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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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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13일 15시 16분 등록

죽음에 대하여

 

가을은 개도 철학하게 만든다고 한다. 지난 가을에 동네 주위의 벚나무에서 낙엽이 이리 저리 길거리를 어지럽히어

마음을 심란하게 해서 가는 세월과 죽음을 생각하다가 시작한 것이 벌써 겨울을 넘기고 새봄이 되었다. 

젊어서는 금방 어떻게 된다고 해도 특별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죽음에 대한 생각이 생활에 끼일 틈이 생길 리 없다.

세월의 중요성을 알게하는 것은 죽음을 생각하는 것외에 무엇이 있을가. 죽음은 깊이 생각할수록 삶이 알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죽음을 어떻게 맞느냐에 따라 삶이 어떠했나를 말해 주기도 한다

삶이 충실해지게 하기 위해서 반복적으로 이에 대한 명상을 하라고 한다.


죽음은 통상적으로 지옥과 천당 내지 극락의 갈림길로 보기도 하고 아니면 연옥으로 안내 되는 길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도 저도 아니면 그냥 죽으면 그만이지  죽으면 완전히 없어지고 소멸되고 만다고 하기도 한다.

렇게 된다고 하면 너무 허무하고 이 세상 삶이 잘 설명할 수가 없거나 감당이 잘 안되어 종교도 만들고

영혼이라는 것을 대표로 그 수많은 추상명사를 만들어 우리의 죽음을 수식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을 온갖 말로 그럴듯하게 만든다고 해도 그것을 속시원하게 설명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은 헤아릴 수 없는 세월동안 그 수많은 사람이 살았고 지금도 살고 있지만 인생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뭐라고는 해야 되니까 표현한다는 것이 실존이다 고해다 등등 들자면 끝이 없다.

사람은 살면서 온갖 풍상을 겪는다. 그러면서 종교를 갖고 사상을 갖고 인생관 세계관을 각자 갖고 살다가

각자의 처지에 맞는 생각을 하다가 저세상에 간다. 이것은 어떤 틀에 넣으려는 것이 애시당초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 인생은 아니 죽음자체도 뭐라고 해봐야 그것은 그 경우에나 맞는 것이지 일반적이거나 보편적이라고

누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가.

내가 여기서 뭐라고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닌가

지금 여기서 내가 말하는 죽음에 대한 얘기는 어디까지나 나의 경우 내가 생각하는 것일 뿐이라는 전제하에 하는 것이다.


종교는 체험이라는 얘기를 근대 종교철학자들이 말한다. 그렇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각자의 체험이지 어떤 이론이나 보편적인 진리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각자의 생각도 결국은 어떻게 삶을 살았고

어떻게 죽음을 받아 드리느냐에 달렸다고 본다. 우리는 각자 사생관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어떤 틀에 맞추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종교와 연관을 짖지 못하면 종교가 아니라고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각자의 사생관은 그것이 바로 종교다.

우리사회에서 보통 지내는 제사도 일종의 종교행위라고 한다. 죽은 영혼을 부르거나 생각하면서 어떤 의식을 행하는 것이고

죽어서 어찌 된다고 생각하니 그런 것이 아닌가.


죽음도 그렇지만 세상살이를 뭐로 보느냐를 보아도 각자 나름대로 어떤 생각을 갖고 산다.

그것이 잘 표현이 안 되었다고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교하고 복잡한 형태를 가지고 있을수록 표현하기가 더 어려울 것이니

잘 표현이 안 되었다고 해서 보잘 것 없다고 하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나의 경우 어떤 생각을 갖고 사느냐.

나는 가톨릭종교를 가지고 있어 많은 부분 이에 의존을 하지만 현실적으로 기계적으로 맞추어지지 않거나

피부에 와 닿지 않는 것도 많다. 이렇게 저렇게 따져 보았자 쉽게 결론을 낼 수 없으니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믿으며 오랜 세월 살아온 생각이 일리가 있겠지 하고 살면 편하겠지만

때에 따라서 납득이 안가고 과연 그럴가 하는 때도 없지는 않다.


믿음을 이야기하는 사람중에 상당수는  그냥 그러러니 하고 믿는다.

애써 마련하지 않고 거저 생긴 빵의 진미를 알 수 있을가.

세월의 풍상을 겪지 않고 바라보는 인생을 어찌 감이나 잡을 수 있을가.

사람들은 누구나 세상살이의 호사나 편안하고 풍족하기를 바라지만

대부분이 경우  기복이 없을 수 없고 부족함을 알아야 풍족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음과 양이 공존해야지 따로 따로 있을 수도 없지만 있어지지도 않은 것이다.

말하자면 행과 불행은 시차만 약간 다를 뿐 공존한다.


사후의 세계에 대한 것이나 신에 대한 것도 아무도 있다 없다를 확증할 수 없고

각자 알아서 자기 식대로 생각하고 사는 것을 뭐라고 하는 것이 애시 당초 무리다.

예전에는 주위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용납이 안 되었지만

지금은  세월이 좋아 꼭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사람은 알든 모르든 무의식 내지 잠재의식이라는 것을 가지고 산다.

이것이 있어 사람의 생각을 쉽게 변하지 못하게 하고 안전하게 나름 균형을 맞추어 나가도록 한다.

잠재의식은 의식할 수 없어 그냥 없다고 하고 지나가기도 하지만 이것을 알고

그의 영향을 생각해보면 많은 부분에서 이해의 폭이 넓어질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할 때 잘 알지 못하던 것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있거나

주위사람들이 얘기하는 사후의 세계에 대한 일이 나의 잠재의식에 깊숙이 박혀 있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물론 단순히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위급한 상황이 오면 나도 모르게 어떤 것에 매달리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럴 때 우리는 평소에 훈련된 대로 자동반사 작용으로 행동하기도 하겠지만 잠재의식으로

입력되어 있는 것이 급하면 튀어 나오기도 한다.

갑자기 저세상에 간다면 어떤 생각을 하며 갈가.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사는 것이 좋을가는 각자의 주어진 처지에 맞는 맞춤형 처방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백인백색일테니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을가. 오로지 스스로 처방을 하는 수밖에.

그것의 중요성을 알기나 하면 다행이다. 많은 경우는 아예 염두에도 없이 건성으로 여기다가

천방지축 같은 생각에 휘둘리다가 만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잘 다듬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니

선에 도통한 고승 같은 분이나

수도원에서 오랜 세월동안 기도생활을 한 성인 성녀한테나  가능한 일이 아닐가.

스님들이나 성인 성녀들은  복잡한 세속생활을 하는 분이 아니니 그분들이 닦은 도가 우리한테 적용할 수 있을가.


나의 경우 세상 삶이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사는 것이 좋은가.

한참을 헤매었지만 다시 제자리에 온 기분이다. 그저 오늘 하루 주어진 일이나 처지에 맞게

그 범위에서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바대로 열심히 사는 것이다.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구체적으로 뭐라고 해봐야 그경우에나 맞는 것이지 보편적인 얘기를 어떻게 할 수 있느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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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5 13:50:12 *.116.115.154

이수선생님 저, 이번 모임에 못갔습니다.

글의 제목을 보고 잠시 놀랐습니다만, 특별한 상황(?)에 빠진 것은 아님을 알고 안도했습니다.^_^

한 계절의 사색만으로 답을 찾기 어려운 질문을 하셨는데,  선생님의 철학으로는 거의 경지에 도달하셨겠지요?

다음 뵐때 조언 한 말씀 청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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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1 08:34:39 *.220.229.78

요즈음 여러가지 사정으로 바쁘실 턴데 저의 산만한 글을 읽으시고

댓글까지 달아 주셨네요. 고맙습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쉽게 속시원해지지 않는 주제네요. 반복하다 보면 좀 나아 지려니 하고

계속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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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08:31:09 *.246.141.195

이수 형님... 맘에 담은 것이 많으나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을 자제하시는 모습을 자주 느낍니다.

이렇게 글로 풀어 놓으시니 좋구요. ^^

죽음에 대한 성찰이 삶을 더 풍요롭게 할테니 부럽기도 합니다.

다음 모임 때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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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1 08:36:23 *.220.229.78

형산님 저의 주제넘는 글을 읽어 주시고 댓글까지 달아 주셔 감사합니다.

언제나 매사에 열심이신 형산님의 그 정성의 결실이 언젠가는

잘 거두어 지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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