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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3일 22시 26분 등록


아버지의 그늘

 

신경림

 

 

툭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널브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고

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지만,

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값싼 향수내가 나는 싫었다

아버지는 종종 장바닥에서

품삯을 못 받은 광부들한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그들과 어울려 핫바지춤을 추기도 했다,

빚 받으러 와 사랑방에 죽치고 앉아 내게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화약장수도 있었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

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오히려 장하다 했고

나는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나이를 넘었지만,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를

가엾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당당하고 떳떳했는데 문득

거울을 쳐다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

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호기 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

그 거울 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 소리 한번 못 치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

 

 

-----

큰오빠가 아는 삼십 대의 아버지는 집안에선 파장파장했고 어딜 가나 한자리 차지하여 좌중을 집중시키는 분이셨다. 내가 만난 오십 대의 아버지는 어린 딸을 위해 꿀물을 끓일 정도로 잔정을 비치시고 술자리도 눈물도 많으셨다. 오빠들은 아버지와 반대로 술을 마시지 않았고 엄마에게 술 먹는 사윗감은 불합격 1순위였다.

나에게 아버지는 칭찬덩어리다. 그 산골짜기에서 나온 우리가 뭐 잘난 것 있다고 버스에서 만나든 길가에서 만나든 항상 우리 딸이 최고다! 우리 딸이 젤 훤하다!고 엄지손가락을 올리셨다. 취중이었고 그땐 창피해 고개도 못들었으나 알게모르게 골수에 스며들었나보다. 나는 지금도 그 칭찬으로 산다. 착한 셋째 딸이라고 예뻐하셨음에도 어떤 언지도 없이 떠나신 아버지는 어느날 하얀 두루마기 한복을 정갈하게 입고 우리집 대문 앞에서 나를 부르셨다. 그렇다. 이제 속상하게 했던 아버지는 간데 없고 근엄하지만 인자하신 선비 아버지만 남아있다. 사라진 뒤에 남는 것, 그것이 진실이다


울그이는 추석을 앞두고 아버지의 그늘과 술 한 잔 하고 있다. 내가 보기엔 다른 듯 닮았는데 본인은 부정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는 둘만이 아는 깊고 깊은 애증. 나는 다만 술잔만 부딪혀 줄뿐.



IP *.232.4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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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5 23:20:45 *.10.141.91

춘희야?

.

제주도 가냐?

골새앙바드레는 ?

 

어디를 가든지 아버지의 칭찬으로 그렇게 힘차게 살 수 있었구나..

프로필 이미지
2014.09.12 00:44:02 *.232.42.103

햇빛오빠, 추석 잘 보냈어? 덕분에 난 일주일동안 시댁에서 쉬다 오늘왔어.ㅎ

바드레는 두 분 기일때만 가. 

고향에 갔었겠네. 부럽! 제주도 아무리 좋아도 내 고향만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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