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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8월 27일 23시 06분 등록


흰 바람벽이 있어

             

 백 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낡은 무명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 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 '도연명'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바람벽 : 집안의 안벽

때글은 : 오래도록 땀과 때에

절은 쉬이고 : 잠시 머무르게 하고, 쉬게하고

앞대 : 평안도를 벗어난 남쪽지방, 멀리 해변가

개포 :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

이즈막하야 : 시간이 그리 많이 흐르지 않은, 이슥한 시간이 되어서

 

 


------

모든 시가 그렇지만 이 시집 어렵다.

처음 이 시집을 보았을 때도 그랬다. 요즘 쓰지 않는 표현들 때문에 쉽게 읽히지 않는 탓일까?

 

작은 방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그를 떠올려본다.

달디단 감주는 엄마가 되고 엄마는 여자, 여자는 곧 옛 사랑의 여인으로 이어지고...

엄마가 만들어준 감주만 먹었어도 외롭고 쓸쓸하지 않았을 터인데...

 

엄마가 문제다. 행복의 원천이자 죄송하고 안쓰러운 존재. 엄마!!

엄마를 떠나는 순간 누구나 외롭고 쓸쓸한 존재.

엄마가 하늘로 가시면 더욱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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