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나를

5천만의

여러분의

2017년 9월 19일 01시 58분 등록





‘전인적으로 세상에 공헌하는 사람이 되어 큰 틀에서 돕습니다.’ 라는 내 비전은 고통스러운 한 사람을 직접적으로 돕는 것을 자제하여 나를 소모하지 않았다. 이것은 큰 비전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였으며, 이것으로 인해 사회 공헌력에 대해 심도 있게 생각하며 바라보게 해주었다.

 

내 육십 한 살까지의 10년은 참으로 행복과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나는 내 마음대로 내 삶을 그려보았고 실천했다. 마음 가는 대로 세상을 살았다. 나에게는 하루하루가 행복한 여행이었으며, 햇살 가득한 꿈을 꾸며 실현하는 시간이었다. 정치가로서 세운 하나의 목표를 성취할 때마다 나의 자신감은 충만해졌으며, 나의 질적인 삶도 향상되었다. 나의 몸과 마음은 사회변혁에 대해 가슴 벅찬 즐거움으로 가득 찼다. 나의 정신은 숭고한 삶에 대해 깊이 생각했으며, 자연과 함께한 나의 삶이 오래된 김치처럼 맛도 깊어졌다.


1. 모두 5권의 책을 썼다. 

그 책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절망에서 꽃을 피운 사람들

결핍을 딛고 일어선 민초들

산을 움직인 사람

걸어가는 길 위에서의 기쁨

바닥을 지켜낸 사람들

 

여행에 대한 책을 한 권 썼다. 이 중의 몇 권은 영어, 일어, 중국어, 독일어,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 이 중에 두 권은 내가 직접 일어로 번역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통해서 어떻게 평범한 사람들이 비범한 사람이 되었는지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 동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해 보니, 그것은 한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결핍을 통해서, 그리고 스승을 만나서 평범함이 비범함으로 바뀌는 것을 목격했다. 그래서 나 스스로 비범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와서 정치에 입문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 자유 여행가로, 정치가로서도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다.

 

2. 나는 모두 지난 10년 동안 10번의 특별한 여행을 즐겼다. 

내가 기획했고 내가 의도한 여행을 했다.

 

유명한 곳을 찾아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골목길이나 뒷길을 쏘다니면서 그 나라의 본모습을 제대로 알아 갔으며, 느끼고, 즐겼다.

 

티벳에서 수도승과 같이 천천히 걸어가며 호흡을 느끼기도 하였으며,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명상에 잠겼던 일도 있었다. 그러고 나니 몸이 가벼워졌으며 호흡을 조금은 느낄 수 있게 되었던 좋은 경험이었다.

 

몽골에서 말을 타면서 드넓은 초원을 달렸던 것도 속이 시원했다. 말의 근육을 느끼며 구름을 타고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밤에는 넓은 광야에서 쏟아지는 별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나의 실체를 생각하는 시간이 아주 좋았다. 지금도 뇌리에 각인되어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히말라야 5200고지를 트래킹하면서 고산 증세로 고생은 했지만, 설산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들었다. 늘 산을 그리워하면서 살았다. 대학산악부 시절에 맥킨리 등정대가 꾸려질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포기했던 기억과 함께 가지 못한 아쉬움이 뒤섞였던 시절을 보상이라도 받으려고 히말라야를 동경했었다. 그렇게 아련하게 동경해오던 그런 곳에 와서 속 시원한 추억은 나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다.

 

아프리카 열대 우림에서 미국소를 키우기 위해 무자비하게 베어지는 우림의 숲을 바라보며 미국에 대한 적개심도 다시금 커졌다. 미국 소는 절대 먹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무한한 산소를 호흡하며 삼림욕을 즐기고 싶어 갔던 아프리카 우림은 나에게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동시에 남겼다.

 

사하라 사막의 모래 바람을 맞으며 변형된 지프차를 타고 덜컹거리며 달리던 기억도 나쁘지는 않았다. 사파리 때는 야생 동물들을 가까이 지켜보는 것으로 자유를 만끽했다.

 

젊은 시절 영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설산이 보고 싶어 무작정 가서 실컷 몽블랑을 바라만 보았던 내가 프랑스 샤모니에서 몽블랑을 단독으로 등정하는 쾌거를 올렸다. 쇼펜하우어가 몽블랑을 바라보며 구도자의 정신이 등산과 비슷하다고 했던 기억을 간직한 채 설산을 마음껏 만끽했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풍광은 내가 상상했던 느낌을 초월했다.

 

3. 한 해에 50회 정도씩 강연을 했다. 

그동안 수만 명에게 강연을 했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작가로서, 자유 여행가로서, 정치가로서 늘 책과 노트를 끼고 살았다.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노력했다. 혼자서 영화를 즐겼으며, 미술관이나 음악회에서 영감을 얻었다. 혼자 놀면서 생각하였고, 나만의 세계를 끊임없이 만들어 왔다.

 

나의 강연은 주로 인문학적 정서를 가미한 정치색이 강한 강연이었다. ‘한국의 정치 상황을 제대로 바라보자’로 대중들에게 각인 시켰다. 지금은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인문학적인 이야기와 민주화 물결에 조금이나마 함께 했던 대학시절의 이야기로 버무렸다. 그리고 현재 정치하는 사람으로서 지금의 정치 상황을 제대로 바라보는 방법들을 제시했다.

 

4. 지난 10년 동안 등산, 골프, 간헐적 단식을 통해서 몸을 잘 키웠다. 

집 바로 뒷산에는 한 달에 3-4회 정도로 하였으며, 간혹 맨발로 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산에 가면서 이 나무를 보며 말을 건네고 꽃을 보면서 말을 건네 보았다. 자신의 하늘을 열기위해 노력하는 아름다움을 보면서 짜릿한 감동을 느껴 보기도 했다. 산의 음이온을 가슴으로 느끼고, 발에서 전해오는 대지의 기운을 온몸으로 느꼈다.

 

골프는 집중력을 키우는 데는 좋은 운동이며, 나이 들어서도 즐길 수 있으며, 라운딩 하는 동반자들과 즐기며 친해질 수 있는 몇 안 되는 운동이기에 마음에 든다. 게다가 18홀을 돌게 되면 약 만 보에서 만 오천 보를 걷기 때문에 몸도 호흡도 아주 좋아졌다.

 

간헐적인 단식은 체계적으로 했다. 우선 식사를 하고 나면 16시간은 굶었다. 이렇게 하니 나온 배는 들어가고 허리가 보여서 더욱 건강하게 보이게 되었다. 몸이 가벼우니 일상 생활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5. 백두대간 단독 종주를 했다. 

35년 전에는 선배들이 했던 구간을 이어 가며 일부구간만을 했는데 이번 10년 동안에는 혼자서 구간을 몇 개로 나눠서 시간 날 때 마다 전체 백두대간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종주를 통해서 땀의 소중함을 알았고, 노력의 대가도 알게 되었다.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잘 참고 이겨내는 슬기로움을 자연에서 배웠다. 사실 체력적으로 힘은 들었지만, 백두대간을 완성했다는 성취감은 오래도록 남아 있다.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산은 늘 나에게 어머니 품과 같이 포근하며, 평온함과 가득한 사랑으로 다가온다.

 

6. 조그만 흙집을 마련했다. 

어르신들이 살고 있던 집을 사서 약간의 구조 변경을 했다. 마당에는 복수초, 참나리, 채송화도 예쁘게 피어있고, 후원에는 배롱나무가 있고 그 담벼락에는 오죽이 있다. 선비의 채취가 물씬 느껴지는 집이다. 옆에는 20평정도 되는 밭에 상추, 고추, 가지, 부추, 대파 등을 심었다. 무공해, 무 농약으로 내가 키웠기 때문인지 매우 맛이 좋았다.

“대지여 이 씨앗을 품고 잘 자라게 해 주시오. 그대의 싱싱한 피를 조금이나마 나눠주면 좋겠소. 그대의 희생이 만물의 생동감으로 가득 찰 수 있도록 말이오.” 라고 그렇게 햇볕의 고마움과 대지의 사랑스러움이 이 야채를 키워낼 것을 기도했다. 땀의 소중함과 함께 자연의 조화로움이 어우러지는 것을 느꼈다.

 

어느 정도 땅에도 적응하였고 농부로서의 덕도 쌓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마당에 있는 이 꽃에게 참견하고 저 나무에게 참견하면서 하루를 열었다. 따사로운 햇살에 감사할 줄 알고 풀에 맺힌 한 방울의 이슬도 아름답게 여길 줄 아는 풍요로운 삶을 즐기고 있다.

 

새들이 노래한다. 대지가 합창을 한다. 온 만물이 즐거워 춤을 추고 있다. 내가 흔들흔들 흥에 겨워 춤을 춘다. 한 잔의 맛깔난 술에 즐거움이 더한다. 아름다운 세상을 사랑하며,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서 원숙함이 느껴진다.

 

밭 주위에는 누가 농사짓다 놔둔 녹차 밭이 있었는데 풀을 정리하고 나니 나름 차 농사를 할 수 있게 됐다. 찻잎을 따서 직접 볶아서 맛을 보니 기가 막힌다. 차의 맛을 조금씩 알아가는 계기가 됐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초의선사에게 좋은 차를 갖다달라고 떼를 쓰는 장면이 생각났다. 초의선사는 선사상과 다선일미사상으로 집약되는 데, 그의 다선일미 사상은 차를 마시되 법희선열을 맛본다는 것이다. 약간의 차의 맛을 알게 되니 조금은 더 좋은 차를 마시고 싶은 욕구가 내 마음을 요동치게 한다.

 

7. 법학 박사 학위를 2025년 2월 21일에 취득했다. 

 ‘포항시민로스쿨’을 운영하면서 법에 대해 부족함을 많이 느꼈다. 그래서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에 진학하여 법학전문대학장인 오영근 학장님의 지도와 보살핌으로 5년 만에 박사를 취득했다. ‘헌법이 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깊이 공부를 했다. 헌법은 국가의 통치조직과 통치 작용의 기본원리 및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근본 규범이다. 깊이 공부하면서 막연하게 알았던 헌법을 제대로 바라보게 되었으며, 입법추진 등을 하는데도 전문가로서의 자긍심도 높아졌다.

 

8. 색스폰을 배워서 1년 전에 포항문화예술회관에서 협연을 했다. 

나이 들기 전에 악기를 배워보려고 노력을 했다. 12년 전에는 난타를 6개월 정도 배웠는데 나름대로 즐거움은 있었지만 그토록 울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캐니지의 색스폰 연주를 듣고 난후에 그 소리에 매력을 느껴 한 번은 배워야겠다고 다짐했지만 여건이 되지 않아서 미루다 8년 전에 입문을 했다. 처음에는 소리가 나지 않아서 애를 먹었지만, 리듬감은 뛰어나다며 선생님의 칭찬에 흥이 나서 더욱 열심히 했는지도 모르겠다. 조그마한 성취감을 맛보며, 그 소리에 몸을 맡기고, 온몸으로 연주를 했다. 지금은 나에게 또 하나의 기쁨으로 다가온다.

 

9. 우리는 행복하게 지냈다.  

그 전에는 신경질적이던 아내는 이제 많이 웃는 예쁜 나만의 연인이 되었다. 냉전을 보냈던 지난 시절을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 같이 맛있다고 하는 맛 집을 찾아 다녔고. 달빛을 술잔에 담아 우리들의 아름다웠던 신혼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중매로 만난 그녀는 한 달 정도 만난 시점에서 양가 부모님이 결혼 날짜를 잡았다. 회사가 부산 연산동에 있어 신혼을 부산에서 시작했다. 연애 기간이 짧아서 우리들은 동아대 근처에서 밥을 먹고 오락실에도 자주 갔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서로에게 은은한 미소를 보낸다. 손이 귀한 하나 밖에 없는 아들 녀석은 자기가 목표했던 컴퓨터 프로그램 전문가로 다양한 앱을 개발했다. 첫 번째 앱을 개발하고 받은 노력의 대가를 결혼 30주년 기념으로 여행이라도 다녀오라고 우리들에게 선뜻 내놓았다. 지금도 무슨 앱을 개발하는지는 몰라도 참으로 열심이다.

 

체육을 싫어하면서 공부만 하여 걱정 아닌 걱정을 하게 한 아이다. 삐뚤어지지 않고 건강하게 잘 자라주어서 나에게는 늘 고마운 존재다. 이제 하나의 사회인이 되어 자신만의 꿈을 향해 도전하는 거침없는 존재가 되었다. 자신의 삶에 충실한 모습을 보니 기특하고 대견하다. 그의 앞날이 기대되는 이유다.

 

10. 자유여행가가 되었다.    

‘우리들이 걸어가는 길 위에서의 기쁨’을 출간하고 나서 정치인이 아닌 자유 여행가로 불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여행을 통해 인생의 환희와 격정을 느끼는 나로서는 감사할 따름이다. 두 달에 한번 정도는 정치인이 아닌 자유 여행가로써 강연할 기회도 가졌다. 우리들은 늘 길 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으며, 길 위에서 일어나는 많은 에피소드가 있다. 내가 길 위에서 느낀 감정들을 쏟아냈다. 예상외로 반응이 뜨겁다. 우리들 누구에게나 겪을 수 있는 일들을 글로 표현했을 따름인데 읽는 독자에게는 공감이 되었던 모양이다.

 

우리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길을 만나고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 혹자는 “선택이 인생을 좌우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이 어떤 길을 선택해도 그 길 위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최선을 다한다면 그 길이 자신의 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상의 선택은 없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 최상인 것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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