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중독의 백신은 품위 있는 가난


TV도 없었고 라디오도 변변한 것이 없었던 배고픈 시절이었지만 구슬치기, 비석치기, 자치기, 딱지치기, 팽이치기, 술래잡기, 땅따먹기, 고누, 연날리기, 제기차기, 다방구, 동서남북, 얼음땡,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등 열거하기도 벅찰 만큼 참으로 놀이도 많았다. 여자아이들은 찰고무와 같은 놀라운 유연성으로 고무줄 놀이에 열중하기도 하였다. 골목과 공터는 노는 아이들의 차지였다. 모든 놀이는 나름대로의 규칙을 지니고 있는 법, 노는 아이들은 놀이의 규칙을 지켜야만 했고, 양편으로 나누어서 노는 놀이에 있어서는 우리편끼리의 협동을 배워야 했다. 놀이가 시들해지면 아이들은 또 다른 규칙을 놀이에 부가해가며 놀이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아이들은 결코 놀이에 진력을 내지 않았다. 규칙을 지키지 않는 아이들은 또래집단에서 소외되어야 했다. 논다는 것은 곧 규칙의 준수를 의미했다. 소나기가 내려도 아이들은 즐거웠다. 겨울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키운 건 ‘8 할이 바람’이었고 ‘2 할’은 놀이었다. 뛰고 소리지르고 노래하면서 아이들은 궁핍의 한 시절을 수월하게 건너뛰었다. 놀이를 기억한다는 것은 친구를 기억하는 일이요, 지나가 버린 황금의 한 시절을 떠올리는 일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골목과 공터에서 노는 아이들이 사라져갔다. 놀이의 장소로부터 아이들을 데려간 것은 ＴＶ와 컴퓨터였다. 아이들은 무서운 속도로 시각문화에 익숙해져 갔다. 몇 해전 한국청소년상담원이 전국 초.중.고교생 1천564명을 대상으로 컴퓨터 중독 실태와 중독 유형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응답자의 29.3%가 중독 경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의 인터넷의 엄청난 보급속도를 감안한다면 지금쯤 이 수치도 꽤 높아졌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플러그를 뽑아라>라는 말처럼 엄청난 형벌은 없을 것이다. 플러그를 뽑는다는 것은 모든 전자문화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실제로 아이들은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고 공황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플러그를 뽑으라면 아이들은 이내 휴대폰에 매달린다.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영상을 주고받는 아이들에겐 휴대폰의 부재는 곧 불안을 유발한다. 소위 ‘폰중독’이 그것. 이런 중독증이 아직 직업을 가지지 못한 청년층의 대량 신용불량을 야기할지라도 자본가에겐 일단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아이들은 타인의 정체성을 어떤 기기(機器)를 소유하고 있느냐로 냉정하게 판단한다. 수단이었던 기기는 이제 자아의 확장이 되어 버렸다. 모바일폰의 소지자는 이제 첨단의 비지니즈맨이라는 정체성을 부여받고, 소위 ‘냉장고’라 일컬어지는 묵직한 구형 핸드폰의 소지자는 시대에 뒤떨어진 케케묵은 자로 낙인찍힌다.

조금이라도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선 아이들은 열심히 구매해야 한다. 어른이라고 해서 크게 사정은 나아질 것도 없지만 유행의 민감성에서는 아이들을 따라갈 수가 없다. 유행에 뒤쳐지는 것, 구형의 핸드폰을 소지하는 것, 한물간 패션을 걸치고 있는 것만큼 수치스러운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에게 구매는 종교 이상의 것이다. 『어플루엔자』(존 더 그라프 외 지음,박웅희 옮김,한숲,)에 의하면 미국의 십대 소녀의 93프로가 가장 좋아하는 활동으로 쇼핑을 꼽았다고 한다. 이 책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미국 청소년들이 상업적 메시지에 노출되는 시간은 48시간이나 되는데 반해서 부모와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고작 1주 1시간 반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런 사정을 감안한다면 요즘의 미국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8 할이 상업 광고’라고 해도 크게 틀릴 것 같지는 않다.

광고는 끊임없이 물질을 통해 비물질적인 것을 달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소비를 통해 명예와 교양과 긍지와 품위를 달성할 수 있다고 광고는 말한다. 그 어투는 한없이 세련되었다. 이제 ‘이쁜이 비누’, ‘호랑이표 슈즈’의 촌스러운 시대는 갔다. 사랑받는 자, 인정받는 자는 그 나름대로의 독특하고 세련된 구매 패턴을 가진 자이어야 한다는 것이 광고의 어법이다. 인간의 교양과 품위란 것은 물질로서는 환원되어져 이해되어서는 곤란하다라고 말하는 인문주의자의 논리를 깔끔하게 비웃을 수 있는 곳에서만 자본주의의 꽃은 광고라는 말이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버튼만 누르면 쏟아지는 광고의 엄청난 물량공세 앞에서 법정(法頂)의 <무소유>도 노자의 <무위의 철학>도 말 그대로 무위로 그칠 공산이 크다. 『어플루엔자』가 소개하는 마이클 제이콥스의 구상,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달만한 크기로 로고를 투영할 광고판을 우주에 설치한다‘에 이르고 보면 어안이 벙벙해질 따름이다. 그러나 자본의 욕망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자본에 의해 꿈은 현실이 되고 현실은 다시 커다란 결핍이 되어 또 다른 꿈을 꾸게 된다. 거기엔 완전한 충족은 없다. 끊임없는 결핍의 감정과 채움에의 욕망이 있을 뿐.

어플루엔자(affluenza)는 풍요를 뜻하는 어플루언스(affluence)와 유행성 독감을 지칭하는 인플루엔자(influenza)가 합성된 일종의 신조어다. 어플루엔자는 물질을 비정상적으로 소비하는 병을 일으키는 원인 바이러스로 볼 수 있다. 광적인 쇼핑 열기가 그 대표적 증상이다. 『어플루엔자』의 저자는 미국인들은 현재 한 주에 6시간을 쇼핑에 할애하면서도 아이들과는 40분밖에 놀아주지 않는 ‘삶의 혼돈’ 상태에 빠져 있다고 지적한다. 『어플루엔자』가 고발하는 미국인들의 소비 행태는 상상을 초월한다. 세계 인구의 5%인 미국은 세계 자원의 25%를 소비하고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온실가스를 25%나 배출한다고 한다. 이 책은 만약 세계인들이 미국인들처럼 소비한다면 지구가 5개가 필요할 만큼 어플루엔자의 파괴력은 대단하다고 전한다. 더구나 미국인들이 쓰레기봉투 구입에 쓰는 돈이 세계 90개국의 지출총액보다 많을 정도라고 한다. 미네소타주 블루밍턴에 있는 미국 최대의 쇼핑센터 '몰 오브 아메리카'는 매장면적이 39만㎡,풋볼 경기장 78개에 해당하는 규모에 근무인원이 1만명이요, 매년 4천만명이 이 쇼핑센터를 이용한다고 하니 미국인들의 쇼핑 열기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이런 쇼핑 열기로 인한 파산자의 속출은 불을 보듯 뻔한 일. 2000년 한해 동안 미국의 가계들은 평군 7천5백64달러의 빚을 졌다고 한다. 빈부격차도 심해져 쇼핑센터에는 물건이 넘쳐나지만 매일 1천만명이 굶주리고, 매일 밤 75만명이 길에서 노숙하지만 집을 2채 가진 미국인은 9백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어플루엔자로 인한 환경의 파괴도 심각하다. 이 책의 저자들은 컴퓨터 한 대를 살 때, 그 안에 전 세계의 광산과 유전과 화학 공장에서 모아들인 700가지가 넘는 재료들이 그 안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다고 불평한다. 컴퓨터 한 대의 제조 과정에서 64킬로그램의 위험한 고형 폐기물과 7천 갤런의 폐수가 소비된다고 한다. 이 책의 저자들은 한결같이 상품만을 보지말고 그 상품에 딸려있을 자원의 죽음을 보라고 말한다. 이 책은 말한다. ‘우리는 재료를 채취할 때 대체되거나 파괴되는 식물과 동물, 심지어 인간문화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제, 노먼 마이어스와 윌슨과 같은 생물학자들이 6,500만년 전 공룡의 멸종 이후 가장 심각한 멸종 사태를 맞고 있다고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마침내 부정을 넘어 행동을 한다. 멸종은 자연적인 속도보다 1,000배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어플루엔자의 피해는 물질적인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명예 학위를 받기 위해 미국에 온 테레사 수녀는 “이 나라는 내가 가본 나라들 중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영혼의 상실, 삶의 의미의 상실은 어플루엔자의 가장 큰 해독인지도 모른다. 정신의 빈곤이 초래한 미국의 범죄율 또한 놀라울 정도. ‘미국은 200만명의 국민을 교도소에 가두었다. 이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높은 비율이고, 다른 산업국가들보다는 10배나 높다. 캘리포니아 한 주만 해도, 프랑스. 독일, 영국, 일본, 싱가포르, 네덜란드를 합친 것보다 많은 사람을 가두어 두고 있다’고 저자들은 고발한다. 또한 공동체의 파괴 또한 심각한 문제라고 이 책은 진단한다. 전국적인 체인망이 들어서면서 지역사회에 끈을 대고 있는 중소규모의 기업들이 몰락하면서, 지역사회의 조직들의 전통적인 시민지도자가 사라졌고, 이에 따라 지역적 특성과 문화도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는 것이다. 동네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은 사라지고, 사설경비업체와 치안산업은 활황이다. 사람들이 공유하는 것이 적어져 고립감이 심화될수록 소비는 극단으로 치닫게 된다.

저자들은 어플루엔자를 이겨낸 사람들의 성공적 투병기를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단순하게 살아라, 광고가 만들어낸 거짓 욕구를 버려라, 자연을 접하라, 친환경제품을 사용하라, 협력적 이웃을 건설하라는 등의 치료법을 제시한다. 물론 치료의 가장 핵심은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최근 세계적으로 화두가 되고 있는 ‘단순하게 살기’, ‘느리게 살기’, ‘본질로의 회귀’ 등의 움직임이 그것일 것이다. 얼마전까지 법정의 『무소유』가 빅히트를 치더니 이젠 그것도 모자라 우리의 출판계는 틱낫한에게까지 손길을 뻗치고 있다. 『화』, 『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외에도 10여종 이상의 책들이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책들이 팔려나가 우리시대의 물질주의가 조금이라도 극복된다면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런 책들의 활황도 좋지만 격월간 생태잡지 『녹색평론』이 지금보다 더 많이 팔리기를 기대해본다. 대학생들이 책 모양이 맘에 들지 않아 외면한다는『녹색평론』은 갱지로 만들어진 책이다. 지구의 자원을 마음껏 약탈한 결과로서 화려하기 그지없는 패션잡지에 비해서 그 외양은 투박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 책이 전하는 느낌의 무게는 자못 크다.

『녹색평론』2003년 1, 2월호에서의 발행인 김종철의 발간사는 문제의 정곡을 찌른다.(감히 말하건대 김종철은 우리 시대의 희박한 공기다. 흙으로 돌아가야 된다, 농촌을 일으켜야 된다, 다소 비현실적인 구호를 들고나오는 그이지만 정작 병들어가고 있는 지구는 어쩜 김종철 같은 비현실분자를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 각설하고 김종철의 호소에 귀를 열어보자.


문제는 가난이 아니라, '풍요로운' 소비문화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잊어버릴 때, 우리는 경제성장 없이는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없으리라는 어리석은 착각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박멸해야 할 바이러스처럼 가난을 무조건 혐오해왔다. 그 결과 '품위 있는' 가난과 그 의미에 관한 성숙한 인식은 이 사회에서 극도로 축소되었고, 우리의 삶은 외형적인 풍요에도 불구하고 ― 혹은 그 때문에 ― 내면적으로는 심히 병들고 공허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극적인 것은, 자립적인 생존의 기반이자 도덕적 삶의 원천인 농경문화의 중요성에 대한 감각이 상실되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식량자급률 25% 수준 ― 그나마도 석유에 의존해서 ― 이라는 한심한 농업현실로는 한 사회공동체의 장기적인 존속이 명백히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목전의 이윤추구에 혈안이 되어,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땅을 죽이는 일에 광분하고 있다.


품위 있는 가난. 이제 그것의 의미를 참구(參究)해야 할 때다. 품위 있는 가난, 그것이 나를 살리고, 땅을 살리는 일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