를 신고 흙 묻은 옷으로 갈아입고, 흙이 되고 벌레가 되고 채소가 되고 이파리가 되고 꽃이 되고 구름이 되기 위해 밖으로 달려나갑니다.

도회지에 살아 땅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노동 역시 낯선 것들이 되었습니다. 밀폐된 체육실의 운동이 자연 속의 노동을 대신하게 되었지요. 그나마 그것도 하지 않는 무운동 무노동이 일상이 되기도 했구요. 몸을 쓰는 일들이 그립습니다. 사라지는 육체를 즐기는 법들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보세요. 갑자기 내가 원하는 대로 손발이 움직여 준다는 것이 신기하기 짝이 없습니다. 누가 이렇게 잘 만들어 놓았을까요.

IP *.229.14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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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08 07:59:48 *.253.105.224

노동

자연스러운 삶, 본능, 지금. 미래가 아닌 오늘을 사는 즐거움.

노동을 놀이로 만드는 마법을 쓸 것.

즐거운 상상을 할 것.

상상을 실천 할 것.

늘 즐거움을 추구할 것,

자신에게 솔찍할 것, 솔찍한 질문과 솔찍한 대답.

핑개대지 않을 것. 책임 질 것.

그 책임 안에서, 즐거울 것.

감사할 것. 작은것에 감사할것.

오늘을 살 것, 내일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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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07 18:14:45 *.213.177.78

땀흘리며 운동하고, 노동한지가 까마득 하네요. 

개운한 피곤함을 느낀지도 꽤 된거 같습니다. 

가끔은 책을 덮고, 

모든 걸 잊은 체 땀흘리며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봐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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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8 20:36:40 *.212.217.154

그래서 제가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에 푹 빠져있나봅니다.


내 손으로 생명을 키우고

의미있는 물건을 만드는 행위는

생산의 의미를 넘어

행위 자체로서 우리를 풍요롭게 합니다.


그곳에서 제가 가야할 길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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