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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꿈벗

‘나를

2012년 6월 21일 11시 08분 등록

 두꺼운 뿔테 안경, 나무로 된 널찍한 탁자에 무수히 쌓여있는 원고지와 책, 넘치기 일보직전인 재떨이와 담뱃재, 골방, 덥수룩한 머리, 희끗희끗한 흰머리, 고뇌의 깊이만큼 패인 주름살, 구석에 처박혀 있는 소주병, 꾸깃꾸깃 흩어져 있는 휴지가 되어버린 원고지들……

 

 오늘도 글쟁이로 불리고 싶은 작가는 꾸부정한 자세로 앉아 한 손에는 담배를 들고 담배연기 때문에 매운 눈을 찌푸리며 글을 쓰고 있다. 작가의 삶은 고달프다. 특히 대박이 나지 않으면 고달프지 못해 처절하기까지 한 삶을 사는 게 작가다. 출판사 편집자는 수시로 전화와 방문을 해 탈고를 재촉하지만, 작가는 기다림이 없으면 역작이 나오지 않는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바람도 쐴 겸 나온 동네 구멍가게를 지날 때면 이혼 이후 보기 힘든 딸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려 공중전화에 다이얼을 돌려보지만 냉대한 반응으로 담배와 소주를 위안으로 삼는다. 여기까지가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글쟁이들의 삶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본 기억도 있지만 그 이전의 아련한 기억이 떠오른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인문계 고등학교,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지만 일제시대의 몹쓸 타성에 젖어있는 오래된 학교, 명문대 진학률로 학교 분위기가 판가름 나고 여느 학교에서나 마찬가지로 우열반을 정해 보충수업을 하던 학교. 올림픽이 끝난 직후 돈뭉치를 들고 다니는 부자들이 입주해 사는 아파트 아이들과 논과 밭을 뛰어 다니며 자연에서 살던 서울과 경기도 경계에 살던 가난한 아이들간의 보이지 않는 싸움. 그 속에 내가 있었다. 친한 친구들 중 단 2명만이 그 학교에 배정 받았다. 서로 반이 달라 학교가 끝나야 얼굴을 볼 수 있었기에 혼자나 다름없었던 나는 수줍은 소년일수 밖에 없었다. 첫 중간고사의 성적이 꽤나 좋아 조금 더 노력해 명문대에 진학하자는 담임 선생님과의 면담 후 나는 삐뚤어지기 시작했다. 왜 그랬는지는 기억에 없다. 아마도 첫사랑이었을 것이다. 그 무렵 첫사랑을 만났으니 그랬을 확률이 높다. 그렇게 삐뚤어짐의 각도가 커지던 즈음 나에게 새로운 세상이 왔다. 작문 시간이었다. 명문대 입시에서 논술이 추가된다는 사실 때문에 생기기는 했지만 1주일에 한 번 있던 그 시간이 무척이나 재미있었고 기다려졌다. 선생님도 EBS에서 논술 강의를 하셨던 분이고 유쾌하게 작품에 대한 해석을 해 주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작문 시험은 과목의 제목대로 작문이 전부였다. 한 가지 주제가 주어지고 그에 대해 논리적인 글을 전개하면 됐다. 공부를 잘하던 친구들도 작문 시간은 힘이 들었음에 틀림없다. 내 작문 성적은 반에서 가장 위쪽에 있었으니 어찌 재미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명문대에 갈 실력이 되지 않았지만 내 수업 자세가 마음에 들어 선생님께서 나를 따로 부르셨다고 생각했다. 내 눈빛에서 논술을 준비하는 학생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가 느껴지셨는지 수업을 너무 진지하게 듣지 말라는 충고를 해 주셨다. 작가를 꿈꾸다 그나마 잘 풀려 선생질을 한다고 하셨다. 그때는 몰랐다.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포맷을 자주하는 내 머릿속 지우개로 완전히 지운 시간이었다. 그런데, 왜 지금 그 기억이 되살아 난 것인가?

 

 나는 지속적으로 성적이 떨어졌고, 등록금만 내는 학생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그 사이 나는 시를 읽으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시를 읽는 시간보다 시를 쓰는 시간이 더 많았다. 유치한 사랑의 시였지만, 짝꿍에게 품평을 듣기도 했다. 비슷한 감수성의 나이였던 짝꿍의 좋은 평가도 결국 작가의 삶에 대한 충고로 인해 기억 속에 묻혀진 꿈이 되어버렸다. 그보다 더 어린 시절 잠을 자다 엄마 품으로 달려가게 했던 꿈이 기억난다. 재개발 지역의 다 쓰러져가는 집 앞 공터에 내가 서있고 고급 승용차가 먼지를 날리며 우리 집 앞에 멈춰 섰다. 검은 양복에 덩치 좋은 아저씨 몇 명이 우리 집안으로 급하게 뛰어 들어가는 모습을 난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내 꿈은 그 장면에서 멈췄다. 가위에 눌린 사람처럼 그 상황을 벗어나려 애썼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렇지 않은데 그때는 무서웠다. 그리고, 가난에 대한 얘기는 가난하게 자라신 아버지로부터 너무 많이 들어 가난이 싫었다. 그 가난으로 가는 지름길이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선생님의 충고 이후에 작문에 대한 기억이 사라졌다.

 

 어린 시절 밤에 꿨던 꿈이 악몽인지, 모든 신경이 살아있는 이 시간에 꾸고 있는 꿈이 악몽인지 구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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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5 06:04:56 *.10.140.14

꿈인지 생시인지.

 

때로는 꿈이었으면 하는 과거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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