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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기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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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4일 11시 53분 등록

매년 8월 마지막주 일요일은 우리 집안 벌초하는 날이다. 그저 멋모르고 부모님 따라 나들이 다니던 어릴적에는 도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메뚜기와 잠자리 잡는 재미때문에 벌초때만 되면 신이 나곤 했었다. 마흔을 넘긴 지금은 어떠냐구. 벌초전날밤부터 평소 운동과는 담쌓은지 오래인 허약한 육신이 지레 겁을 먹고 쑤셔오고 적당한 핑계거리라도 생겨서 빠졌으면 좋겠다는 못된 생각까지 하게 된다. (실제로 작년에는 둘째아이 출산과 겹쳐서 성인이 된 후로는 처음으로 가지 않아도 되는 호사를 누렸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생각에 그칠뿐, 자식된 입장에서 유일하게 부모님이 중시하는 이 집안행사에 빠진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차를 타고 고향으로 가면서 또 한번 잔머리를 굴린다. 어떻게 하면 최대한 뺀질거려서 일을 덜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얍삽한 생각말이다. 사실 이렇게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나같이 노동하고는 태생적으로 거리가 먼, 일 못하기로 소문난 사람에게는 중요하고 힘든 일은 애당초 맡겨지지 않는다..


벌초현장은 영락없는 전쟁터다

벌초가 한창일 때 산소 한복판에 서본 적이 있는가? 말 그대로 전쟁터가 따로 없다. 귀청이 찢어질 것 같이 사방에서 울리는 벌초기계 소리와 사방에서 예고도 없이 날아오는 풀 부스러기, 돌파편, 방아개비와 메뚜기, 땅벌들에 둘러쌓여 있다 보면 내가 벌초하러 왔는지 전쟁터에 왔는지 구분이 안갈 정도다.

특히나 공포스러운 것은 전쟁영화에서나 봤을법한 총탄세례를 무색케 할 정도로 날카롭게 달려드는 돌멩이 들의 공격이다. 벌초기계 날에 풀속에 있던 돌멩이가 튀면서 발사되는 이 무시무시한 파편들은 지난주 벌초에서도 우리 큰 형의 눈덩이를 네번이나 두들겼고 긴바지로 무장한 내 정강이에 상흔을 만들고야 말았다. 몇년전에는 우리 사촌형의 눈을 빼앗아 갈 뻔도 했을만큼 위험스런 존재들인 셈이다.

또 하나의 불청객들은 산소주변에 한두개쯤 존재하는 땅벌들이다. 이놈들이 얼마나 고약한지는 굳이 경험해 보지 않은 이들도 짐작할 것이다. 이놈들을 제압하기 위해서 에프킬라를 들고 덤벼보기도 하지만 듣기에도 섬뜩한 거친 웽웽소리에 감히 뿌려볼 엄두도 못내고 주저앉는게 보통이다. 괜히 성질 건드렸다가 우리가 킬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앞서는 까닭이다. 그저 조심스럽게 주변을 먼저 벌초하고 무리중에 용감한 이들이 기습해서 속전속결로 끝내는게 최선이다.

 

벌초군단의 역할분담

아버지는 우리 집안의 최고 어른이다. 칠순이 가까워지는 연세에도 아버지는 벌초때마다 믿지 못할 정력을 과시하신다. 어릴때부터 자주 목격해 오던 광경이지만 아직도 낫과 톱으로 무장하고 산소주변에 나무가지들을 원샷원킬하며 벌초군단을 진두지휘하는 사령관같은 아버지의 카리스마는 아직도 감동 그 자체다. 그런 아버지앞에서 내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지랭이같은 존재라는게 부끄러울 때가 많다..ㅜㅜ

벌초군단 사령관격인 아버지는 벌초 순서에서부터 벌초병력의 할당, 벌초의 시작과 끝에 대한 선언 등에 이르는 모든 명령을 내린다. 직계자식들을 제치고 사령관의 신임을 한몸에 받고 있는 사촌형은 믿음직한 벌초기계군단의 사단장이자 무기정비단장이다. 벌초기계가 고장나면 무조건 사촌형에게 인계되고 잠시 후 기계들은 다시 새생명을 얻어 병력들에게 인계되곤 한다.

벌초군단 한 무리는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2~3명의 벌초기계수. 역시 2~3명의 갈쿠리전담반. 1명의 보급담당. 벌초기계수는 노동으로 잔뼈가 굵은 정예부대가 주로 맡고 아직 어리거나 나같이 쓸모없는 어른이 갈쿠리로 뒷처리를 맡는다. 집안에서 가장 막내이거나 어린 녀석이 물, 과일, 연료통 등을 들고 다니며 주력부대를 후방에서 지원한다. 사실 나같은 사람은 보급담당이 더 제격이었고 꽤 오랫동안 이 꽃보직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떠오르는 꿈나무들의 성장으로 어쩔 수 없이 그 자리를 빼앗기고 갈쿠리전담반으로 밀려난지 오래다..ㅜㅜ

체력적으로 벌초기계수들은 주기적으로 교대를 필요로 하는데, 이때 갈쿠리전담반에서 그나마 가장 체력이 좋은 인원이 잠시 차출된다. 매년 벌초군단 병력이 감소추세에 있기 때문인지 나 역시 더이상 다른 사람들의 째림때문에 이 순간을 회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기껏해야 전체 벌초시간 중 서너번 기계를 매는 것에 불과함에도 불구하고 이 노동 몇분이면 양쪽 팔뚝이 사정없이 저려온다. 그 무시무시한 진동과 돌파편에 대한 공포까지 더하면 전담 벌초기계수들이 존경스러울뿐이다.

이마저도 오래가지 못하는게 기술도 힘도 없는 무지랭이가 벌초한 곳은 거의 다시 손을 대야할 경우가 많아서 지켜보던 벌초기계수들이 참지 못하고 서둘러 기계를 빼앗는다. 안도하는 한편 자존심이 뭉개지는 순간이다. 나도 벌초군단에서 한몫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구는 있으니까 말이다. 빼앗긴 기계를 뒤로 하고 갈쿠리로 열심히 쓸어담아 보지만 마음 한구석이 퀭하다.


벌초행사가 그래도 존재해야 하는 이유

점점 고향을 찾는 횟수가 줄어드는 요즘 추세를 보면 벌초마저 없어진다면 낯선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기회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또 1년에 한번뿐이지만 조상의 묘를 살피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고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효도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드는 벌초행사는 그래서 아직 소중하다.

그 많은 조상묘 중에서도 직계 조상의 산소를 보살필 때면 더 마음이 짠해지고 정성스러워지는 것은 예외가 없을 것이다. 할아버지 산소를 벌초하고 절을 올릴 때면 이제는 한없이 늙으신 부모님 생각에 더 애틋해지고 우리 형제들이 아버지가 그랬던것처럼 잘 모실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벌써부터 어르신들과 젊은 친척들사이에서는 서로 다른 이유로 납골당을 만들자는 얘기가 나온다.

어르신들은 우리마저 죽고나면 조상을 제대로 돌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걱정으로 납골당이라도 만들어서 벌초행사의 명맥을 유지하고자 하는 마음이고 젊은 이들은 효율성을 따지며 손이 많이 가는 벌초부담을 덜고자 그런 생각을 한다. 물론 우리 집안의 경우 벌초해야 할 곳이 너무 많아서 거의 하루종일 일을 해야 한다는 부담때문인지 친척들이 모여서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며 즐기는 행사는 꿈도 꾸지 못한다. 그래서 나같이 못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점점 사람들이 줄어드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지고 보면 1년에 딱 하루다. 그 하루마저 우리가 각박한 도시생활의 또 다른 하루처럼 계산하는게 과연 온당할까. 고생으로 치자면 연로하신 부모님들보다 우리가 더 힘들까. 부끄러운 일이다. 내년에 다시 돌아오는 벌초때 또 이런 못난 잔꾀를 되풀이 할지도 모르지만 아직 부모님과 함께 벌초할 시간이 남아 있다는 지금에 감사하며 고향앞으로 기껍게 달려가도록 하자. 

IP *.105.21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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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04 18:06:34 *.227.22.57
아~ 완전 기찬이형다운 글에 사진까지 더해지니 읽기 좋고, 또 짠~하네요. 형~ 글 좀 자주 올려주세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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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희
2008.09.05 00:07:22 *.254.30.80
요즘은 벌초의 계절이야.
나도 결혼하고 첨으로 집안 벌초에 참석했었어.
점심을 준비하는 조를 뿌리치고 벌초하는 조에 끼였어.
나와 큰애 꽃바람에겐 벌초도 하나의 멋진 관광이었지.
제주의 산소는 돌이 둘러 쌓아놓은게 특징이야. 벌초기계가
돌담가까이 남겨놓은 잡초를 베는게 내 임무. 꽃바람은 갈구리 담당.
트럭 뒤에 타고 가는 그 시원함과 재미있음이란 최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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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08.09.05 08:13:05 *.251.185.254
정말 기찬씨의 말발이 글발로 거듭난 생생함이 좋네요. ^^
포털 메인에 뜰만한 차칸 글이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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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찬
2008.09.05 09:51:45 *.105.212.75
종윤아. 이렇게 글을 올리는 것도 다 니 덕분이다. 맛이 다르다니까..^^

춘희야. 제주에서의 벌초는 또 어떤 맛일지 궁금하구나. 하긴 너에게는 모든게 아름다울 수 밖에..^^

한명석님. 진짜 올만입니다. 잘 지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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