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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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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3일 13시 10분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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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 구미 선산, 성심요양원 / 첫 번째 개인전 포스터 컷입니다. 8년 여 이곳을 다녔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게 될 것입니다.]



흑백사진


흑백작업만 한지 십수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작년부터 조그만 디지털 카메라도 함께 사용하는데 이 녀석조차 흑백만 찍을 수 있게 셋팅했습니다. 아직까지 필름으로 사진을 찍고 하필이면 또 흑백만 찍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어떤 ‘끌림’이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1 복고주의

원형을 찾고자 하는 본능의 작동입니다. 사라져갈…잊혀져 가는 것들에 대한 오마주입니다. 태생적으로 오감을 통해 느끼고 반응하는 유전자가 발달한 탓입니다. 디지털이 주는 가벼움, 차가움, 얄밉도록 깔끔하고 편하고 빠른 속성들이 견딜 수 없었습니다. 느끼고 생각하고 틀리기도 하고 그래서 다시 하기도 해야하는데 디지털의 속도와 편리는 나의 그것과 맞지 않았습니다. 충만이 아니라 소모였습니다. 손 글씨 맛과 타이핑 맛의 차이 정도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필름에는 실수와 잘못의 흔적이 그대로 남습니다. 수정되지 않습니다. 돌이킬 수 없습니다. 심지어 필름을 장전하여 대기 상태에 두기 위해 공셔터를 날린 흔적까지 고스란히 남습니다. 이런 속성들은 마치 영혼에 각인되듯 제게 아주 강한 느낌으로 작동합니다. 특히 프린트를 만나는 순간은 오르가즘입니다.



#2 역설

저는 색에 민감합니다. 아주 민감한 편에 속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색이 어렵습니다. 눈으로 인식하는 만큼 손발이 따라주지 못합니다. 괴리가 큰 편입니다. 여기서 고통이 잉태되는데요. 그래서 색깔이 빠진 곳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단순하고 간편할 줄 알았던 세상이 형형색색의 세상만큼이나 심지어는 그 보다 더 풍부하고 깊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그라데이션과 톤으로 이루어지는 흑과 백의 세상은 무궁하고 무진한 것이었습니다. 호랑이 피하려다가 곰을 만났습니다. 때문에 더욱 빠지게 된 것은 역설입니다. 여담입니다만 제대로 된 흑백이미지를  만들려면 칼라사진과 비교하여 기술적으로도 더 어렵고(아직은) 비용적으로도 훨씬 많이(수요가 많지 않기도) 들어요.



#3 홍시맛이 나서 홍시라 한 것이온데.

“홍시맛이 나서 홍시라 했는데, 왜 홍시라고 생각했느냐 하시면, 그냥 홍시맛이 나서 홍시라 한 것이온데…” 이 말은 어린 장금이의 명대사입니다. 왜 흑백을 하냐고 물으시면 “좋아서”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왜 좋으냐고 물으시면 좋아서 좋다고 한 것이온데 왜 좋으냐고 물으시면…그냥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하다 보니 계속하게 되었고 ,오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불편해도 좋고, 비용이 몇 배가 더 들어도 좋고, 환경이 어려워도 좋고, 시간이 몇 배가 더 들어도 좋습니다. 좋아서 한 것입니다. 



#4 절제

다 할 수 없어서입니다.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것 다 할 수 없었습니다. 선택과 집중입니다. 칼라, 흑백, 디지털 다 할 수 없었습니다. 시간도 돈도 에너지도 한정된 것입니다. 제가 가진 자원으로 다 즐길 수는 없었습니다. 다 잘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땡기는 것, 더 잘할 수 있는 것을 우선 열심히 한 것입니다. 그러다 한계에 닿았습니다. 먹고사는 것과 즐기는 것 사이의 경계를 만난 것인데요. 삶을 바꾸거나 이쯤에서 만족하거나 선택해야 했습니다. 취미에 머물기로 했습니다. 가늘고 길게 계속할 수 있는 쪽으로 선택했습니다. 위험이 적은 쪽이었습니다.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 늘 아쉽습니다. 절제가 미덕이기도 하지만 성장을 막기도 합니다.



#5 차별화

제가 사진을 알게된 1990년대 말쯤만 하더라도 디지털은 겨우 여명의 시기였습니다. 지금 필름을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처럼 그때는 디지털이 그랬습니다. 저는 아나로그의 종말과 디지털의 개벽을 함께한 유일한 세대가 되었습니다. 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법 급격한 세상의 변화를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특별함을 추구하는 성향은 얼리어뎁터적 요소를 만나면서 폭발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핸드폰 카메라보다도 못한 성능의 카메라를 중고차 한 대 값으로 구입해서 사용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즐겼습니다. 그런데 이런 즐거움은 얼마가지 못했어요. 불과 몇년 만에 많은 사람들의 목에는 DSLR이라고 하는 새로운 아이콘이 주렁주렁 걸렸습니다. 이제 더이상 디지털은 특별한 장난감이 아니었습니다. 전 특별함을 찾아서 다시 아나로그로 돌아왔습니다. 잘한 일입니다. 제 아이들은 지구별에서 마지막으로 흑백필름에 담긴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드디스크 속에서 데이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필름이라는 물질과 종이에 노광된 실체로 존재합니다.   



#6 책임

저는 아나로그 향수가 있는 마지막 세대입니다. 가난했던 아버지는 카메라를 살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몇 장 남은 어렸을 적 사진들이 대부분 사진관에서 찍은 것들입니다. 그 가운데 두어장은 누군가가 스냅으로 찍어준 것 같은데 사진관 사진들보다 보기에 좋습니다. 살짝 감동적이기도 … 제가 아이들 기록에 집착하는 것은 제 어린시절의 보상인지도 모릅니다. 가족들끼리 소풍이나 여행이라도 갈때면 동네 사진관에서 작은 카메라를 빌렸습니다. 사진관에서 빌려주는 것은 대부분 ‘하프카메라’ 였는데 필름 한 컷에 두장씩 찍을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카메라가 ‘OLYMPUS PEN EE-3’라는 것인데 요즘엔 디지털로 디자인이 복각되어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추억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추억을 매개하는 문명이 있기 마련인데요. 기계식 카메라와 필름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나로그 시대의 마지막 세대인 저게는 찬란한 유산을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옛날 카메라들이 정말 잘 만들었어요. 장난감을 좋아하는 남자어른에게는 헤어날 수 없는 매력덩어리들입니다.


세상은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글로 이미지로 담아내는 일은 숙명과도 같습니다. 사진과 만나면서 얻은 성찰과 통찰들은 삶 전체로 녹아들었으며, 연구원 과정과 글쓰기에도 그대로 오버랩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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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 05, 2015 *.37.122.78

음~ 그동안 쌓아오신 이야기가 기대됩니다!

사진과 그에 대한 생각들.

저또한 관심이 많은 분야라 잘 보고 잘 읽고 있습니다.

 

전 DSLR로 시작했으니 흑백에 대한 욕구가 없었는데

글을 읽고 흑백으로 시작했으면 더욱 좋았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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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 24, 2015 *.243.91.165

생각...

글...

느낌...

 

다시 생각...

그리고 나에게 전달된 느낌...

 

이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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