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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 30일 01시 48분 등록

후련히 살다 홀연히 사라지다

 

 

연구원 3기 수료 즈음에 이르러 우리 연구소는 첫 프리북페어를 기획하였다.

사부님께서 당신의 3번째 아딸(? 아들과 딸들)인 연구원 3기에게 출판사 편집인들을 초청하여, 앞으로 연구원 2년차가 되어 각자 자신들이 쓸 책에 대해 발표해 보도록 이르셨다. 그 때의 과제로 내가 쓰겠다고 한 책의 제목이 바로 <후련히 살다 홀연히 사라지리라>이다. 나의 자서전적 에세이를 담아보려 했던 거다. 내 작품은 아직 미완성인 채로 변경연 홈피 한 귀퉁이에 머물러 있다. 변경연 식으로 표현하자면 아직 사람(용)이 되지 못하고 구천을 헤매고 떠도는 이무기(?)로 처박혀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러니까 좀 더 정확히 2013년 사월의 어느 봄날에 사부님께서 내가 책의 제목으로나 쓰려했던 대로 정말로 '후련히 살다 홀연히 사라지'고 마셨다.

해당 기수로는 선배지만 밥숟가락으로 따져 오히려 내게 누나라고 부르는 연구원 하나가

"누나가 써놓은 글대로 사부님께서 그렇게 되고 말았다" 며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해마다 사월이면 봄바람에 더욱 살랑이던 스승님의 발걸음

 

 

나는 4월 첫 주에 개인적인 모임이 있어 지방에 가 있었는데, 느닷없이 "사부님께서 위독하시다"는 전갈을 받았다. 컨디션이 안 좋아 그곳에서 일찍 몸살 약을 먹고 취침에 들어간 탓에 전날 밤늦게 문자가 왔던 것을 모르고 다음날 아침 일찍 깨어서야 보고는 몹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안 그래도 그 즈음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어 조용히 사부님의 근황에 대하여 수소문을 하였던 참이다. 하지만 평소의 스승님 성품을 알기에 매우 조심스러웠고, 그래서 짐짓 모르는 척 줄곧 기다리고만 있던 터라 무척 애가 탔는데, 급기야 올 것이 오고야 만 듯 졸지에 청천벽력과도 같은 비보가 날아든 것이 아닌가?!!

나는 당시 원우회 일원들과 함께 청풍이란 곳에 가 있었다. 대학원 후배 하나가 귀향을 했다고 집들이를 겸해 모임을 청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덧붙여 너무 좋은 곳이라며 풍광에 반하고 말테니 꼭 다녀가라고 하였다. 하도 신신당부를 하여서 몸살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리를 해 간 탓에, 나는 일행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것이다.

청풍에 도착한 그 날, 저녁을 먹기 전 집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가히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었다. 더욱이 무엇이 그리 마음에 들었던가 하면, 마침 그곳이 사부님께서 늘 입버릇처럼 말씀 하시던 "바닷가 집필실"을 연상케 하는 곳과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곳 주변을 둘러보면서 "우리 사부님께서 이곳에 오시어 집필하시도록 하면 참 좋겠다!" 라며 탄성을 자아내었다. 그러고 보니 새내기 9기 연구원을 맞으며, 전체 연구원 모임을 갖으려고 예정 해 두었던 장소 또한 이곳 부근의 리조트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나 역시 뻥을 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연구원시절 나는 확실히 운이 좋았다. 사부님과의 여행을 제법 많이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때 나는 사부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되도록 동행할 기회를 가지곤 했다. 그래서 평소 사부님께서 어떤 장소를 좋아하시며, 장소 선택에 대하여 얼마나 신중하고 섬세하신지 잘 알 수 있었다. 평소 사부님께서는 여행 중 달리는 차 안에서도 얼마나 즉흥적으로 날렵하게 아름다운 풍광들을 잘 잡아내시는지 모른다.

대부분의 연구원들이 다 경험한 대로 사부님께서는 우리 연구원이나 꿈벗 등과 동행할 때면, 언제나 그 지방의 특별한 문화유산 중 우리가 꼭 가보아야 하는 유서 깊은 곳이나 특별한 곳에 어김없이 들르시곤 했다. 게다가 그 지방의 특산물에 대하여는 반드시 맛보게 하시곤 하였다. 함께 여행을 할 때면 풍광 좋은 곳에 숙소를 정하기 위해 얼마나 애쓰시는지 모른다. 몇 바퀴를 돌더라도 가장 경치 좋은 곳을 기어이 찾아내고야 여장을 풀곤 하셨다. 그럴 때면 우리들 역시 그 사부에 그 제자들 같았다. 비록 나이 많은 제자라 할지라도 사부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실 때까지, 아무리 날이 저물고 시장기가 돌아도 일언반구 없이 몇 바퀴고 왔던 길을 다시금 뱅뱅 돌아가며 기꺼이 따라 다니며 찾곤 했다. 그러한 연유로 우리도 제법 풍광 좋은 곳을 찾을 수 있는 안목을 지니게 되기도 하였다.

 

 

사부님께서는 바다를 좋아하셨다. 그다지 수영을 잘하시는 것도 아닌데, 연구원 시절 우리들과 함께 남해바다를 자주 가시곤 했다. 산도 좋아하시지만 너른 바다를 더욱 좋아하셨다.

연구원들의 해외연수 시에도 항시 물에 한 번이라도 첨벙 들어가야만 하신다. 인자요산仁者樂山이요 지자요수知者樂水 란 말이 있듯이, 그래서 나는 사부님께서 특별한 지혜를 타고나신 분이라 바다를 더욱 좋아하시는가보다 생각하였다. 그래 그런지 하여간 사부님께서는 생전에 늘상 바닷가 집필실을 꿈꾸셨다. 욕지도에 갔을 때도 그러하셨고, 사량도에 갔을 때에도 바다가 내려다 뵈는 조촐한 산장을 흠모하시었다. 어느 괴짜 양반 하나가 그럴 사한 위치에 소담한 별장을 지어 살고 있었는데, 우리들과 함께 그 댁을 방문하여 차를 얻어 마시며, 그 댁 주변의 풍광에 대해 조망하시며 탐내시는 눈치였다. 연구원들도 자연스레 사부님의 취향을 알기에 꼭 그렇게 마련해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일었다. 사부님께서는 어딜 가든 항시 그곳에서 가장 최적의 아름다운 곳을 찾아내기를 즐겨하셨다. 마음에 드는 집을 구경하게 되면 우리처럼 아니 어린 아이처럼 동심으로 돌아가 호기심 어리고 다소 들뜬 모습이 되곤 하셨다. 그래서 연구원들 또한 사부님 생각과 같이 언젠가 바닷가 집필실을 마련하여 사부님과 함께 글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하였다.

 

 

그런데 불과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완전 날벼락 같은 희비가 엇갈리는 비보를 접하고 보니, 놀라운 정도가 아니라 이건 정말 미쳐죽을 노릇 그 자체였다. 나는 밤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와 있었던 비보를 동이 트기 전 새벽에야 발견하고는 몹시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난생처음으로 짐승처럼 목 놓아 울부짖으며 어쩔 줄을 모르는 채 그저 펄쩍펄쩍 뛰는 심정이었다. "어떻게? ... 어떻게?... 이 일을 어쩌면 좋아?... 어떻게? 어떻게? 아휴... 아이고... 아, ,,, 아... 난 몰라, 난 몰라... 어떻게? 어떻게? ......." 만을 다급하게 내뱉으며 저절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옆방에 잠들어 있던 일행들이 놀라서 깨어 달려와서는, 왜 그러느냐고 아무리 붙들고 흔들어대며 물어도 나는 도무지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온 방바닥을 기고 헤매면서 데굴데굴 구르다시피 마음이 졸아드는 것 같았다. 너무나 가슴이 미어져 가슴을 쳐대며 펑펑 꺽꺽 울부짖었다. 새벽부터 이게 무슨 난리냐고 정신 좀 차리라며, 낯선 동네에 와서 주위 사람들 놀라게 이러지 말라며 원우들은 한사코 마구 말렸으나, 나는 그런 말 따위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여러 사람들이 달라붙어 내 어깨와 등을 마구 쳐대며 물어도 입이 얼어붙은 듯, 다른 말은 나오지가 않았다. 아니 말을 하면 그 길로 끝장이 나버리고 말 것만 같아, 절대로 아무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설명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놀라서 달래는 사람들을 아랑곳 하지 않고, 이불을 뒤집어쓰거나 내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면서 발을 동동 구르며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절규를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울고 났더니 지치고 머리가 아프고 허기가 지면서 어지러웠다. 배도 고프고 속도 쓰렸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매일 울다가 웃다가를 되풀이하면서 마구 먹어대기를 반복하고 있다. 허기진 사람처럼 아무리 먹어도 기운이 빠지고, 자꾸만 속이 쓰려오기 때문이다.

 

 

마침 그날의 모임에는 내게 우리 스승님과의 연을 닿게 해준 선배 하나가 같이 있었다.

그녀 역시 대학원 동문이었는데, 자신이 매일 받아 읽던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의 <마음을 나누는 편지>를 내게 소개한 장본인이다. 그 인연으로 나는 그해 몇 달 간 <마음을 나누는 편지>를 받아 읽다가 어느 날 스승님께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는 코너의 꿈 찾기 프로그램에 2자리가 남았으니 원하는 사람은 선착순 신청을 하라는 안내를 보고 서둘러 신청을 하였었다. 그때는 스승님과 연구소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의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그냥 보통의 사무실처럼 생각하고 근무가 시작될 시각 즈음에 연구소로 전화를 걸었다. 선착순이라고 하니까 행여 누가 나보다 먼저 등록을 하면 자리를 뺏길 것이므로. 오전 일과가 시작될 즈음의 시각에 곧바로 수화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 때 바로 1인 기업가이신 스승님께서 직접 전화를 받으시며, 당신께서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의 소장이라고 하시어 매우 놀란 기억이 있다. 그렇게 해서 꿈벗 10기를 거쳐 나는 연구원 3기에 도전하게 되었고, 지금껏 변.경.연.과 인연하게 되었다.

 

곁에서 내가 우는 것을 한참동안이나 지켜보며 아무리 물어도 대답조차 하지 못하는 나를 향해 선배 언니는 다른 동문들에게 심상치 않다는 듯 연신 고개를 갸우뚱하며 걱정을 하였다. 두 손을 포개어 꼭 쥐고는 가슴에 대고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내게서 휴대폰을 빼앗아 검색하여 보고는 "선생님, 위독이라"... " 하며, "아마도 내 추측으로 쟤가 저토록 서럽게 울 정도의 스승은 단 한 분밖에는 안 계신데... . ... ?" "이상하네, 그 분은 절대 그럴 리가 없고... 대체 누구길 레 저러지?" 하며 중얼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망연자실 널브러진 채 울부짖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해? 어떻하면 좋아? 방법이 뭐야? 방법이? 방법을 찾아야 하잖아?... 방법이 도대체 뭐냐고?" 만 하염없이 혼잣말로 소리치면서 꺽꺽 울부짖기만을 할 뿐이었다. 단연컨대 그 날이 아마도 내 인생에서 가장 안타깝고 억장이 무너지는 날이었다. 절절한 슬픔이 온몸에 폭풍처럼 밀려왔다. 그때 어렴풋이 어렸을 적 엄마가 슬피 울던 날의 기억이 잠시 스쳐지나갔다. 외할머니를 잃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 때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생 이었는데, 엄마는 몇 날 며칠을 두고 아주 서럽게 우시곤 했다.

 

 

한참 후에 연구원 선배이면서 변경연식의 호칭으로는 오히려 아우인 연구원들과 통화가 이루어졌다. 그들도 얼른 전화를 하지 못하고, 전화를 해놓고도 얼른 말을 잇지 못했다. 깊게 목이 멘 음성엔 슬픔이 가득 메아리쳤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을 받아들이거나 믿을 수는 도저히 없었다. 그 자신도 임상 활동을 하는 현역 의사이기도 하지만, 믿기지 않은 듯 어리둥절한 톤으로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했다. 그러나 애써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으며, 그러다가 또 흐느낌에 목이 매여서는 "절대적인 소식은 아닐 수 있으니 아직 희망을 버리지는 말자!" 는 위로를 하며 나와 제 자신을 다독였다.

 

 

 

생전에 그리던 바닷가 집필실을 황천黃泉 에야 두시고

 

 

그날따라 그곳 청풍에는 새벽부터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답답한 심정에 밖으로 나가 걸으니 호수 주변의 산에는 물안개가 자욱이 피어올라 마치 신선의 나라에 잠겨 있는 듯한 신비경이 펼쳐졌다. 아름다운 풍광이 눈앞에 펼쳐지자 더욱 스승님 생각이 났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이곳으로라도 모시고와서 책임지고 투병생활을 도와야겠다는 결심까지도 불타올랐다. 비록 바다는 아니지만 아름다운 호수와 산으로 둘러싸인 아담하고 아기자기한 여기 이곳이나, 공기 좋은 다른 어떤 곳으로라도 모시고 가서 온갖 세상 시름 다 잊으시게 하고서, 평소 가장 하시고 싶으신 대로 마음껏 글 쓰시며 여행하실 수 있도록 해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굴뚝 같이 밀려들었다. 우리들의 사부님을 그저 맥없이 이렇게 허망하게 보내드려서는 절대 안 되었다. 아니, 아직 사부님은 너무 젊고 할 일도 많이 남아 있지 않은가. 비단 나만이 뒤늦게 경거망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제자들의 마음이 죄다 갈피를 잡을 수 없어하는 가운데, 자초지종을 알지도 못하니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나중에 급작스레 사부님을 뵙고 긴급한 대책 회의를 논하게 된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스승님을 떠나보낼 수도 있다는 사태에 대해서 용납을 못한 채 거의 공감하려 들지 않았다. 감히 생각해 보기조차 싫은 듯 무언가 소생에 도움이 되는 방법을 모색하는 일에 더 마음을 쏟으려 열을 올렸다. 그도 그럴 것이 제 아무리 사태가 긴박하다고 해도 소위 투병 기간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야말로 이토록 천청벽력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나? 사부님이나 가족께서는 당연히 우리보다 더 하늘이 무너졌을 것이다. 그러하다보니 경황없는 가운데서 그만 홀로 혹은 어쩔 수 없이 가족과만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계셨던 것이리라. 병세가 통증을 못 느끼는 가운데 찾아든다거나 급성으로 인한 때문만이 아니라, 어떠한 경우라도 평소의 신념대로 임하신 때문인 것 같다. 그토록 반듯하고 정결하게 일상의 단정한 모습으로 대처하고 계셨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너무도 안쓰럽고 송구하며, 하늘도 무심하심을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돌이켜보면 결과적으로 그때 사태가 무척이나 심각한 지경이었음에도 우리는 말 그대로 '위독'하다거나 자칫하면 스승님을 잃을 수도 있다는 데에는 도저히 절대로 용납이 되지 않아 했다.... . 마치 잘못된 오보이거나 어느 정도 과장이라도 된 듯이. 만일의 사태에 대하여도 전혀 염두에 두고 싶지 않아 하며, 가상적 시나리오란 있을 수도 없는 일처럼 외면하고 싶은 심정들이었다... . 그토록 피하고 싶기만 하고 감당할 수 없는, 마치 어린아이 마냥 그저 한량없이 당혹감만 느끼며 허둥댔다. 파기되면 더욱 좋은 것이라며 조심스럽게 이른바 플랜 B 대책을 논의할 때에도, 대다수의 의견이 지금 왜 그런 최악의 경우를 논하느냐고 화가 치솟는 어조와 심정으로 반문들을 했다. 그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분명히 쾌차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과 기대를 모으고자 너무도 간절했다. 모두가 기적의 신봉자들인 마냥.

그럴 수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가족 역시 평상시의 사부님과 같은 정결한 모습으로만 임하셨기에 우리는 거의 모르고 천하태평으로 지냈다. 추호도 변.경.연.에 혼란과 근심을 최대한 끼치지 않으려는 일념 하에 조용히 인내로만 너무도 엄청난 사태를 고스란히 끌어안고 계셨던 것이다. 침묵으로 일관해 계셨던 탓에 우린 너무도 죄송스럽게도 가족께만 그토록 엄청난 사태를 일임한 채로 있었던 것이다. 사부님 평소의 소신과도 같이 너무나 큰 배려로만 일관하셨다. 사지를 헤매고 계신 중에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한 고결한 가짐으로 일관하셨다. 이러한 넘치는 사랑과 은혜를 어찌 만분의 일이라도 갚을 수 있을지 정말로 모르겠다... .

그러하였기에 긴급 모임 당시에 숲지기인 한 벗도 사부님의 병세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심을 이해할 수 없어하며, 동문 회장이 조심스레 심각한 상황임을 알려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 모양으로, 설령 그렇다면 사부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여야 한다고 펄쩍펄쩍 뛰다시피 했다. 그는 급한 마음에 제가 있는 숲으로라도 당장이라도 모시고 가고 싶어 했다. 한적하고 공기 좋은 곳으로 모시어 스승님을 여일하게 하면, 아무리 위중한 병환이라도 행여 금세 낫기라도 할 것처럼. 이렇게 큰 일이 터질 줄은 미처 생각을 못하고서, 대다수가 최선을 다해 스승님을 살릴 궁리만을 하고 싶어 했다. 그토록 긴박한 줄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던 것이다.

 

 

당시 우리의 미천한 생각으로는 가족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당장이라도 책임지고 모시겠다는 마음들이 섰다. 숲지기도 그래서 그토록 열변을 토하였던 것이다. 여러 사람들이, 특히나 해묵은 초창기 선배 기수들이 주축이 되어 사부님과 함께한 시간이 길고 깊을수록, 애달아하는 모습의 강도도 근접할 수 없을 만큼 진지하였다.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청풍의 내 원우도 제가 살려고 대여한 집을 기꺼이 내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동안 간접적으로 하도 말씀을 들어와서 그런지 전혀 남의 일 같지 않다며 자기도 도와드리겠다고, 꼭 모시고 오라고 오히려 내게 당부까지 하였다. 입맛에 맞게 해드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오시기만 하면 제 부모님이 곁에 계시니 약초며 산나물이며 웰빙으로만 대접해 모실 수 있겠노라며, 이참에 언니도 아주 이곳으로 와서 터를 잡고 살며 가까이 모시는 것이 어떠하겠냐고 까지 하였다. 그리하면 많은 언니와 같은 제자들 또한 합심하여 도울 수 있지 않겠느냐 면서. 터를 잡아두면 많은 이들이 시간을 내어 자주 찾아뵐 수 있고, 기쁘고 즐겁게 해드리기에 용이할 것이라며.

문제는 병세가 위중한 환자이기 때문에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검진시스템이 잘 갖춰진 대학병원 수준의 병원이 가까이 있어야 할 텐데, 교통상의 거리가 가장 관건이 될 듯싶었다. 그 날 그곳에 모인 나의 원우 9명 모두가 서울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일제히 자신들이 주위로부터 겪어 알게 된, 암에 대한 갖가지 정보를 쏟아내 주었다. 가까운 사람의 생애 최대의 절박함과 그 최후를 근접하여 지켜본 사람만이 토로할 수 있는 귀하디귀한 경험과 체험담들 이었다. 오랜 시간 함께한 세월의 동지들이어서 그런지 위급할 때 진정으로 신뢰할 만한 진가를 발휘하며 마음을 써 주는 구나 내심 든든하기까지 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귀경길 내내 연구원 하나와 서로 연락하며 왔다. 우리는 당장에 사부님을 찾아뵙고픈 열망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해외여행단의 국내 공연관람 일정을 위해 가이더 겸 책임자로 현장에 나가 있었지만, 내게 연락을 받고는 도저히 일을 하지 못하겠다며, 다른 사람에게 일임해 버리고 당장에 나라도 만나고자 하였다. 사태가 사태이니 만큼 비록 찾아가 뵙든 못 뵙든, 하여간 일단 우리끼리라도 우선 만나야 하겠다는 것이다. 사부님의 상태가 어떠한 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차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으니 우선 우리끼리라도 서로 보아야 하겠던 것이었다. 각자 원거리에 떨어져 일정을 갖고 있다가 만나는 것이기에 우린 전철을 이용했는데, 둘 다 넋이 빠져 나간 모양으로 자꾸만 정류장을 놓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둘의 합류 이후 이동을 위해 환승을 해야 했는데, 자꾸만 지나치는 것이었다. 환승하려다 놓치고 다시 거꾸로 환승하러 가다가 또 놓치고 하는 등, 타고 온 길을 몇 번이고 놓치는 바람에 되돌아가 환승 방향을 다시 잡고는 하여야 했다. 나는 그렇다고 쳐도 그녀는 절대 그렇게 함부로 정신 줄을 놓을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녀나 나나 납득할 수 없는 너무도 놀라운 사태에 직면하고서는 도저히 아무런 경황이 없이 안절부절 횡설수설만을 일삼다가 정류장을 계속 놓치고 마는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어느 덧 우리는 스승님께서 입원해 계신 병원까지 당도해 있었다.

 

 

역에서 가까운 거리 임에도 걷기도 힘에 붙여 택시를 잡아탔는데, 막상 병원 앞에 당도하고 나니 마음이 떨려서 병실로 곧바로 들어가 볼 수조차 없었다. 우리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손을 씻고 옷의 먼지를 털며 세면대 거울 앞에 단정한 모습으로 섰다. 마치 검색대에 서서 검열을 받듯 비장한 자세로 마음과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러면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스승님이나 가족들 앞에서 절대 흥분하거나 울지 않기를 철통같이 다짐하였다. 그렇게 철저히 마음을 다잡고 뚜벅뚜벅 한발 한발 병실로 향했다.

병원의 암 병동 4층 승강기에서 내리며 찬찬히 병실을 찾아나가는 데, 호실 문 앞에 이내 구본* 이라는 스승님의 이름표가 보였다. 순간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으며 긴장감이 밀려왔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복도를 걸으며 호실 확인을 위해 천천히 살피던 우리는 순간 멈칫하여 서로를 잡아끌며 숨을 죽이고 얼굴을 마주보았다. 아찔하기도 하고 가슴이 벌렁거리는 것을 억지로 태연한 척하며 서로가 서로의 눈으로 차분하자고 다시 한 번 다짐을 하면서도 "어떻게 하지?" 하는 뜻으로 서로 상대를 향해 묻고 있었다. 노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스승님이나 가족에게 방해가 되면 어쩌나 하는 등의 생각들로 꽉 차 있었지만, 이내 숨소리조차 죽이고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단호한 어조로 입을 꼭 다물며 침을 삼키는 것이 용기를 내어보자는 뜻이기도 했다.

삐죽이 열린 문틈 사이로 얼핏 병실의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큰 영애 내외와 스승님의 생질녀가 보였으나 정작 스승님의 모습은 잘 뵈지 않았다. 환자의 침대가 입구와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편으로 배치되어 있어 환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일부러 창밖을 향해 자리를 배치한 듯싶다. 아마도 최대한 환자의 안정을 위한 조치였으리라.

 

 

살짝 노크를 하자 큰 영애께서 병실 밖으로 나왔다. 우리는 조심스레 연구원 아무개임을 밝히고 다소 주의 깊은 어조로 그저 잠깐 들렸을 뿐인 것처럼 말을 하며, 괴의치 마시라고 하면서도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사부님께서는?..." 하고 짧은 안부를 여쭈었다. 그러자 큰 영애께선 잠시 기다려 보시라고 하더니 이내 들어오라는 사인을 주었다. 내심 의외의 기회를 얻음인지라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얼결에 냉큼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사부님께서 누워계셨고 링거액 때문인지 얼굴이 다소 부어 있었지만, 외견상으로 잠깐 봐서는 병세를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한편으로 건강한 모습을 하고 계신 것처럼 보였다. 마치 종합검진을 받을 요량으로 누워계신 모습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게 느껴졌고, 병원이니까 의례 누워계시는 탓에 환자처럼 보이는 것 같은 착각마저 일었다.

나도 병원이다 노인시설 종사자로 일을 해온 사람이지만 아무런 정보도 없이 느닷없는 기별을 듣고, 더군다나 믿기지도 않고 당시로는 전혀 믿을 수도 없는 상태로 누워계신 사부님을 뵙게 되니, 그 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였다. 매우 급성의 최악의 사태라 그랬던지, 오래 투병 생활을 겪는 사람들과는 달리 잘 감지가 되지 않았다. 누워 계셨지만 체력도 그다지 쇠락해 보이지 않았고, 급성이라고 하더라도 아직은 얼마가 될지 모를 시간적 여유가 한참 많이 남아 있을 것으로 보이는 상태로 비춰졌다. 실제로는 이미 전혀 음식물을 섭취하지 못하고 계셨음에도, 평상시 워낙에 건강을 잘 챙겨 오셨던 분이라 그런지 정말 믿기지 않을 만큼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들어가 사부님을 향해 조심스레 곁으로 다가가자 사부님께서는 평소와 같이 반가운 기색을 하시며 -그러나 이제와 사후에나 찬찬히 생각해보니 그 육중하신 몸을 전혀 움직이지는 못하신 채로- 미세하게 낮은 목소리로 반기셨다. "그래, 너희들 왔구나?" 하시는 표정으로 우리들 각자의 눈을 맞추시면서 분명하고도 또렷한 어조로 이름을 부르며 반겨주셨다. 그렇게 정확하게 맞이해 주셨기에 순간 병세가 위중하시다는 것에 대하여 더욱 마음을 놓아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사부님께서는 말씀을 많이 하지 못하셨다. 짧은 눈인사와 이름을 침착히 불러주시는 정도의, 간결한 단어 몇 마디를 힘겹게 하시고는 하였을 뿐이다. 그래도 상태가 안 좋을 때는 누구라도 잠시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생각되었다. 솔직히 그 일촉즉발의 위급한 사태를 정확하게 인지하며 직시하지 못했다. 위독한 상태라는 것을 전혀 믿고 싶지 않았던지, 자꾸만 더 나은 의료기술에 대해 빨리 손을 써야만 한다고 조급증이 일었다. 왜? 무슨 이유로 이렇게 위중한 상태로 누워계시게 되었는지 속절없어 애달아하며, 황망한 상태를 지속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라도 위기를 넘길 수 있도록 최선의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만 생각될 뿐이었다. 기적이란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일만도 아닌 것처럼, 우리 모두가 의기투합하여 힘을 모으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호전 될 수 있을 거라고만 자못 흥분하고 있었다.

 

 

사부님께서는 오래 기다리며 그리워하신 모양으로, 혹은 뜻하신바 상태의 몸과 마음으로 충분히 반기지 못하심이 애달프신 듯, 자꾸 당신의 손을 침대로부터 들어 올려 우리들의 손을 잡아주시려고 애쓰셨다. 당신 육신의 팔 하나조차 들어 올릴 기력이 없이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상태로 허우적거리면서........

입실하기 전 세면대에서 손을 깨끗이 씻고 손소독제까지 철저히 발랐지만, 또한 사전에 변.경.연. 동문회장으로부터 약간의 주의를 들은바 있어 우리는 감히 사부님과 악수를 나눌 엄두도 못 하고 있었지만, 사부님께서는 당신께서 더 먼저 우리를 반기시던 평소의 자태 그대로 행하셨다. 몹시 기력이 달렸음에도 그래서 손조차 꽉 쥐어 잡을 수 없었음에도, 미약하게나마 손을 잡아주시려고 온 힘을 다하여 자꾸만 팔을 들썩이고 계셨다. 환자에게 나쁜 영향이라도 미치게 하거나 우리로부터의 오염에 노출되어 감염 등이 발생하게 될까 매우 염려스러웠다. 하지만 우리의 염려와는 달리 사부님께서는 사투 속에서도 평소와 같이 우리들에게 여전히 자애롭게 행하고 계셨다. 그 온화하신 성품이 당신 병상에서조차 온몸에 흘러넘쳐 고스란히 느껴지기에 우리는 저마다 사부님의 한 손을 자신들의 두 손으로 부여잡으며, 마음을 다해 간곡한 심정을 무언으로 전하였다. "제발! 소생해 주시옵기를! ...", "부디 병환으로부터 승리하여, 쾌차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을 담아 기도하였다. 너무도 긴장되고 조심스러워, 그리고 애써 담담한 척 하느라 정작 속엣 말은 전혀 하지도 못했다. 하기야 그 상황에 다른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만.

 

그저 평소의 즐거울 때 나누던 씩씩한 톤으로 누워계신 사부님을 향해 "사부님, 우리 꽃구경 가야죠?!!" 했다. 사부님께서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실없어 보이기도 할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함인지 아시는 듯했다. 언제의 추억을 두고 드리는 말씀인지를 인지하시는 모습으로 눈을 잠시 감았다 뜨시고-(그런데 바싹 말라 있는 입가나 콧김과 달리 눈이 촉촉했다... )-는 기꺼이 응답해 주셨다. "그래, 가자! 가야지!!" 하고는 낮음 음성이 바싹 말라 말도 잘 안 나올 것 같은 마른 입술 사이로 낮게 새어나왔다. 애써 힘주어 말씀하셨고, 어떻게든 기운을 내보이려고, 의식을 잃지 않으려는 모습으로 자꾸만 눈에 힘을 주시었다. 온몸의 기운을 집중해 모으시는 모습이 역력한 것이다. 너무도 안타까워 곁에 있던 벗은 얼결에 사부님을 와락 안아드리며 하마터면 울음을 터트릴 뻔 했으나, 사부님 가슴 가까이에서 살짝 비껴 살포시 얼굴을 묻었기에 다행히 눈물방울을 보이지 않고 감출 수 있었다. 벗은 이내 침착히 "사부님, 사랑해요!" 라고 귓전에 속삭이며 따스하고 포근하게 위안을 드렸다. 나는 겨우 특유의 너스레나 떨어댔지만 말이다. 내심 사부님을 잠시라도 웃게 만들어 유쾌한 기분이 되도록 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들이 당신의 손을 꼬옥 잡아드리자 사부님께서는 만족하시는 어투로 "그래... " 하고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여 보이시더니 또다시 살며시 눈을 감으셨다.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어쩌면 그 순간 "이것들아, 왜 이제야 온 것이냐?" 하고 계셨을 지도 모르겠다.)- 가슴이 먹먹해 지시는 지 눈을 감고 천천히 쉼 호흡을 하시며 마음을 가라앉히시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사부님!~ 우리 꼭 가요. 이길 수 있으시죠? 네???!!! 이기셔야 해요? 꼭! 꼭!! 이길 수 있으세요!!! 하고 무쇠라도 뚫어버릴 듯한 모습으로 눈을 맞추며 다짐을 드렸다. 사부님께서는 감았던 눈을 다시 뜨시며, "가자!, 가야지!!" 하시더니 이내 너무 걱정 말라는 듯이, 오히려 우리를 안심시키고자 하시며 기운을 내고 싶으신 모습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어보이시며, "아무개야, 기압 좀 넣어보라고 주문을 하시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최대한 명랑하고 밝은 톤과 어조로, 사부님께서 시시하게 이깟 암 덩이 따위에 쫄지 말라는 듯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면서, 사부님의 가슴 가까이에 대고 '빠샤!!!' 를 외쳤다. 영화에서 보면 십자가로 성호를 단단히 그으면 악마들이 근접을 못하고 물러갈 때처럼, 모든 암 덩이를 초전박살 내어 벌떡 일어나시라는 뜻의 염원을 담아 단호한 몸동작을 취하며 기운차게. 

 

 

사부님께서는 억지로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싶은 듯이, 자꾸만 가라앉으려고만 하는 눈꺼풀을 단박에 밀어 올려붙이고 싶으신 모양으로 숨을 죽이며 가다듬으셨다. 그러더니 온 정심을 다해 눈에 힘을 주시는지 얄팍한 눈꺼풀 주위 근육에 빗살무니처럼 힘줄이 그어지는가 싶더니, 번쩍하고 형광등에 불이 들어올 때처럼 갑자기 두 눈을 크고 둥그랗게 뜨시었다. 그러자 큰 눈의 위 꺼풀에 쌍꺼풀이 굵고 진하게 그어졌다. 그런데 크고 둥그런 눈은 촉촉이 눈물이 어린 듯, 눈동자를 얼비치었다. 그러한 사부님의 눈을 바라보자 순간, 눈은 마치 망망대해 푸른 바다 같고 검은 눈동자는 바닷가 한가운데 떠 있는 배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아직은 맑고 투명해 보였다. 부드러우면서도 촉촉한 사부님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행여 사부님께서 편한 마음에 눈물이라도 떨어뜨릴 세라 우리들의 두 눈은 바짝 긴장이 되었다. 비록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보시며 안타까우실 지라도, 우리는 절대로 사부님께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얼마나 다짐했던지, 우리들 눈과 가슴은 더욱 긴장되었다. 하시라도 약하게 마음 잡수시지 않도록 하자니 우리 몸이 더욱 굳어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서로의 아주 짧은 무언의 대화가 오가는 중에도 사부님께서는 이내 컥 컥 거리시며, 마르고 밭은기침 소리를 연거푸 내시면서 답답한 모습을 하시었다. 입술도 바싹 마르고 콧김도 무척 건조해 보였으나 커다란 사슴같이 큰 눈망울만은 긴 눈썹과 함께 여전히 촉촉하였다.......

사부님 곁에서 밀착하여 간호며 치료를 돕고 있던 큰 영애는 마른 가지처럼 메말라 있는 사부님 입술을 수시로 촉촉이 적셔드리며 촉각을 곤두세워 주치의 역활과 간호에 여념이 없었다.

 

 

사부님께서는 힘들어보였다. 입이 바싹 마른 상태로 기침조차 희미하였다. 게다가 마른기침을 쿡쿡 토하시며 숨소리조차 메말라있었다. 그러자 큰 영애께서 "아빠, 힘드시냐?"고 물었다. 사부님께서 그렇다고 가녀리게 숨을 헐떡이는 반응과 함께 옅은 호흡으로나 겨우 반응을 나타내시었다. 그러자 큰 영애는 급히 사부님과의 대화를 중지시키며 편한 자세로 휴식을 취해드리려 재빠르게 행동을 취하였다. 사부님 가까이에 귀를 가져다대어 숨조차 죽인 모습으로 귀를 기울이며 바이탈 사인에 주시하면서 입술을 촉촉하게 적셔드렸다. 우리는 얼른 자리를 비켜드려야 함에도, 우리도 모르게 다급한 어조로 "사부님!~ 힘내셔요!, 이길 수 있어요!!, 절대 기운 빠지시면 안돼요!!!, 하실 수 있죠? 하실 수 있어요! 저희들 기다릴게요. 저희들 가지 않고 밖에서 있을 테니 염려마시고 기운 내셔요.~" 하며 못내 아쉬움을 뒤로하고 주춤주춤 물러나왔다. 그렇게 사부님과의 짧은 만남을 하고서 병실 밖으로 나오니 도무지 더는 발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마침 주말이기도 하거니와 몇 날 며칠을 밤샘을 하라고 해도 얼마든지 거뜬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가족들의 철통같은 간호 또한 대단하였기에 감히 말씀을 건네 볼 여지조차 전혀 없었다. 곧이어 그만 잘 돌아가라는 눈인사를 큰 영애로부터 받았으나, 발길이 돌려지지 않아 문밖에서 더욱 안절부절 한 상태로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가족들을 힘들게 하는 일인 것 같아 가는 척 하고 우선 아래층으로 몸을 숨겼다. 1층에 휴게실 같이 꾸며진 곳이 있어 게 앉아 대기하는 사람처럼 멍하니 있었다. 저녁 시간대여서 그런지 우리 외에는 사람들이 없어 조용하고 한적했다.

 

한참을 멍하니 몇 시간을 그렇게 맥없이 앉아 있었다. "어떻하지?", ... "어떻하냐?" 고만 하면서. 우리는 자정이 다 되도록 자리를 뜨지 못했다. 병원 도착 후 대여섯 시간 가량이 흘렀지만 배고픈 줄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아무런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벙 떠있는 상태로 멍하니 그렇게 몇 시간을 흘려보내고만 있었다. 간간히 슬며시 병실 앞을 스쳐지나가 보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가족들을 붙잡고 다시 물어볼 엄두도, 무슨 위로의 말 한마디라도 건넬 염치도 없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였다.

병실 안팎은 침묵과 함께 긴장감만이 흘렀고 따라서 병실만 바라보며, 그저 오매불망 사부님께서 모쪼록 소생해 주시만을 간절히 바랄 뿐으로 서성임을 그칠 수 없었다.

 

 

그러다 간호사 한 분과 눈이 마주쳤다. 달려가 그녀를 붙잡고 병세와 위중의 대강을 물었다. 매우 친절했지만 그분도 우리를 안정시키고자 하는 태도로, "금세 어떻게 되시지는 않을 것이니 귀가하였다가 차도가 있거든 다시 오는 게 좋겠다." 고만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다소 안심을 시키려는 취지에서 그렇게 말하였던 듯싶다. 그래도 발 길이 떨어지지 않아 다시 올라가 서성이자 다른 간호사 한 분이 이번엔 다시 보호자를 불러주셨다. 사모님께서 나오셨지만, 왜 여태 안 가고 있는 거냐고 하시면서 단정하고 단호하신 어조로 난감해 하셨다. 그래도 어린 아이처럼 매달리며 발길을 돌리지 못하자, 기도밖에는 달리 답이 없노라 하시면서 기도하라고만 말씀하시며 이내 우리의 등을 떠미셨다.

암 덩이와 싸우는 환자도 환자지만 곁에서 간호하시는 사모님을 뵈니 깔끔하신 성품에 혼자서 안으로만 삭이고 계신 것이 느껴져 더욱 안쓰럽고도 민망하여 뵈올 낯이 없고 송구할 따름이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이 상황에 얼마나 놀라시고 얼마나 애가 타셨을 것인가! 하루 한 시각, 일 분 일 초가 뼈를 깎는 고통이었을 것이지 않은가. 왜 무엇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는지 상심이 크셨을 것이며, 얼마나 기가 찰 노릇이었겠나. 아니 아무런 경황도 없이 정신을 차릴 레야 차릴 수가 없으셨을 것이 빤하다. 이러한 상황에 뒤늦게 나타나 도대체 우리가 무슨 위로나 제대로 해 드릴 수 있는 것인지 너무나도 죄송하고 부끄러웠다. 아무런 말씀도 드릴 수 없었고 난감할 뿐이었다.

기실은 남은 최선의 방법이 무엇이겠느냐고 여쭙고 싶었지만, 우리가 어떻게 해드리는 것이 가장 좋을까 허심탄회하게 말씀이라도 나누고 싶기도 했지만, 감히 꺼낼 엄두조차 내지 못하였다. 글을 쓰는 이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어쩌면 간략하게나마 동문회장에게 전하신 그대로가 이미 전부였던 것을! 정작 우리는 알아듣지 못한 채로 들으려고 하지 않는 악동들처럼 답답하게 굴었던 것이다. 그래도 무조건하고 기적이 일어날 수 있고,   '아무도 알 수 없는 일' 이라고만 생각하며,  고작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렇게 허망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도무지 납득이 안 되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고, 믿기지도 않고, 믿을 수도 없으며, 믿어지지 않아 암담하기만 한 현실이 너무도 야속하고 혹독할 뿐이었다.

 

 

 

스승님의 사랑꽃 변.경.연.의 제자들

 

 

다음 날, 가족의 배려와 사부님 평소의 의지대로 가장 아껴 오신 우리 제자들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정식으로 주어졌다. 우리는 메일을 접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무턱대고 찾아 뵌 것이지만, 동문회장인 대표가 전날에 동시에 메일로 안내 공지를 하여 시간적인 대비를 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메일을 통해 급작스럽게 연구원들에게 공지가 나가자 순식간에 많은 연구원과 꿈벗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한 채, 앞 다퉈 병원으로 달려왔다. 사부님의 상태는 그 즈음 급격하게 너무나 위중한 상태로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으므로 일분일초를 예측하기 어려운 상태였던 것이다. 그 때가 사부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 한 주간 가량 중 가장 최상의 컨디션이었던 셈이다. 마지막 뵈올 절호의 기회였던 것으로, 돌이켜보면 사부님과 가족들께서는 그 천금 같은 시간을 우리 연구원들에게 기꺼이 할애해 주셨던 것이다. 당신 생전에 가장 아끼던 사람들에게 가족과 같은 심사로 시간을 허락해 주신 것이다....... . 환자도 환자지만 가족들께서 얼마나 애가 타셨을까?

병상의 스승님께서는 촌각을 다투어 사투를 벌이는 가운데,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인해, 시간을 정해 잠간 동안의 위문을 허락해 주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더라도 사경을 헤매는 환자를 보면서 아무리 환자의 바람이고 신념이며 진정성임을 안다고 해도 용단할 수 있었겠는가? 가족과 더불어 사부님의 일상이 너무나 잘 녹아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토록 평소 수신제가 해 오신 모습을 역력히 뵈올 수 있었다.

 

 

위문을 위해 달려온 제자들이 사부님께서 거하시는 병원의 병실 앞 복도를 가득 메우며 면회대기를 하고 기다렸다. 사부님의 병세가 위독함에 기력이 몹시 쇠하신 상태이나 찾아든 사람들은 너무도 많았다. 의료진과 가족들은 무척 걱정을 했을 터다. 그래서 우리는 사부님께서 피로하시면 안 되기에 그저 사부님께 용기와 염원을 담아 한 사람씩 빠르게 돌고 나오자고 의견을 모았다. 우리로 하여금 사부님과의 시간을 지체할 수 없으니, 재빠르게 우리의 염원을 담은 좋은 기운만 전하고 나오기로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부님께서는 제자들을 보시자 너무도 반가워하셨다. 사부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더 먼저 헤아리고 계셨다. 그러한 사투 속에서도 더듬더듬... 띠엄띠엄 겨우 가늘게 터지는 목소리에도 당신 온 기운을 담아,  평소처럼 어찌나 총명하고 의연하시던지....... .

마치 우리들의 행동에 눈치라도 채신 듯 흐름을 빨리 하려는 우리들을 향해 평소의 외유내강의 모습으로 당당히 저지하시며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당신의 뜻은 그냥 그렇게 보내려는 것이 아니라는 듯 안타까우신 모양으로, 빠른 흐름으로 병실을 돌고 나가며 울먹이는 제자들을 향해 오히려 손을 내밀며 위로하셨다. 한 사람 한사람과 눈을 맞추며 대화를 나누시고, 함께 있을 때 즐거웠던 장면들을 기억에서 끄집어내시며, 최대한 유쾌한 모습으로 맞으셨다. 어리둥절한 채로 머뭇거리다 아무 말씀도 못 드리고 꾸벅 인사만 하고 뛰쳐나가는 제자들을 향해, 오히려 이름을 불러 세우시고는, 먼저 여유 있는 모습으로 근황을 물으시면서 말씀을 나눠주셨다.

"선생님, 맛있는 술 담가 놓겠습니다. 어서 쾌차하십시오." 하며 애써 담담히 말하는 제자에게는 맞장구치시며 "그래, 기다리고 있어라." 하시며 한껏 여유를 보여주시기도 했다.

 

 

측근의 가족들조차 위태로울 것을 빤히 아시나, 너무도 완강하신 사부님의 뜻을 누구도 저지할 수 없을 정도로 단호하고 확실하게 의사표현을 하시는 것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이 금세 소생이라도 하실 분처럼. 추호의 흔들림도 없는 모습으로 최후의 일각까지 있는 힘을 다해 평소대로 행동하시며, 건강할 때 가지셨던 뜻하신 바의 소신을 다 지키고자 하셨다. 그리하시고는 이내 밝고 환하게 최상의 기분으로 고조되어 우리들과의 어울림을 한껏 즐기고자 하셨다. 생의 마지막 한 때를 제자들과 함께 기꺼운 어울림으로 장식하고자 하셨던가 보다.

책을 쓰고 있는 이에게는 책의 진척을, 노래와 춤으로 판을 이끌었던 이에게는 노래와 춤을 주문하시었다. 오히려 사경을 헤매고 계신 당신께서 더 먼저 직접적인 질문과 안부를 캐물으시고 기억해 내시면서 언제나처럼 대해 주셨다. 생의 최후가 될지도 모를 병문안이라고 하는 우울한 만남 자체를 즐거운 놀이처럼 이끌고자 하셨다. 빡센 우리 연구소의 연구원 훈련과정만큼이나 사부님께서는 강인하셨다. 연구원 시절 열정적인 흥을 지닌 사람들의 행동과 모습 하나하나를 예의 그 마지막 남아 있는 젖 먹던 힘까지 다 발휘하여 기억에 떠올리며 기껍고도 유쾌하게 추억하셨다. 굳이 대화를 하지 않더라도 스승과 제자 사이의 '절연되지 않는 영감'으로, 또한 당신 온몸의 기를 총동원하여 찾아온 모든 이들을 하나하나 반기고 손잡아 주시면서 근황을 비롯해 두루 안부를 나누고자 하시었다. 평소 늘 해오시던 그 모습 그대로!

 

어찌하면 그러하실 수 있는지 정말 모르겠다. 우리들 앞에서 엄살 한 번 피우지 않으셨다.

"편찮으신 것 어떠셔요?" 하면 "많이 아프다. 이놈아!" 하시며 농담처럼 말씀하시어 정말로 괜찮은 줄로만 알았던 우리들의 어리석음이 너무도 송구하여 말을 잇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해, 하나하나 기억해 주시고 손 잡아주시며 이름 불러주시고, 마치 꽃에게 입 맞추듯 하시었다. 사부님께서는 그 날 제자들과의 기분 좋은 만남을 표현하시기를 대단히 벅찬 모습으로 "나, 지금이 너무 좋구나!", "참 아름답구나!!" 감탄해 주시었다.

 

워낙에 책임감이 강하신 분이라 벌여 놓으신 여러 일들을 멈추게 된 것에 대하여 아쉬움이 없지 않을 것이지만, 그것조차도 이내 편안한 마음으로 내려놓으셨다. 그동안 길러둔 제자들의 몫으로 자연스레 넘겨주시었을 터다. 심사숙고 하시어 발탁하시고 아무러한 염려도 하지 않고 믿음 주시던 그 모습 그대로, 이승을 떠나실 때에도 호쾌히 그리 떠나가셨다. 얼마나 하실 말씀과 당부가 많으셨을 테지만, 말씀을 아끼고 계셨다가 굳이 하지 않으셨다. 기회가 없어서도 미련을 두고 있다가 놓쳐서도 결코 아님을 우리는 안다.

평소 말씀을 아끼셨던바 그대로 당신께서 최후의 일각까지 최선을 다하신 것에 만족하고, 또 찾아온 우리들을 보시며 기꺼이 믿어 의심치 않으셨으리라 는 것을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모른다면 변.경.연.이 아니요, 스승님께 가르침을 받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날 사부님께서는 사력을 다해 활화산처럼 타올라 우리들 하나하나를 만나고 떠나셨다.

부모가 마지막 황천길에서 기꺼이 시간을 아끼고 기다려 자식 만나주고 가듯, 온 마음을 다해 우리와의 시간을 기꺼이 즐기셨다. 많은 이들의 각자 제 나름을 하나하나 기억해 주시고, 함께한 즐거웠던 시간들을 추억하셨다. 일일이 손잡아 주시고 이름 불러 주시며, 살아생전의 마지막 최선의 힘과 기를 우리에게 다 쏟아 퍼부어주시고 가셨다. 돌아가시기 직전이었다. 마지막 생명의 불씨가 한 주도 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들과의 어울림으로 완전히 소진해 쓰셨다. 비록 단 하루의 단지 몇 시간 동안 밖에는 못 열어주셨지만, 마지막 사투 속에서조차 우리에 대한 애정을 한껏 들어내 보여주셨고, 앞으로도 영원히 절연되지 않는 영감으로 함께 해 주실 것을 알게 하셨다.

 

 

제자들을 향해 기꺼운 만남을 허락하여 가지신 그날이 사부님 생의 마지막 남은 한 주간 중 최고로 절정의 날이었음을 안다. 마지막 일 주일을 머무시는 동안 중 최대의 절정에 고조되어 활력과 생기를 불러 모으시며 최고조의 기운과 기분을 자랑하며 우리들과의 시간을 갖으셨다. 당신이 손수 만드신 연구소를 통해 만난 이들과의 만남이요, 생의 마지막 길목에서의 가장 의미 있고 귀중하며 아름답고 따뜻한 만남의 시간이었으리라. 죽음과 정면으로 맞서신 가운데, 사력을 다해 생전에 공들였던 사람들을 향해 마지막 투혼을 백분 발휘하셨다. 활화산처럼 찬란한 불꽃으로 활활 타올라 아름답게 꽃피워주시고 홀연히 산화해 가셨다.

 

 

너무도 다정하고 세심하게도 어느 이에게는 쓰고 있는 책이 얼마나 진척되고 있는가를 물으셨고, 어떤 이에게는 여전한 덕담을 아끼지 않으셨다. 어떤 제자에게는 춤을 추라 주문하시면서 당신과 함께하며 즐거웠던 날들의 기쁘고도 행복했던 순간들을 마음껏 추억하셨다. 우리도 기꺼이 평소의 사부님을 대하듯, 어느 봄날의 우리들의 축제처럼 그렇게 사부님을 뵈었다. 아무런 경황없이 연락을 받고 달려온 제자 가운데는 미쳐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을 수 없는 이도 더러 있었지만, 우리는 그러한 소소한 장면에 개의치 않았다. 절제는 하지만 자연스러움과 내면의 진정성을 추구하는 변.경.연.식의 공부가 체득되어 있기 때문이다. 너무 반가우면 눈물이 나듯 우리는 사부님이 위독하신 가운데에서도 마치 평소 때의 기쁘고 즐거운 한때처럼 그런 설렘을 주고받으며 감정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 흘렀다. 언제까지라도 평상시 스승께서 주신 가르침 그대로 의연하게 서로가 서로를 축복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평화로운 모습으로 봄날의 기쁘고 즐거운 한 때를 나누었다. 그것이 서로를 위해 가장 최선의 보답인 것과도 같이 말이다. 그 날의 시간은 슬프기만 한 병문안이 아니다. 우린 여니 날의 한 모습과도 같이, 단지 스승과 제자가 만났기에 서로 반갑고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한껏 뽐내는 시간이었다. 다만 스승께서 쾌차하시기를 염원하는 마음이 추가되었을 뿐으로.

그리고 진정 제발! 기적을 체험할 수 있기를 충심으로 소원하고 열망하면서, 걱정보다는 서로가 서로에게 닿는 마음의 진정성 나누기에 바쁜 하루였다. 웃으면 행복해 진다는 말과 같이 눈물보다는 미소를 띠우려고 애쓰면서, 모두가 저마다의 아름다운 마음을 포개어 한마음의 탑을 높이 쌓은 날이었다. 처음 만나 가르침 받던 그 때 그 순간처럼.

 

 

그 날 돌아와 먼 타국에서 놀라며 스승님의 안부를 묻는 벗에게 나는 짤막하게 메일을 보냈다. "시시각각이 위중하신 가운데 사력을 다해 고군분투하고 계신 것 같다"고. 하시도 마음 놓을 수 없는 상태라고. 기적을 맞이하기에조차 너무 늦은 것 같은데다가 저토록 제자들을 사랑으로 반겨주시다, 만약 할 일 다 하신 모양으로 쓰러지실까 두렵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 결과적으로 정말로 그러하셨던 것이었다....... .

연구원들과 함께 메일을 나눈 탓에, "누나 말대로, 누나 말처럼 되었다." 고 울분을 금치 못하던 아우의 넋두리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어찌 그리 사력을 다해 우리를 그토록 좋아하시고 사랑하시며 어울려 주시던지....... 마지막 그 길에서조차 말이다.......

이미 수개월 간 혼자서 투병을 다 하셨고 오직 가족에게만 고생의 일부를 허락하셨다. 그토록 아프셨으면서도 독자들에게 마음을 나누는 편지를 보내지 못하는 것을 더 염려하셨다. 행여 제자 가운데 누가 쓸데없이 걱정하느라 제 할 일에 열중하지 못할 세라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로 괜찮으신 줄 착각하고 지냈다. 누구도 스승님께 닥친 아픔과 불행을 대신 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아무도 아무것도 도와드리지 못했다.......

마치 스승님 혼자의 일 인양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여니 사람들과 대화 나누실 때와 똑같이 우리를 대하신 정갈한 성품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가벼운 병세와 같이 그저 괜찮으신 줄 알았다. 별 일 아니겠거니 간과하며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러하면서도 연구원 수업을 꼬박 꼬박 다 강행하시기에 견딜 만 하신 걸로 스승님을 방치했다. 그저 좀 안 좋으실 수 있는 일이겠거니 미련을 떨었던 것이다.......

언젠가 맹장을 떼어내신 때에도 아직 실밥이 아물기도 전에, 미처 예상치 못하여 수술 전 제자들과 설정해 둔 일정에 따라 하루 온종일의 수업을 서슴없이 강행하며 임하셨기에, 그때와도 같이 그렇게 하시려나보다 당연지사로나 여겼던 것이다. 사부님께서 앓으시는 병환이 큰 병이 아니라고만 생각하고 멋대로 치부해 버렸다. 매일 꾸준히 너무도 성실하게 일상을 운영하며 실천에 옮기고 계시기에, 감히 운명의 장난이나 신의 질투 따위는 비켜 갈 수 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나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 폐암 말기에 이르러 전신에 퍼질 정도로 최후까지 깜박 속았는지 모르겠지만, 사부님께서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우리들의 스승임을 자처하셨고, 기꺼워하셨다. 통증이 찾아와도 가장 소중한 글쓰기를 멈추지 않고 계시다가 노트북을 열어둔 채로, 현장에서 쓰러져 끝내 그 길로 돌아가시게 되었다.

 

 

사부님께서는 일상을 포트폴리오 하여 계획하신 대로 해마다 연구원들과나 가족과의 여행을 꼭 지키셨다. 한해 두 번의 여행을 즐기셨고, 글을 쓰고 강연을 하시다가 통증으로 더 이상 글과 강연을 이어갈 수 없게 되자 미련 없이 생을 마감하셨다.

세상에 어느 누가 그러한 상황에서 그렇게도 초연하고 태연자약한 모습으로 제자들과 어울려 기꺼이 즐길 수 있을 것인가? 혹여 통증이 없거나 못 느껴서 였을 것이라고 누군가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스승님은 절대 그래서 그렇게 초연하신 모습으로 계신 것이 아니었다. 의료진의 진료에 최선을 다해 임하셨을 테지만 의료진에 매달리며 생을 연명하려고 집착하기보다, 최선의 결과에 순응하시며 어떻게 당신답게 살(마무리 할) 것인가를 미리 계획하신 대로 기꺼이 행하셨다. 집착보다 용기로써 당신께 마지막 남아 있는 소중한 시간들을 보다 보람 있고 유용하게 쓰고자 하시면서 평소의 소신대로 주관하셨다. 스승님께서는 최후의 일각까지도 당신 의지대로 살고자 애쓰셨고, 끝까지 우리 앞에 당당한 스승의 자태 그대로 우뚝 서시었다. 한때는 평범한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았으나 인간 내면의 위대함과 창조성을 믿고 발전시키며 더 나은 개인으로 성장과 진화를 거듭하셨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의 존엄성을 충분히 발휘하는 삶을 사셨다. 우리들 연구원과 더불어 많은 이들이 공감하듯 멋진 인생의 참 삶을 진정으로 살다가 마음껏 누리고 가셨다. 생의 남은 몇 날 안 되는 최후의 일각까지도 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모습으로 한껏 살아내기를 주저하지 않으셨고, 인간 정신의 위대함과 웅혼한 기상을 한껏 들어내 보여주셨다.

 

어찌 그리 담담히 우리를 맞으셨을까 신기하고도 거룩하기까지 하다.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는 행할 수 없는, 구도자와 같은 모습이었다. 오직 생전의 지속적이고도 균형감 있는 삶의 태도로 말미암은 숭고한 정신력의 소산이었다. 스승님께서는 가히 아름다운 신의 경지의 자태를 드러내셨다. 또한 생전의 당신이 기획한 꿈의 일상대로 악전고투의 병마 속에서도 후련하고도 의연하게 당당히 행함으로써 그야말로 자타가 공인할 수밖에 없는 생의 가장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시었다.

우리도 평소의 가르침대로 짧은 생존의 기간이나마 사부님의 평소 뜻에 맞춰 최대한 사부님을 모시려 애썼지만....... 그러나 이 말은 정말이지 얼마나 자위에 지나지 않음이런가?

사부님께서는 더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생을 깔끔하게 정리하셨다. 아주 고결하고 우아한 기품 그대로 죽음에 직면해서까지 당당한 자세 그대로 일관하셨다. 이 시대 살아 있는 성자와도 같이. 거룩하고 성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연구원들과의 만남 직후 스승님께서는 잠깐 고무되어 상기된 모습이더니 이내 급격한 사태로 돌변하었다. 면회가 전면 취소되고 그 날 이후로는 다시 제대로 만나 뵐 수 없었다. 다음날로 면회일정을 잡은 이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해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다시 좋아지시려니 생각하기도 했다. 아무리 위중한 병환이더라도 그렇게 빨리 불운한 순간이 닥쳐오리라고는 정말이지 아무도 그 누구도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곧이어 어떤 누구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일촉즉발의 숨 막히는 긴박함이 펼쳐졌다. 물론 의료진이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한 이후에 이 모든 일의 일정이 순식간에 잡혀 돌아간 것이긴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고 인간이기 때문에 언제나 예외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며, 우리는 기적이 일어나 주기만을 바랐다. 어떻게 해서든 신의 질투를 잠재워 하루라도 우리 품에 사부님을 더 두고 싶은 일념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도 생각할 수도 없었다.

 

 

숨 막히는 긴장 속에 어느덧 하루하루가 지나갔고, 차도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일주일이 되던 날에 부고가 날아들었다.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말기 암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나 빨리 모든 상황이 종료되는 것으로, 하루아침에 전복되어버릴 수 있는가 말이다. 산자와 죽은 자를 갈라놓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별로 실감나지 않았다.

 

 

하필이면 나는 그때 외부에 있었다. 그 주간 다시 몇 번이나 스승님을 찾아뵈려 했으나 전해오는 소식마다 암울했다. 매일 병실을 찾아가는 이들조차 문밖에서 사부님 형체만을 얼핏 볼 수 있는 정도 외에 아무런 소식도 차도도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직장관계로 인하여 혹은 주거지 자체가 지방이어서 등의 연유로 인해 평소 스승님과 거리가 먼 나와 같은 사람은 이번 일을 겪으며 정말로 한이 많았으리라. 부산에 사는 꿈벗 하나는 자주 내게로 전화를 걸어와서는 스승님의 안부를 묻곤 하였다. 그러나 그와 같이 묻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이들이나 마음은 매 한가지였다. 모두가 스승님의 쾌차를 학수고대하는 사람들뿐이었다.

 

 

나는 시내 한복판에서 짐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산 물건들은 모두 친구에게 맡겨버리고 그 즉시로 부고가 뜬 병원으로 향했다. 그날따라 휴대폰 충전이 얼마 남지 않아 쓰지 않고 아껴둔 상태에서 우리 기수 하나가 연락을 주고받는 것이 카톡을 통해 목격된 때문이었다. 다들 "만나기로 했어?, 왜 그래? "하고 아무 일도 아닌 양 끼어들며 무심하게 물었으나, 그 연구원은 그저 "언니... . " 라고만 문자를 보내왔을 뿐 더는 아무런 말이 없었고, 상대도 짤막한 대답으로 "가고 있어." 라고만 하는 것이 카톡에 형성된 그룹 창을 통해 뜨는 것이었다. "저희끼리 만날 약속이라도 했나?" 하며 하마터면 무심히 지나칠 뻔 했다. 그러다 무의식중에 통화를 시도했다. 통화중이라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무심히 몇 번을 계속했다. "다들 왜 이렇게 불통인 거지?" 하며. 다시 재차 통화를 여러 번 시도한 끝에 연결되었는데, 상대는 말을 잇지 못하고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언니, 빨리 와." 소리만 하는 것이었다. 나는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몰라, "왜 그래? 어딘데? 왜 모이는 건데?", 우리 기수의 모임을 의식하며 "만나기로 했어?" 라고 반문하며 재촉하였다. 그러자 상대는 떨리는 목소리와 흐느끼는 어조로 "사부님이....... " 하고는 또 마는 것이다. 그러더니 "여기 성모병원이야." 라고 하는 것이었다. "왜? 병원을 옮기기라도 한 거야? 치료 중단하는 거야?" 하고 다급하게 물었다. 그러자 "장례식장이야.... ." 하는 것이 아닌가. "뭐?, 뭐라고?" 나는 시내의 대로 한복판에서 이내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소리를 질러댔다. "어떻게?", "어떻게?"를 하며 절로 발이 동동 굴러지면서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깜깜하고 주저앉아버리고 싶은 지경이었다. 곁에 있던 친구가 침착하라며, 짐도 있고 한데 집에 들려 짐이나 내려놓고, 정신을 좀 차리고서 가는 게 옳지 않겠느냐고 걱정하여 다독였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오직 빨리 장례식장으로 향해야만 하겠다는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나는 짐 보따리를 친구에게 내팽개치듯 맡기고는, 그 길로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 영안실로 향했다.

 

 

모두들 혼이 빠지고 넋이 나간 채로 맥을 놓고는 서성이고 있었다. 채 빈소도 마련되지 않은 채 급하게 준비하느라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 한편의 암담한 모습의 어두운 표정들뿐이었다. "아....... 어쩌란 말인가?!....... 어떻게? 어떻게?" 외에 다른 말은 하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멍해 있었다. 모두가 까만 옷을 입고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빈소가 차려지는 문밖에 서서 어쩔 줄을 몰라 낙심한 얼굴로 송장처럼 벽에 기대어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울음조차 얼어붙었는지 울지도 못하고서....... .

그러다가 나를 발견하자 와락 달려들며 서로를 붙잡고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나도 아마득했다. 도대체 이 일을 어찌해야 좋을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가슴 한복판이 쭈글쭈글 쭈그렁바가지 모양으로 뒤틀리는 듯 했다.

 

 

잠시 후에 얼마 전, 그러니까 사부님 근황이 수상쩍어 내심 제안을 하여 보냈던 선배인 아우가 도착했다. 그는 변.경.연.이 자랑해 마지않을 만한 점잖은 신사다. 그러나 그 역시 나를 보자 와락 끌어안으며 통곡하였다. 저랑 나랑 걱정이 되어 사부님에 대하여 조용히 알아보던 중 몇 주 지나 이러한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진즉부터 우리끼리 몇 번이고 통화를 하기도 하고 따로 시간을 내어 만나서 좀 더 구체적으로 논의를 한 적이 있었기에 더욱 안타까운 모양이었다. 남자의 눈물은 여자의 눈물보다 가슴 저리다. 쉽게 흘리지 않는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년의 제법 철이 든 남자가 흘리는 눈물은 비통함이 더 한층 애달프게 다가온다.

가족들도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하였을 테지만, 생명줄이라는 것이 그토록 한 줄기 바람처럼 순식간에 훅하고 사라져버리고 마는 줄은 아마도 미처 몰랐을 것이다. 숨이 멎으신지 얼마 되지 않은 직후라 그러하기도 하겠지만 아무런 경황이 없어보였다. 차분히 절제된 모습으로 사태를 인지하며 수습에 몰두하는 모습이었지만, 그 분들을 바라보는 것은 너무도 가혹하고 힘겨운 일이었다. 그 날은 별로 할 일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다행이 4일장을 치르게 되어 우리로써도 한숨이 돌려지기도 했다. 너무 급박하게 정신없이 치러지는 것이 못내 아쉬웠기 때문이다.

 

 

가족만 남고 다음날부터 본격적으로 장례를 치르기로 하였지만, 결국 몇 몇은 끝내 자리를 뜨지 못하고 스승님 영정사진이 모셔진 빈소 주변만 맴돌고 있었다. 적막한 곳에 스승님을 남겨 두고 발걸음을 옮긴다는 것은 몹시도 어려운 일이었기에 결국에 그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간호를 도맡아온 유가족들의 누적된 피로를 생각해서라도 우리가 잠시 자리를 비켜 드렸어야 옳았지만, 우린 우리대로 아쉬움과 죄의식에 가까운 애틋함으로 인해 도저히 자리를 떠나올 수 없었다. 실례를 무릅쓰고라도 스승님 곁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기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결과적으로 잘한 일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예상 외로 밤새 여러 사람들이 소식을 듣자마자 전국 각처에서 조문을 왔기 때문이다. 연구원들이나 꿈벗 등의 변.경.연.과 연관된 사람들이야 대강 시간대를 정하여 오기도 하고 기수별로 어울려 방문하는 등 굳이 한밤중에 올 일은 아니었지만, 독자나 강연을 들은 청중 가운데는 보도를 접하자마자 시간을 내느라 밤새 달려와 조문을 하는 모습이었다. 조용히 다녀가는 분들도 계셨지만 우리와 잠시 어울리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신 분들도 적잖았다.

 

오히려 가족들께서 우리를 걱정하여 쉬라고 하였지만, 우리는 억지로 우기고 남아있었기에 처음엔 조심스러워 그냥 한구석에 모여 앉아 다들 멍하니 한숨만 푹푹 쉴 뿐이었다. 이 어이없는 사태에 대하여 아무 생각도 아무 할 말도 없는 사람들처럼 맨붕 상태가 되어 벽에 몸을 기댄 채로 넋 나간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기 연구원 중의 아우 하나가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겠던지, 차라리 너스레를 떨며 내게 매운탕을 끓여오라고 주문을 하였다. 그러자 곁에 있던 일행들이 모두 따라 웃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소 객쩍은 웃음을 피식 날리고는 옹기종기 모여앉아 밤샘을 시작 하였다. 느닷없는 사부님 폐암 별세가 충격을 주었는지, 여니 장례식장의 풍경처럼 담배를 물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한참 후 매스컴에 부고가 나가자 사람들은 우리 스승님께서 평소 담배를 즐겨 태우셨던 모양이라고 간혹 오해들을 하는데, 내가 뵌 사부님께서는 담배를 즐기시지 않으셨다. 아주 가끔, 일 년에 몇 번이나 될까? 아주 기분이 좋으신 날에 제자들과 어울려 단지 한 가피 정도를 무는 정도에 지나지 않으셨다. 여하튼 4일장을 치르는 동안 우리 빈소는 다른 장례식장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우리는 줄곤 생전의 사부님 이야기로 꽃을 피우거나 사부님을 그리워하며 장례기간 동안 흠뻑 사부님 생각에 젖어들었다.

 

 

 

영정사진 속 스승님과의 향연饗宴

 

 

장례 첫 날. 제자들 가운데 한 아우는 빈소가 차려진 장례식장에서 밤새도록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울다가 웃다가 영정사진을 한없이 뚫어져라 바라보는 등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목이 타는 듯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는가 하면, 처절하게 낮은 포복 자세로 무릎을 깊게 꿇고 엎드려 몇 배고 절을 올렸다. 그러다가 힘이 빠지면 다시 우리들 곁으로 건너와 고 김광석이 남긴 노래 중 사부님을 연상하기에 좋은 노래라며 목청껏 불러댔다. 그러다가 또 이런 저런 아쉬움을 토로하며 어떻게 해야 할까를 두고서 서로 각자의 애달픔을 대신하여, 마치 싸우는 사람처럼 목청을 돋우어 소리를 질러대곤 하였다가 이내 쓰러져 버리곤 했다. 그러다가 또 어느 결엔가 보면, 영정 앞에 가서 온몸을 꿇어 엎드린 채 절을 올리며 이미 망자가 되어버린 스승님과 꼭 해야만 했던 말이라도 있었던 모양으로 연신 깊은 속삭임을 끊이지 않고 나누었다.

 

 

우리도 그와 같이 그를 따라 밤새 울부짖으며, 그와 다르지 않은 행동으로 날을 새웠다. 믿기지가 않아 영정 사진 앞에 가서 하염없이 뚫어져라 바라보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야속해 했다. 그러다가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왜 진즉에 알지 못했는지, 어떻게 이렇게 황망히 떠날 수가 있는지, 그동안 우리는(나는) 아무런 위로나 도움도 못 드리고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죄송하고 서러워서 통탄을 금치 못한 채 엉엉 우느라 밤새 눈물이 가시지 않았다.

 

 

그러다가 불현듯 앞을 다투어 영정 사진 속 사부님을 자신이 먼저 차지하기라도 해야 하는 사람들처럼, 각자가 제 눈 속에 더 깊이 담아두려는 듯한 경쟁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했다.

한 사람이 절하면 따라 절하고, 한 사람이 울면 따라 울고.......

아, 이 어처구니없음이여........ .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하며 미친 듯한, 미쳐버릴 것만 같은 우스꽝스럽고 유치한 행동들이 아무 거리낌도 없이 아무의 눈치에도 굴하지 않고 행해짐에, 울음과 웃음이 뒤범벅이 되어 연신 터져 나왔다.

도저히 이 믿기지 않은 현실을 받아드려 체념하고 담담히 보내드릴 수가 없는 것이다. 아니 아니 지금이라도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나 뒤통수를 팍! 치시며 "이것들아, 니들 지금 뭐하고 있냐? " 하고 박장대소 웃으시며 나타나실 것만 같은 착각이 자꾸만 드는 것이었다.

더구나 영정 사진은 마치 사부님께서 자신들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일부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정 사진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으며 더 가슴 저미게 한다고 입을 모았다.

 

 

영정 사진은 변.경.연. 1기 연구원 신재동군이 사부님 책 출간 시 프로필 사진으로 쓰시도록 찍어드린 건데, 기묘하기 그지없다. 영정 사진의 눈길은 사람을 그윽한 눈빛으로 지긋이 바라보며, 바라보는 이를 향해 그 눈길이 따라 이동한다. 절을 하고 일어서면 일어서는 대로, 무릎을 꿇고 앉으면 앉는 대로, 옆으로 자리를 옮기면 역시 이동한 그 자리를 향해 지긋한 눈길로 바라보며, 마치 우리들의 마음을 다 헤아리기라도 하는 듯한 모습으로 계속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아직 평소의 사부님 음성과 모습이 너무 생생하여 그런 거라고 스스로를 달래는 가운데,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사부님께서는 돌아가신 것임을 자꾸만 인지하려 애써보았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우리가 당장 해야 할 일부터 빠뜨리지 않고 잘 해나가야 함을 다짐하고는 하면서. 더는 회한을 남기지 말자고, 사부님께서 생전에 원하신 바대로 최대한 근접하게 장례를 치르기 위해 마음을 모으고자 했다. 그러자 미칠 듯한 감정도 다소 누그러지는 듯 했지만 가슴 한복판을 묵직하게 짓누르며 아리하게 찾아 드는 비통함은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들의 각자 이러한 상념과 통증은 아마도 이심전심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애달픔을 이해하여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흐느낌의 강도에 따라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가 갑갑증이 느껴지면 자연스레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까만 밤이 하얗게 밝아오고는 했다.

그러면 우리는 각기 직장으로, 혹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혹은 근처 어딘가에 가서 샤워를 하고 오기 위해, 슬며시 사라졌다가 또 금세 나타나고는 했다. 별반 시간 약속 따위를 하지 않았음에도 모두들 철저히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잘 움직였다. 다들 신기하리만큼 각자 알아서 착착 모여들고, 어떻게든 빈소에 함께 머물러 있으려고 기를 쓰는 모습이었다. 조문객이 많으면 살짝 자리를 비껴났다가 어느새 보면 다시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와 도울 일이 있으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도왔다. 그렇게 우리는 스승님 떠나신 빈소를 꽉 채워 생전의 모습 뵙듯 그리워하고 있었다. 마치 일순간에 세상의 모든 것이 정지된 모양으로 가슴은 먹먹하고 해결은 막막했지만, 서로 도와야 한다는 일념으로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알아서 행동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반가운 누군가 조문을 위해 나타나면, 또 눈가의 이슬을 훔쳐가며 서로를 위로하고 마음을 나누었다. 간혹 "맨붕이야~ "하는 소리가 허공을 헛헛하게 떠돌아다니고 있었고, 통곡소리조차 차분히 숨을 죽이며 질서 있게 흘러넘쳤다. 그렇게 착착 알아서 조문객들을 의연히 잘도 맞이하고 재빠르게 서빙하며 움직였다. 어쩌면 그렇게 다들 잘 알아서 하는지 모른다.

낯선 여행지 어딜 가더라도 항시 일사분란하게 알아서 척척 움직였던 때와도 같이 사부님이 곁에 계실 때나 안 계실 때나 마찬가지로 한결같은 행동이 흘러나왔다. 당연한 변.경.연. 이들의 모습이다. 아직 사부님과 말씀 한 번 제대로 나눠보지 못한 새내기 9기 연구원들까지도 분위기를 따라 혼연일체가 되는 모습이다. 혹여 변.경.연. 외부에 있다가 꿈벗 여행이나 연구원해외연수여행에 참여할 기회를 얻어 함께 생활해 본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분위기에 대해 익히 잘 알 것이다. 우리는 낯선 곳에서 처음 어울리게 되더라도 자연스럽게 무르익는 분위기가 되어 움직인다. 변.경.연.의 모임에 합류하게 되면 누구나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다. 반드시 이렇게 혹은 저렇게 해야만 하는 식의 반 강제나 무언의 압박 따위가 있지 않고, 그저 자연스러운 흐름과 분위기를 타게 될 뿐이다.

 

 

생전에 사부님께서는 무척이나 자유로운 영혼이셨고 따라서 전혀 강제성 따위를 필요치 않으셨다. 다만 서로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것이므로 자신에게든 타인에게든 약속을 잘 지킬 것과 공헌(력)을 발휘하도록 이끄셨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도록 말이다. 가르침을 주실 때에도 늘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좋은 의도로 서로 돕고자 일상을 꾸리도록 이끄셨기에 사부님과 가까이 하다보면 의당 모든 일에서 이러한 행동거지가 몸에 배이게 된다. 그래서 꿈벗을 하든 연구원을 하든 하여간 사부님과 가까이 접하다 보면 다들 얼굴이 맑고 밝아져 예쁘고 편안한 모습으로 바뀌곤 한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고,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그렇다. 사부님조차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좋은 모습이시곤 했으니까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장례식조차도 평소의 움직임대로 혹은 사부님의 뜻일 거라 생각하며 마치 축제처럼 솔선해서 즐겁게 임하고 있었다. 다들 너무도 열심히 하는 바람에 어쩌면 음식 값이 조금 많이 나왔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왜냐하면 조문객 한 분만 와도 어찌나 재빠르게 냉큼 상을 차려대고는 하는 통에 말이다. 슬픔 때문인지 종일 종종 걸음으로 서빙을 하는 탓인지 연구원 하나는 밥을 억수로 많이 퍼 드리곤 하였다. 일을 마치고 온 직장인들이 배가 고플까봐 그랬을 것이기도 하지만, 사부님 잃은 슬픔으로 인해 제 속이 헛헛하니 더욱 그러했던 것 같다. 그러나 미루어 짐작하건데 사부님이나 유가족 모두 설사 그로인해 밥값이 조금 많이 나왔더라도, 오히려 빠뜨리지 않고 식사 대접 잘 하는 모습만을 두고서 더 없이 잘 한 일이라고 칭찬 하실 것이 틀림없으니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3박 4일 동안의 장례 기간 자체가 혼연일체로 아름답고 평화로우면서도 질서 정연하게 흘러갔다.

 

 

마치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일원과 선생님의 전 일생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 하나의 행위예술로 무대 위에서 퍼포먼스로 펼쳐지며 향연을 벌이는 것과도 같았다. 장례식이라지만 더없이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스승님을 아시는 많은 지인들이 찾아와 놀라워했고, 얼른 자리를 뜨려하지 않았다. 함께 충분히 기꺼이 더 머물고 싶어 하였다. 삶에는 슬픔과 기쁨이 늘 공존하듯 비록 장례식장이라고 해도 삶과 죽음, 비통함과 충만함이 한데 어우러져 기꺼운 향연을 펼치는 것과 같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흘러넘쳤다.

벽면 한쪽에서는 졸지의 일을 당해 황급히 재구성한 스승님과 함께 했던 여러 영상물이 여전한 모습으로 생동감 있게 돌아가고 있었고, 그래서 빈소의 영정 사진은 영정 사진이라기보다 그저 액자 속 한 장의 사진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의 애달픔은 더욱 큰 것이기도 했지만 지나고 보니 많은 것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너무 일찍 사부님을 떠나보내야 했던 안타까움 한편으로, 누구에게나 느닷없이 발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일이기도 한 것이란 것을. 그러기에 이러한 때 비로소 평소의 사고와 일상의 생활이 적나라하게 들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위독한 상황의 병실에서와 또 장례식장에서조차 사부님과의 평상시처럼 분위기가 흘러가는 데에는 우리 자신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변.경.연.의 좋은 의도로 행해지는 문화에 대해 자못 긍지와 자부심마저 느껴졌다.

그래서 조금 한가해 지면 또 이내 스승님에 대한 감사와 고마움이 터져 나오며, 금세 눈시울이 젖고는 했다. 그러면 또 다 같이 울다가 누군가 분위기를 전환시키고자 웃기면 그 마음까지도 다 고스란히 느껴져 그 고마움에 우는 등 연신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하였다.

 

 

바로 얼마 전까지 활발히 활동하시던 선생님의 소식을 보도나 매체를 통해 전해 듣고 달려와 빈소에 차려진 영정 사진을 보며 빨갛게 눈이 충혈된 조문객들도, 건너편 한쪽 벽면에서 돌아가는 영상물을 보면서는 숙연해 하는 한편, 한껏 만족스럽게 후회 없는 삶을 살다가셨다고 입을 모으곤 했다. 온화한 성품과 함께 늘 많이 웃으시곤 하면서, 참 유쾌하고 넉넉한 삶의 모습을 하였었기에 말이다. 밀접한 관계가 없었던 사람들까지도 자못 흐뭇해하는 광경이었고, 마냥 슬픔에 젖기보다 살아있는 동안 참 후련히 잘 살았구나 하는 부러움을 표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오히려 한껏 충실히 살다가 후회 없이 떠나가신 망자로부터 되레 위안을 얻는 듯한 모습이고는 했다. 애석하기는 해도 절대 슬프기만 한 것은 아닌. 진즉부터 더없이 후련하고도 멋진 일상을 누리셨음을 알 수 있겠기에 말이다.

 

 

함께 장례 기간 3박 4일을 지켜보신 신부님께서는 사부님과 연구원들의, 그리고 구본형 선생님과 변화경영연구소와 인연된 모든 이들의 언행을 보시고는 감탄해 맞이하지 않으셨다. 너무도 아름다운 광경의 실체를 목격하셨다며 자못 흐뭇해 하셨고, 앞으로 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를 위해 무슨 일이든 돕고 싶다고 신뢰와 성원의 마음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 외에도 구본형 선생님과 인연이 닿은 많은 분들께서도 그와 같은 말씀을 잊지 않고 앞 다퉈 해 주셨다. 먼저 각 사의 출판 관계자 여러 분들과 선후배 지인 분들을 비롯하여 친지 분들 등, 많은 분들께서 사부님의 빈자리를 이해하고 염려해 주시며, 어떤 방법으로든 함께 동참하여 돕고자 하셨다.

이 또한 생전에 사부님께서 당신의 신념대로 일상을 사람들과 더불어 영위해 오신 까닭일 것이다. 책이나 종교 혹은 원론적 경영 혁신에 머물지 않고 일상의 실체인 '사람에게서 구하고', 삶을 균형감 있게 경영하신 비결이리라. 연구원이나 꿈벗 등의 변.경.연 사람이라 자처하는 이들보다 솔직히 몇 배 더한 열정으로 기꺼이 힘써 주실 것을 약속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로 사부님의 삶과 사상에 감회가 새롭지 않을 수 없었다. 졸지에 사부를 잃은 길 잃은 양 같은 우리를 염려해 입에 발린 인사말로나 하는 것이 아니기에 진심으로 고맙고 감사했으며, 가슴 한편에 찡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또한 더한층 향후 우리 변.경.연.의 나아갈 길에 대하여 저마다의 책임과 의무가 느껴지기도 함이었다.

 

 

낮이나 저녁의 조문객들은 당연지사라고 쳐도 자정을 넘어 밤이 새도록, 새벽까지도 원근각처에서 조문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어느 이는 다소곳이 와서 영정 앞에 얌전히 인사를 드리고 갔고, 어느 이는 몇 시간을 고속버스를 타고 달려와 빈소에 마련된 영정 사진을 보자 마치 살아계신 선생님 찾아뵌 듯 경외하는 모습으로 간곡히 절을 올리고는 했다. 저녁도 굶은 채 수백리 길을 한 걸음에 달려와 마지막 가시는 영전에 각자가 가져온 한 아름의 꽃과, 책 등을 슬며시 놓고 가는 분들이 밤새 이어지곤 했다. 심지어 발인 날 이른 아침을 비롯해 발인 미사 중에도 조문이 계속 이어진 것을 아마도 유가족께서는 입관미사에 참예하느라 미처 알 수 없었을 것이지만, 우리는 안팎을 오가며 살피고 있었기에 알 수 있었다. 비록 방명록에 이름 하나 남기지 않았을 지라도, 진정으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조용히 다녀가는 조문객들이 많았다. 아마도 우리가 빈소를 떠나 장지로 향한 이후까지도 누군가 왔다가 헛걸음을 하고 갔을지 모르겠다. 미처 우리는 대처하지 못하였더라도 천상에 계시는 스승님께서는 다 아시고 진심으로 고마워하시며 흐뭇해 하셨으리라. 스승님께서는 당신께서 괜찮은 삶을 살았노라 다소 겸손하게 큰 영애께 말씀하셨다지만, 실상은 정말이지 대단히 훌륭한 인생을 사셨다. 최선의 아름다운 삶을 실컷 누리셨으며, 소풍처럼 즐겁고 신나는 인생을 마음껏 누리다 가노라 하고 흔쾌히 회고할 수 있으실 것이다. 신부님께서조차 이 시대의 영성가적인 거룩한 삶을 사셨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으셨으니 말이다. 물론 우리는 신부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또한 장례란 것이 의당 슬프기만 한 절차가 아니라, 한 개인의 일생을 조망하며, 영혼까지 흐르게 하는 일생일대의 귀한 축제일 수 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이제 2013년 봄에 어쩌다가 홀연히 생전의 자취를 감춰버리고만 스승님을 향해, 남은 자의 몫을 깊이 헤아려야 할 일들만 남았다. 그러나 지금도 믿기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입관하는 장면도 생생히 보았고, 장지에서 한 줌 뼈로 또 재로 산화되는 모습을 확연히 보았음에도, 아직까지도 스승님의 부재를 실감할 수 없다. 오직 먹먹하고 멍할 따름인 채로.

어쩌면 변.경.연.의 아우에게로부터 위독하시다는 문자를 처음 받았을 때의 그 충격조차 아직 가시지 않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떻해?, 어떻하게 하면 좋아?" 라고만 하며 계속 울부짖던 사월의 어느 날이 아직도 너무나 설움 복받칠 따름이기도 하다. 몹쓸 병에라도 걸린 사람마냥 절로 펄펄 뛰고 절로 자지러지곤 하며 가슴을 쓰러 내려야만 하기도 한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며 소리치고 있기도 하고, 가슴에 묵직한 통증이 내려앉은 채 울어도 울어도 울음이 멈추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스승님께서는 분명히 내가 쓰려고 지어둔 책의 제목처럼 진정 후련히 살다 홀연히 떠나가셨다. 하여 당신께 내가 지어둔 책의 제목을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갈하게 너무도 잘 사시고 떠나셨기에 너무나 잘 어울림이다. 사부님 부재는 아쉬움이 남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할 수만 있다면 진정 나도 그리 살다 가고 싶다.

말기 암 투병 가운데에서도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내면의 소신을 잃지 않으시고, 한껏 멋스럽기까지 하게 당신 의지대로 살다 가신 내 스승님은 참으로 위대하신 분이다. 내면과 외면의 아름다운 통합과, 균형감 있는 위대한 일상을 영위하셨으며, 진정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평범한 인생을 찬란히 꽃피우고 장렬히 마감하셨다. 귀감 그 자체다. 이제 남은 자의 부끄러움이 최소화할 수 있도록 생전의 사상 잘 받들며, 나 역시 후련한 삶을 살아야 하리라. 아아... 참사랑의 아름다운 스승님이시여, 우리 모두 당신으로 인해 분에 넘치는 사랑과 행복 그리고 즐거움 많이 느꼈습니다. 사부님, 사랑하며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부디 고이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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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30 08:13:01 *.246.146.165

젠장... 아침부터 울리기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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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2 08:37:12 *.97.72.143

스승님의 <칼럼>을 읽다가, <마음을 나누는 편지>를 읽다가 등등 점점 더 새록새록 느껴지며 구절마다 무찔러드는 스승님의 글귀에 밤새 또 울다가 잠들었넹. 씩씩해야 하는데... .

 

영남 모임에 가고프다. 사부님 함께 갈 때는 더욱 좋았는데... .

사부님 생전에 가까이서도 아무 것도 못하고, 멀리 있는 그대들에게 발 빠른 제공도 못하고 늘 미안하다네.

사람되기 글렀는데도 늘 사부님처럼 응원 아끼지 않아 항상 고마우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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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1 10:10:06 *.106.204.8

잔인한 4월을 보내고 맞이한 오월의 첫날 아침, 눈물이 납니다.

왜 이리 보고픈지...

어찌해야 할지...

추억케 해 줘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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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2 08:46:50 *.97.72.143

운전, 사부님 마음 알지요?

사부님께서 표현은 많이 안 하시어도 그 사람에 대하여 아주 정확히 아신다우.

그대, 항상 든든해 하시고, 참 미더워하셨음을 오래오래 잊지마우.

 

봄바람이 일면 사부님께서 그대들 찾아 영남 모임에 살랑살랑 다가가시는 거라우.

내가 알면 세상이 다 아는 거라우.

 

항상 고마워요. 자랑스러워요. 든든해요. 참 좋아요. 이대로 주욱 함께 합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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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1 12:25:13 *.64.236.170
눈치 안보고 울고 싶어 들어 오는 추모게시판....

그랬구나.......그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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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2 08:50:58 *.97.72.143

아,,, 이 일을 어째?

전화라도 한 통 넣는다고 하고선 매일매일 까먹어 버리고 있다우.

시차라는 핑계로, 멀리 있으니 덜 급한 것처럼 늘 연락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지낸다우.

이 무심함을 용서하우다. 이 못 미침을 말이우.

 

그럼에도 긴 글 짧게 읽어주니 참 다행이지 뭐유? ㅋㅋ

내 이번에는 덜 까먹고 꼭 꼭 꼭 전화든, 편지든 하리다.

조금 기달리시구랴. 울지 말고! 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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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1 19:53:41 *.11.178.163

써니 언니..

생생 기록 잘 읽었어요.

시간 나시는대로 살롱9로 고고씽..

아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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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2 09:01:08 *.97.72.143

글게? 그게 말야. 그렇게 되 버렸네.

가슴을 치는 한 장면이 있어 담아보려 한 것이

뒤에 가서 그만 싹둑 잘라 먹고 급 마무리를! 그러려는 것이 아니었는데 말이지.

울다가 지쳐 왜 울었는지 까먹어버리고 기운만 잃은 거 맨코로.

할 일 안하고 이 느낌을 안고 있다가 이어가지 않고 게으름을 펴기에 먼저 올리고 수정이건 덧붙이기 건 할 요량으로

나의 게으름과 무기력을 강제하기 위하여서 말이유.

 

그러세, 살롱에서 보세. 요즘 그대들이 게 어떤 형식으로든 함께 있으니 어찌 그리 맘이 훈훈한지.

아마도 사부님께서도 그래서 살롱을 열어둔 게 아닐까 한다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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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1 21:46:12 *.209.89.108

자취를 감추신 두 달여, 문자라도 보내고 싶어 몇 번이나 문구를 떠올리다 말아 버린 것이

그렇게 후회가 되네요.

알아 차렸어야 하는데,

당신이 마음편지를 못 쓸 정도면 그것이 어떤 상황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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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2 09:17:04 *.97.72.143

언니...

입이 백 개라도 아무 할 말이 없어요...

어제는 밤새 사부님 남기신 글들을 뒤적이며 읽다가, 그리고 내 글을 읽다가

내가, 바로 내가 당신을 빨리 돌아가시게 한 장본인 이었다는 걸 가슴치도록 느끼기도 했어요...

 

.........    ......... 

 

언니,  건강하셔요. 우리는 좀 더 길게 살아가자고요.

봄꽃도 많이 보고, 바람도 자주 느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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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2 16:06:30 *.48.47.253

가슴에 사무치지만 누님은 평소 사랑을 많이 받으셨어요.

 

진실에 진실을 담는 당당함을 늘 칭찬하셨죠.

 

그 분의 사랑, 우리 마음속에 깊이 새기도록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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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3 13:53:57 *.197.63.172

그러게 말야...

 

처음에 몹시 어려워(아무도 안 믿겠지만^^) 했고, 나중에도 나는 늘 어려워(또 안 믿겠지만^^)했는데, 다만 사부님께서는 나의 그러함을 눈치 채셨던 모양일세그려.

 

측은지심이야말로 아주 큰 사랑이지.

역지사지하고 미루어 헤아려주시지 않았다면 받을 수 없는 가없는 사랑.

 

정심을 다해 발을 벗고 달려도 못 미칠 일이지만,

그려. 모쪼록 우리 다 함께 합심하여 노력하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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