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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3월 13일 09시 50분 등록
아버지가 얼마 전 부터 부쩍 안절부절 못하고 불안해 하셨다.
7남매중 막내이신데 얼마전 큰어머니 두 분 돌아가시고, 이제 고모님 한 분 생존하시고 그 담
엔 당신이 가실 차례여서 그런가?...

사람은 한번 가는 거....그것에 연연하신 것은 아니고...
갈 길에 대한 준비가 안되어서 그런 것이었다...누울자리가 확정되지 않아서...

장남인 나는 화장을 맘에 두고 있고, 부모님은 당신들의 토속종교때문에 부활하기 위해선
몸을 훼손할 수 없다며...매장을 원하고 있고...

아버진 육이오참전용사로 인정받아 재작년 완공된 호국용사묘지에 안장될 자격을 갖추고
계신데 그 쪽은 화장후 유골단지만 납골묘에 안치하게 된다고 해서 고려치 않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어디서 알아봤는지 손톱발톱하고 머리카락 모아서 유골함과 함께 땅에
묻으면 화장해도 된다는 말씀을 듣고 오셨다.
상당한 권위자로 부터 들은 듯 두분들의 마음이 화장으로 돌아섰고, 결국 오늘 날을 잡아
전라북도 임실에 있는 호국용사묘지를 찾게 되었다.

오늘 날을 잡은 것은 매월 두째 네째주 화요일 오후 2시에 격식을 갖춘 합동장례식이 있기
때문에 그걸 보기 위해서 였다.
남동생과 부모님과 네명이서 아침 일찍 임실로 출발하였다....
봄날씨 쾌청하고 서해대교 건널 때 바닷 물에 무수히 부숴지는 햇빛이 눈부시게 반짝인다...

부안 IC에서 빠져 임실군 강진면으로 달린다.
좌 우측의 낮으막한 산등성이에 수없이 산재해 있는 무덤들...
생각이 그래서 그런지 묘들만 보인다. 밥공기 뒤집어 놓은 것 처럼 친근한 무덤들...

우리의 삶속에 죽음은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이다...
사람의 심정이 갈 때는 무엇이든지 족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모양이다.
시간 지나면 육신은 그저 자연으로 돌아 갈텐데...그 몇 줌 안되는 자신의 부패된 주검 앞에
그렇게 사람을 모으고 싶고, 그들의 기억 속에 그렇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싶을까?

깨끗하게 정비된 임실호국원에서 정중히 안내를 받는다.
부인도 호국용사인 남편과 같이 합장될 수 있단다. 어머니 문제도 해결 된 것이다.
부인 먼저 사망시는 부인이 들어올 수 없고 딴데 있다가 남편과 같이 와야 한단다.
아버지..."아무래도..내가 먼저 가야 되겠구려..."

강당에서 식이 진행된다. 호국원장의 조사와 불교,기독교,천주교 종교의식..조총발사..음악..
육,해,공 삼군 참모총장과 경찰총장을 대신한 장교들의 분향..그리고 유족대표의 분향...
아버지는 당신 사후에 진행될 의식을 이렇게 미리 하나하나 보시고 계신 것이다.

강당에서 식이 끝나고 군인들이 유골함을 한명이 하나씩 들고 나온다.
군악대가 앞서고 그 뒤에 태극기와 기수들..소총수들..유골함을 든 군인들...
그리고 유족들의 긴 행렬...산중턱의 묘를 향한 행진이 진행되는 것이다.

옆에 나란히 서서 걷는 아버지의 모습이 담담하다.
굵게 패인 주름살...모자 챙이 주는 그늘 아래서 앞만 주시하고 걷는 아버지의 눈동자...
가실 날에 대한 최종 점검을 하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70여년을 살아오신 삶들이 주마등처럼 아버지의 머리에서 흐르고 있을 것이다.
때론 삶에 지치고 좌절했었던 기억들...소박한 행복감에 즐거워 했던 순간들...
혼란의 시절...형들의 주검을 일일이 확인하고 막내에게 부과된 그 엄청난 부양의 몫을
감당해 온 세월들....아버지에 대한 그 필요가 아버지의 짐이었고 또한 힘이었으리라...

우리가 인생의 의의를 찾지 못할 때...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아무짝에도 쓸데 없는 나같은 인간은 필요없다며 한없는 나락에 빠지게 될 때....
죽고만 싶을 때...우린 이렇게 물어보자...

인생이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나의 인생과 더불어 있는 나의 부모가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
나의 아내가...자식이...형제가...나의 조국이 내가 어떻게 해주기를 요구하고 있는가?

엄청난 요구사항과 내가 살아야 될 이유가 분명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삶은 인생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을 채워나가는 것이다...

"사는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떻게 사느냐의 방법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 니체

육이오참전용사 묘역 앞에서 행렬이 멈추었다....

아버지....
다음번에 내가 이곳에 오게 될 때에는...아버지는 제 옆에 계시지 않겠지요...
아버지는 저 작은 유골함에 담겨서 젊은 군인의 손에 들려 있을 테고.....
저는 그 뒤를 묵묵히 따라가고 있을 겁니다.......

아버지는 여전히 말없이 장례식을 지켜보고 계셨다...자신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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