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이의 10대 풍광>

삼나무향과 방금 내린 커피향이 어우러진 나의 작업실에 따스한 햇살이 내린다.

이른 아침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마시는 커피는 나의 마음과 정신을 조용히 흔들어 깨운다

데미타세가 아닌 내가 직접 빚고 만든 작은 종지 속의 룽고는 그 빛이 깊고 그윽하다

단풍이 아직 내려오지 않은 바닷가지만 이미 가을은 나의 생활 곳곳에 자리를 잡았다.

10년전 북한강이 보이는 펜션에서의 소박한 아침 식사가 떠오른다.

이젠 우리 가족의 주식이 되어버린 야채전골을 제대로 맛본 날이다.

건강한 아침 식사후 적어내려간 그곳에서의 꿈들을 다시 끄집어 내어 떠올려 보면 기분이 좋다.

경복궁 앞에 혼자 서서 떨어진 은행냄새에 미간을 찌뿌리며 지나간 회사 동료와 수다를 떨던 나의 모습과 이틀밤을 지낸 후 맑아진 나의 얼굴이 비교가 되며 내 머리를 스친다.

틀과 남의 시선 속에서 진정한 내 모습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던 그 시간과 이별을 고하고 나는 천천히 10년이라는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풍광1.

나는 한국이라는 땅에서 진정한 롤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디자이너를 만나지 못했다.

앙드레 김과 같은 소수만을 위한 옷보다는 다 같이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고 옷을 넘어 다양한 생활용품까지 영역을 넓히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디자이너를 뛰어 넘어 마케터를 거쳐 브랜드 매니져가 되는 과정이 필요했고, 공부가 시작되었다. 나의 2번째 대학원 시간이 계속되는 동안 나는 육아와 직장, 아내와 며느리 , 딸의 역할을 함께 병행해야 했다. 남편은 이미 내가 걸어갈 길을 걷고 있었고 마치 에베레스트를 올라가고 있는 나에게 셀파와 같이 도움을 주었다.

2013년 나이 마흔에 다시 시작한 학문은 단순한 학위를 따기 위한 대상이 아니었다. 마치 늦게나마 다시 만나게 된 어렸을 때 친구처럼 정겹고 눈물나는 존재였다. 즐기면서 보게된 전문 서적들과, 함께 밤을 지새우며 얘기했던 동료들과의 시간들이 지금 생각해도 가슴 뭉클하다.

풍광2.

학업과 병행했던 나의 첫번 째 런칭 브랜드는 해외 진출을 모색해야 했다. 다양한 시장조사와 전략들로 어디를 내 놓아도 두렵지 않았다. 나는 브랜드 PR을 위한 선발대가 되어 중국 및 동남 아시아 시장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동안 열심히 갈고 닦았던 영어가 내입에서 나와 생각도 피부색도 다른 그들의 마음속으로 전달되고 있었다. 디자이너 출신이라는 나의 전직을 살려 훨씬 실감나는 프리젠테이션이 펼쳐졌고 그들에게 우리가 만들어낸 브랜드를 알리고 계약을 하는 작업들은 너무나 멋지고 신나는 일이었다.

풍광3.

좋은 동료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정리하고 나는 나의 자리를 떠났다. 이제 내 영혼이 깃든 나만의 왕국을 만들기 시작했다. 3 여년 동안 다듬었던 나의 분신들은 이제 세상에 첫 발을 디딜 것이다. 그동안 배워왔던 도자기와 천연염색 제품들이 서양의 니트라는 친구와 만나서 새로운 아이템으로 탄생했다. 편안하고 늘 보아왔던 우리의 것과 친숙한 소재들을 연결해 내 놓은 제품들은 매니아들 사이에서 입 소문을 타고 있다. 블로거와 팔로워들을 통해 테스트를 하고 새롭고 좋은 의견들을 다시 적용하는 시간들을 거치는 동안의 시간과 ,진정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을 위한 제품을 만들고 나누는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풍광4.

1996년에 디자이너라는 명함으로 패션이라는 세상에 발을 내딛은지 20년이 되던 해에 나의 첫 번째 에세이가 출간되었다. 블로거를 통해 전달했던 패션에 대한 나의 생각들을 하나하나 모아 작고 가볍지만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내용들을 담아 용기 내어 출판했다. 나는 항상 처음이 어렵지, 일단 시작하고 나면 꽤 멋지게 사고치는 성격이다. 그 후 2년에 한권 씩 내기로 했던 계획에 맞춰 올해에도 한 권의 책을 마무리하고 출판사에 넘긴 상태다.

원고를 탈고 한 후 마시는 커피는 너무나 감미롭고 맛있다.

풍광5.

나는 이제 스타다. 패션을 통해 만나게 된 많은 친구들과 겉멋이 아닌 진정한 내면의 향기로 대화를 나누고 항상 즐거운 상상을 하는 공간을 만들어 온지 벌써 7년째.

우리는 마치 심마니처럼 멋진 소재와 귀인들을 찾아내고 상품화하는 작업을 즐겼다. 자연속에서 낚시질하고 있던 강태공을 찾아내고 함께 공유하면서 마케팅작업을 거쳐, 우리가 만든 새로운 시장에 내 놓는 일련의 과정들은 우리 모두를 1인 기업으로 만드는 연습문제와 같았다. 애플이 만들어낸 앱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만났을 때의 충격이 사라지고 이젠 소셜 미디어로 전세계와 이웃이 된 세상에서 나 역시 마음과 뜻을 같이 하는 친구들을 만났고, 내가 스타라고 믿듯이 내 친구들 역시 살아있음을 느끼고 행복해 하고 있다. 항상 모니터 안에서 만났던 전 세계의 친구들과 1년에 한번씩 만나기로 했고 올해는 이집트에서 저녁을 먹었다.

풍광6.

이제 13살 9살이 된 두 아이는 이제 베트남에 있다. 둘째 아이는 내가 한창 일과 공부에 맛을 들이고 열심히 해야 했던 시기에 갖게 되어 너무나 미안하고 반면에 너무나 감사한 존재다. 처음 결혼을 하고 아이 갖기를 원치 않았던 남편에게 첫아이의 임신 소식을 알리기 전에 나는 하늘에서 내리는 첫눈을 맞고 있었다. 산부인과 현관 문 앞에서 이쁘게 내리던 그 눈처럼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나의 첫아이를 받아 들고 우리는 둘째를 기약했다. 함께 하는 두 아이가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며 크는 모습에서 우리 부부도 많은 것을 느끼고 또 배운다.

풍광7.

해외지사에 근무하게 되면서 나의 오랜 숙원이었던 외국에서의 일상이 시작되었다. 이제는 외국이냐 한국이냐는 의미가 없어졌지만 이 계획을 세울 때 까지만 해도 연로하신 부모님과 애들 생각에 여러 번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세상 저 끝에 가도 서로에 대해 안부를 물을 뿐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정신력과 가치관이 형성되었다. 각자의 일에 충실하면서 서로에게 자극이 되는 우리 가족이 자랑스럽다. 아직 어려서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둘째에게 조금 미안하긴 하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서로를 아끼고,, 또 마음 깊이 사랑한다..

풍광8.

2015년 결혼 10주년에 우리는 벼르던 유럽 베낭 여행을 다녀왔다.

이것은 우리들의 사업을 시작하는 기념여행이자 여행의 시작을 의미하는 첫 번째 결혼기념여행이었다.

베낭 여행을 2번 다녀왔고 출장의 경험은 많았지만 남편과 함께하는 여행은 별로 기회가 없었다

남편은 여행의 참맛을 모르고 살았다. 베낭 여행 이후 남편은 변했다. 이제는 너무 자주 가방을 싸서 조금 귀찮다. 나는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했던 행복한 추억을 먹고 산다.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밤하늘의 별을 보는 시간,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법, 낯선 곳에서 만드는 재미있는 추억들로 우리들의 기억이라는 앨범을 가득 채우고 있다.

풍광9.

엄마와 함께 긴여행을 다녀왔다.

엄마의 가슴 속 멍을 다 지워드릴 수는 없지만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가 이제는 우리들이 사랑하고 영원히 함께 할 것임을 알아 주셨으면 좋겠다.

풍광10.

해운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달맞이 언덕에 나의 작업공간을 마련했다.

바다에서 자란 나는 일렁이는 바다를 보면 항상 즐겁고 행복하다.

이곳에서 나는 글도 쓰고 머리를 비운다.

이곳의 이름은 ‘혜성정’이다. ‘혜성’은 나의 호다

이곳에서 나는 바다를 밝히는 따뜻한 별이 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