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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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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6일 06시 46분 등록
Well-being


과학적 방법론은 사실 증명에 열광하여 자신이 도구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유용할 인간의 가치를 배제하는 모순에 빠져 버렸다.

과학적 방법론들은 새얼굴과 모습을 들추어 낼 때마다 과학문명이라는 편리와 효율은 더 큰 새로운 불안과 공포를 조성하고 증폭시키는 폭력적인 힘의 근원으로 존재하고 또 진화해 왔다. 과학적인 방법론은 인간을 기계적인 메카니즘의 구조물로 만든 다음 거기에 인공 생명을 불어 넣으려고 하고 있다.
과학이 발견하고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서 발명해 낸 많은 것들은 초기의 발견자나 발명가의 순수한 의도와는 관계없이 확산을 꿈꾸는 자들의 불순한 의도에 의해 변형되고 변질되었다.

문화와 진보라는 튼튼하고 화려한 명분을 내 세우며 의식너머의 것들을 감지하고 행위 할 수 있는 인간 고유의 기능들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정신세계와 자연의 질서를 마비시키고 변형시켜 왔던 것이다.

그 왜곡된 기괴함 속에서 인간을 스스로를 방황하게 하는 증명되는 사실보다 더 큰 그것들에 대한 가치의 파괴와 혼돈을 과학문명은 조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체와 실증 그리고 반복 검증을 통한 인식만을 중시한 과학적인 방법론은 실재(實在)하는 현상 중에 감지되어지고 주의되어져 의식화 된 일부들의 속성을 조잡하게 관계 지어서 불합리하고 온당치 못한 종합선물 세트 같은 세계를 만들어 냈다.

마찬가지로 남여노소 인종과 이념을 초월한 스포츠의 세계에서도 왜 이기려고 했는지, 그렇게 많은 땀을 흘리며 스스로에게 가혹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는지의 의미는 멋지고 화려한 시상식과 조국의 영광과 위대한 인간승리라는 방송용 코멘트로 퇴색되어졌다.
“붉은 악마”나 “한민족” 이라는 ‘악마’나 ‘민족혼’은 오래 시간과 전통을 지녀 온 상징적 ‘선’과 ‘정신’의 의미와 개념마저도 뒤 엎어가며 광기어린 대리만족과 악의에 찬 무분별한 비난 과대한 찬양, 맹목적인 추종을 만들어내고 있다. 도마위로 올려져 난도질당하고 있는 스포츠는 상업적 테크놀로지와 정치적 노리개로서의 극약 처방 같은 대중을 호도하는 도구로 전락해버렸다.

실체로 묘사되어지는 유희로서의 인간의 본질을 사회와 문화의 규범적 가치로 발달시킨 것이 스포츠였다. 그러한 스포츠는 몇몇의 옳지 못한 자들의 손에 쥐여지게 됨으로써 건전한 도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해 가고 있다. 오늘날,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는 스포츠는 상업주의와 부당한 정치적 목적에 따라 불건전한 욕망과 억눌린 내면의 정화되지 않는 분노들을 표출하는 광기어린 제단에 바쳐진 피 흘리는 속죄양 같은 것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스포츠가 필요한 것은 그것이 비록 창시자의 진지한 인간 본질긍정적인 지향과 의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하더라도, 무엇 때문에 죽어야 하고 왜 죽여야 하는지 알지도 못하거나 왜곡되어진 가장된 명분에 따라 삶과 죽음이 결정되어지는 오늘날의 세계 속의 여러 곳곳의 비참한 세계를 놓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첨단과학으로 원격화 되고 자동화되어 있는 살인무기들을 가지고 마치 전자오락 하듯이 죽이고 죽어가는 것 보다는 스포츠로서의 경쟁과 갈등이 백배 천배 낫기 때문이다.

더 자극적이고, 더 욕구 충동적이며, 더 비현실적인 문화 속에 길들여진 과학문명속의 사람들이 꿈꾸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Well-being 이다. 과학문명이 이룩해 왔다고 자부하며 항상 내세우던 사명 같은 명분이 아닌가?
그러나 사람들은 깨달아가고 있다. well-being 은 과학문명이라는 인간의 수단과 방법에 있지 않고 태도와 가치라는 인간 고유의 특별한 기능에 있다는 것에 눈뜨기 시작한 것이다. 태도와 가치가 도구의 적절한 사용과 통제를 가능케 하는 좀 더 수준 높은 도구라는 것은 이제야 겨우 깨닫게 된 것이다.

과학적인 방법론은 가치를 부정하고 사실을 증명하는데 몰두했지만 지난 200년 동안의 과학이 증명한 유일한 진실은 더 불행한 가치를 사실로서 증명해 낸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질서, 즉 well-being의 실현은 회귀 불가능한 과거를 꿈꾸는 어설픈 복고주의가 아니라 과학이란 도구를 보다 더 유용하게 만들 수 있는 도구의 사용자인 인간의 가치와 의미를 과학이 수용함으로써 이루어져야만 한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과학적 방법론이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이었다면 그것이 인간의 가치와 본질의 의미를 다룸에 있어서도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인간과 환경에 관하여 과학이 실체의 집착에서 벗어나 그 연구의 대상을 실재하는 영역으로 확장해 나아가야 한다. 그럼으로써 실재하는 세계의 본질에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더 나노적이고 더 우주적이며 더 미래지향적인 현상 속에 실재하는 인간의 생명과 그 존재의 의미함을 증명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해도 과히 어리석은 판단이나 예측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과학이 인간의 전술적인 행동이 지니고 있는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지각을 허용하여야 하며 가변적인 융통성을 지녀야 한다. 나아가 환원론적인 통계적 분석과 연역적인 정보적 지식의 차원을 넘는 창조적 개방성을 허용할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한다면, 그러한 지혜가 가져다주는 숨겨져 있는 풍부한 배경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Well-being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며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연유에서 스포츠의 세계에서 내가 다루고자 하는 가치와 정신의 영역이 철학적인 상징으로 오해되지 않고 개선되어진 과학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이유이다.

나는 철학적인 관념으로 인식되어져 오던 몇 개의 명제들을 제시한다.
그것들은 현대의 과학적 가설들과 실험들에 의해 충분히 설명되어질 수 있다고 본다.

1. 하나이면서 동시에 전부다.

전술적인 반응으로서의 행동인 임의적인 행위는 개인의 기술적 능력뿐 아니라 경험, 지식, 성격과 가치관 등 개인의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 반영되는 전부속의 하나다. 그것은 항상 가변성을 지니고 있으며 임의적이며 일회적이고 순간적이며 전면적이다.

2. 반응한다. 고로 행위 한다.

행위는 존재를 구체화한다. 생각하기 때문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반응하기 때문에 생각한다. 반응은 인지적 구조의 산물이 아니라 유기체의 기본적 생명유지현상의 기초이며 직접지각(직감)과 간접지각(인지의식적 지각)을 통해 발현한다.

3. 전체가 부분을 결정한다. 부분이 전체를 조정한다.

전체는 부분들 역할을 결정하며 부분의 속성과 관계는 질서로서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 과제목표(task)에 접근하는 전체적 평형상태(equilibrium)는 하나가 아니라 다수다. 그것은 각성 상태에 따라 조정되며 최적상태를 유지한다. 내부구조의 최 빈값이 최적값을 결정한다.
4. 믿는 만큼 행위(behavior)한다.
실재는 보편적 객관성과 관계없이 주관적으로 존재한다. 행위를 결정하는 매개변수의 초기값은 경험과 학습,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기억과 상상을 반영하는 주관적인 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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