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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2월 16일 13시 11분 등록


안개 속에서

鄭 木 日


안개 속에 들어가면 나는 예민한 목관악기가 된다. 안개 속은 물방울의 미립자들이 만드는 환상의 수채화.

혈관 속으로 흐르는 피는 어느덧 신비로운 가락으로 흐르고 나도 한 알의 미립자가 되어 수많은 미립자들과 어울려 공중에 나부낀다.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존재의 외로움과 그 외로움을 함께 나누어 갖는 신비로움. 우리들은 모두 손을 잡고 마음이 닿아 있다. 안개 속에선 이 은밀한 영혼 교감의 충일감을 느낀다. 이상하다. 안개 속에선 누가 비어 있는 내 목관악기를 불고 있다. 어머니의 치맛자락처럼 부드럽고 섬세한 촉감, 아무에게도 드러나지 않는 가장 고요스럽고도 은밀한 세계 속에 파묻히는 이 신비감을 누가 알까. 안개 속에선 세파에 할퀸 상처자국과 감정의 생채기를 어루만지며 머리카락을 쓸어주는 손길이 있다.

안개 속에선 묻고 싶다. 아무도 몰래 어디로 흘러가며 사라져야 하는가를. 나는 한 알의 미립자지만 깨어 있다.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이지만 신비한 촉각을 갖고 있다는 걸 느낀다. 자존의 뼈, 감정의 근육도 풀어버리고 작아질 대로 작아져 한 알의 미립자가 되어 아무도 몰래 흘러간다. 영원과 찰나, 시간과 공간 속을 떠도는 물방울들. 그 영혼들과 교감하며 한순간의 수채화로 아니면 플루트 소리로 사라져간다.

내가 열일곱 살이었을 때 어느 안개 낀 아침. 아버지의 상여가 나가던 날,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안개 속이었다. 울긋불긋 꽃으로 장식한 상여 뒤를 따라 삼베 옷에 鳥끼관을 쓴 어린 상주는 짚신을 신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땅만 내려다보며 걷고 있었다. 어른들이 일러준 대로 곡소리를 내보려했지만 그 소리는 목 안에서만 뱅뱅거렸다. 안개 속에서 상여를 뒤따르며 이 길을 가면 내 운명의 길은 어디로 통하고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때였다. 사방에서 나를 휘감고 있던 안개가 부드러운 손수건이 되어 내 마음을 어루만지며 속삭여 주고 있었다. '누구라도 한번은 지나가야 할 길이야….' 자세히 보니 안개의 수많은 미립자들이 머리카락이며 눈동자속으로 내려와 촉촉이 젖어들고 있었다. 그것은 말하지 않아도 감미롭게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위로의 속삭임이었다. 그때 감미롭고 부드러웠던 안개의 애무를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한 순간이지만 안개의 그 부드러운 속삭임과 위로는 얼마나 고마웠던가. 아! 그 수많은 안개의 미립자들과 한마음이 되어 상여 뒤를 따라 갔다. 상여는 안개 속으로 흘러갔다.

안개 속에서 가끔씩 내가 걸어온 길과 가야 할 길을 생각한다. 보이지 않고 분간도 할 수 없는 길을 가야만 하는 인생길에 대하여. 안개는 환상의 수채화를 떠올리게 하지만 나에겐 메말라 있는 마음의 목관악기를 켜주는 손길을 느끼게 하여 그 속에 빠져들게 한다. 한 미립자가 꿈꾸는 환상, 미립자들 영혼의 순결한 결합을 나는 알고 있다. 아무도 모르게 미립자들만이 공감하는 물방울의 무지개를…

안개 속을 걸어가면 이상하다. 나도 한 방울의 미립자가 되어 아무도 몰래 어디로 흘러가며 사라지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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