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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 인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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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 9일 10시 02분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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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아침부터 술에 좀 취했습니다. 사실은 어제 밤 늦게까지 마신 술이 덜 깬 것이지만 말입니다. 오늘부터는 고도를 기다리는 이야기 따위는 그만두고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리라 마음 먹었는데, 글쎄, 밤 늦게까지 한잔 더 하자고 계속 저를 붙잡았던 이과장이 이야기를 듣다말고 전철을 갈아타겠다고 아카사카 미츠케 역에서 그만 내려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바람에 하다말고 중간에 덩그라니 남아버린 이야기를 여러분께라도 털어놓을까 합니다.


사실 허접하기 그지 없는 이야기입니만, 제가 고등학교 때 휴학을 했을 때의 일입니다. 뭐, 신상에 큰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고, 굳이 비유를 들자면 생쥐가 뱀을 만나면 온 몸이 굳어서 그 자리에 멈춰버리는 것과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합니다. 한 2년동안 공부를 안했는데, 막상 3학년이 되려니 그게 두려웠나 봅니다. 온갖 똥고집을 부려 1년을 쉬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학교까지 쉬고 공부를 하겠다던 녀석이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기 시작하니 굳었던 몸도 조금씩 풀리고 콧구멍도 벌렁거리지 뭡니까. 그래서 백수로 지내던 동네 친구 한명과 무작정 여행을 떠났습니다.   


미처 일주일도 가지 못했던 가출의 개요는 대강 이랬습니다. 우린 젊었고, 날씨는 화창하고, 정해진 갈 곳은 없었고, 무엇 때문인지, 강도 보고 싶고, 바다도 보고 싶고, 산도 보고 싶어서였는지, 무작정 떠오르는대로 돌아다녔던 것인지 여하튼 진주와 부산을 들렀다, 하동을 향했습니다. 스쳐가는 버스 창 밖으로 배꽃이 한창이었니 아마도 4월 중순 쯤이었나 봅니다. 무모하게 준비도 없이 지리산을 오르다가 얼마 오르지도 못하고 뻗어버려서 물만 마시고 하산했습니다. 겨우 히치하이킹을 했지만 ‘젊은 녀석들이 학교는 안가고 어딜 돌아다니냐’는 알량한 훈계만 잔뜩 듣고 내린 그곳에서부터 우리는 걷기 시작했습니다. 봄 볕에도 달아오른 아스팔트는 뜨거웠고, 겨우 만난 구멍가게에서 하드를 하나씩 베어물고는 계속 걸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러다 만난 섬진강 가의 모래밭이 너무 좋아서 그 곳에서 저녁이 될 때까지 머물렀었는데, 정작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 여행의 초라한 엔딩입니다.  그 이후로 하루나 이틀이 더 지난 뒤, 돈도 거의 다 떨어졌고 지치기도 해서 저는 남은 여비의 일부를 친구에게 받아서는 혼자 집으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지금도 떠오르는 건 제가 통영으로 가는 버스 안에 앉아 있을 때 차창 밖으로 내다 보였던 친구의 표정입니다. 그 때엔 미처 몰랐지만 어쩌면 저는 돌아갈 곳이 있었고 그 애는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봄날, 아직 채 스무살도 안 된 제가 왜 그렇게 잔뜩 늙어버린 것처럼 부끄럽던지요.


그래, 비겁했구나, 혼잣말을 하며 술에 취해 비틀비틀 걸어오는데 돌아오는 골목에는 밤꽃 향기가 가득하고, 뭔가 헛구역질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침대에 누워서 한찬 뒤척이다 겨우 잠들었는데 그만 일찍 눈이 떠져 이렇게 취중에 횡설수설을 늘어놓습니다. 아, 위의 사진은 지난 주말 요코하마의 어느 여객선 터미널에서의 저녁 풍경입니다. 잘 산다는 것은 저렇게 해가 지고 달이 뜨는 풍경을 가만히 앉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갖는 것일텐데, 떠나고 싶을 때 저 큰 배로 타고 어딘가로 훌쩍 떠날 수 있는 자유를 갖는 것일텐데,  그게 왜 이렇게 어렵고 사치스러운 일이 되어야하는지요. 생각할수록 산다는 게 치사해서, 기필코 잘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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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09, 2012 *.10.140.105

저도 나이가 들어 갈수록 비겁했던 시절의 모습이 떠오르네요.

 

어디론가 자꾸 도망가려고 하지만 도망가지도 못하고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지요.

 

술 힘을 빌어서라도 기필코  잘 사시길...

 

꼭 그렇게 되길 바랄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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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10, 2012 *.229.131.221

술 힘을 빌어서라도 ^^;;

너무 비장해서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햇빛처럼 님도 잘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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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10, 2012 *.166.205.132

인센토님과 이자카야에서 한 잔 하고 싶네요~^^

제가 1차 후에 도망가겠습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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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10, 2012 *.229.131.221

아, 이과장님은 2차 후에 도망갔어요. ^^

양갱님과의 한 잔은 아마도 한국에서가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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