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에게는 복에 겨운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올 한해 직장생활은 봄 무렵의 몇 개월을 제외하면 한 마디로 말해 매우 한가했다.

대부분의 직원이 타회사에 파견 되는데 보통 몇개월 단위로 계약을 하는 듯하며 계약 만료 후에도 대부분 재계약을 하는 것 같다.
('~ 같다'는 식으로 추측하는 이유는 회사내에서 직원간 대화가 거의 없기 때문에 회사 내부사정에 대해 잘 모르는 탓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의 경우 파견을 나가더라도 단기 프로젝트만 걸렸고 지난 여름 장기간 파견계약을 맺고 파견을 나갔으나 파견 회사의 예산 삭감으로 예정보다 훨씬 일찍 복귀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본사에서는 이미 업무 분담이 끝나 있고 내게는 특별한 업무가 새로 부여되지 않고 있어 매일매일 자리만 지키고 있는 실정이다. 내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든 다른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고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아침 적당한 시간에 출근하여 자리 지키고 있다가 때 되면 식사하고 때 되면 퇴근한다.

자리 지키고 있는 시간에 생산적인 활동을 하면 좋지 않느냐라는 생각.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게 참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아무리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하지만 회사라는 공간에서 회사와 관계없는 일을 마음껏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힘들다. 남는 시간에 책을 읽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주변 사람들 눈치가 보여 잘 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그냥 아무 생각없이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저녁 퇴근 시간이 되어 회사 건물 밖으로 나가면 참 허탈하다. 오늘도 이렇게 별의미 없이 하루가 가는구나 싶다.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는 전혀 없지만 아무런 정신적 노동 없는 일상이 계속되니 그것 또한 스트레스다.

이 시점에서 잠깐 올해 업무와 관련된 소득을 꼽아 보면..
몇 가지 새로운 skill 들을 익혔다. 미리 계산해 둔 것은 아니지만, 업계에서는 그러한 skill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의 몸값이 더 높은 편이다. 따라서 이직시에 유리하다. 그리고 별다른 실무경험 없이 새로운 skill을 몸에 익혔으니 이전보다 자신감은 더 충만해져 있는 상태다.

어쨌거나 너무나 긴장이 없는 일상이 반복되다 보니 무료함과 매너리즘에 빠져 버렸다. 어제보다 더 나아진 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절실함이 필요하다. 어찌보면 지금까지는 그 절실함이 외부에서 주어져 왔다. 내가 스스로 찾지 않아도 주변에서 그런 상황을 만들어 줬고 나는 그 상황에 적응하고자 애를 썼다. 수동적으로 대응할 확률이 높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주변이 평안(?)해지니 갑작스레 바뀐 환경에서 나는 어떻게 대응해야할지를 몰랐나보다. 시간이 흐르다 보면 또 예전의 그 상황이 발생하겠지 했나보다. 하지만 긴장 없는 상황은 계속 되고 있고 지금 상태로 있는 한, 이러한 상황은 계속될 것 같다.

그래서 이제는 스스로 긴장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고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리 절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 게으름 피울만큼 피웠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업무 관련 skill이 됐든, 아니면 조금씩 피어나는 다른 분야에 대한 관심이 됐든 일단 그것에 매진해 보려 애써야겠다. 아직도 그 방향에 대한 고민이 없지는 않지만, 막연한 느낌은 좀 덜해지지 않을까 싶다.

그동안 지속되었던 일상은 오늘로 끝이다.
오후에 있을 작은 도전을 시작으로 새로운 긴장들을 만들어 나갈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