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커뮤니티

살다

여러분이

  • 김성렬
  • 조회 수 1455
  • 댓글 수 3
  • 추천 수 0
2005년 12월 14일 03시 33분 등록
나의 꼬레아니티 !


어려서 코흘리개 시절에 아버지를 따라 성묘를 가곤 했다.
제례의식이 끝나면 그 곁에서 음식을 드시며 아버지는
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일본의 천황이 죽으면서 말하기를 한국의 땅은 일본에 비하면 황금의 땅이니 한국을 일본에 복속 시키든지 정히 안 되면 한국과 일본을 바꾸라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산자락에 있는 원효사를 지나칠 때는 중국의 사람들이 배우러 원효대사를 찾아 멀고 먼 길을 왔다는 이야기를 들려 주셨었다.
아버지는 가끔씩 산마루를 바라보시며 일본인들이 민족의 기맥을 끊으려 강산에 쇠말뚝을 박았다며 분개 하셨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나는 커서 칼 한 자루를 들고 세상에 나아갔을 때
일본 선수나 중국 선수를 별로 겁내지 않았다. 일본 사람들의 장인정신이나 중국 사람들의 대국적인 사상을 존중했지만 숭배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아버지가 가르쳐준 민족에 대한 어린시절의 자부심이 나의 무의식속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어떤 아버지도 ‘이 놈!, 남자는 부모와 스승과 조상을 제외하고는 무릎을 꿇어서는 안된다! ’ 든가 ‘어른을 보면 인사를 하고 자리를 양보해야 된다’ 고 가르치지 않는다.
이제는 어떤 아이들도 ‘아이구 그래, 고맙네! 자네 성이 뭔가! 그렇지 그 집안엔 훌륭한 사람이 많았지!’ 라고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한다.
그렇게 한국의 전통적인 것들은 사라져 간다. 산업화와 서구화의 현실 속에서, 합리와 효율이라는 것이 ‘선진문화’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고 어린시절 꿈꾸던 전설과 감동들은 마치 민속촌이나 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는 초가집이나 절구처럼 역사책 한 귀퉁이에 미미한 흔적만 있을 뿐이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전통적인 한국적 사고를 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서구적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서 미국적인 사고로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생각으로 전통적인 한국적 사고들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시작한 미국식 아닌 미국식 교육과정과 일제의 체제를 물려받은 관료적 사고 사이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또 퇴색되어 버린 것 같다.
내게 남은 한국적인 사고의 근거들은 어린시절 아버지로부터 훈계를 받을 때나 할아버지 산소에 가서 듣던 풍수지리에 관한 전설과 독립운동을 도우셨던 이야기들뿐이다. 그리고 어린시절 어머니 팔을 붙잡고 듣던 “전설 따라 삼천리”가 아스라한 기억 저편에 아직까지 남아 있을 뿐이다.

어느 미국인 심리학 교수가 한국인의 심리에 관한 적나라한 보고서를 썼다. 그가 기록하고 있는 내용들은 모두가 사실에 근거하고 있고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방법론의 체계 아래 합당하게 쓰여져 있다.
다만 그 미국인 교수는 자신이 바라보는 한국인의 심리 현상이 문화적인 집단 무의식의 배경위에 자리 잡은 근본적인 미국적 사고 위에 분석된 것을 인식하지 못하던가 간과 한 것 같다. 문화 현상은 합리적이고 환원론적이며 과학적인 방법론에 의해 해석될 수는 있어도 그 가치와 의미에 대해서는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말하고 싶다. 문화적 현상은 결코 합리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않으며 그것을 판단하는 생각 자체가 근본적으로 주관적이고 자기문화적라는 사실을 고려해야만 한다.
라던은 과학적인 방법론을 통해 인간의 객관적 관찰을 부정하는 ‘관찰의 이론 의존성’을 제시했다.
나아가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만든 토마스 쿤에 의하면 현상에 대한 이론이나 법칙은 가정과 전제의 조건 한계 내에서 비교나 평가가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문화나 민족성 같은 본질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서로 비교될 수 없다. ‘공약불가능성’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에 관한 가치와 정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그들이 우리의 민족적 사고나 문화적 가치에 대해 과학적 합리주의의 심판대위에 올릴 수 있을까?
장구한 역사를 가진 한국의 문화를, 그것도 민족의 정신과 전통적인 사상을 담고 있는 한국인의 심리를 200년도 안 되는 역사를 가진, 더구나 정신이나 가치를 인간으로부터 분리해 버린 그런 가치중립을 주장하는 과학적인 방법론으로 분석한다는 것은 그들의 방식에 따르자면 신뢰도도 타당도도 없는 이야기다.

한 때 그들의 선조들은 아무리 객관적으로 관찰을 해도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며 지구를 돌고 있는 것이지 지구가 해를 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더 많은 지식과 더 많은 증거들이 뒷 받침 해 줄때까지 그들의 믿음을 수호하기 위해 부정했고 나아가 진실을 알면서도 그들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종교 재판대 위에 올렸다.
인간에 관한 한 과학적인 방법론은 회의적이다. 세상이 이렇게 시끄러운 것으로 미루어 보아 더욱 그렇다. 민족의 문화나 가치체계에 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다른 모든 과학문명이 진화에 있어서 가히 혁명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관한 한은 별다른 진전이 없었지 않은가?오히려 그 반대였지 않을까?

인간성, 윤리, 가치는 문명의 발달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이데거의 말대로 과학은 사고하지 않기 때문은 아닌가? 정신과 물질을 분리한 데카르트의 자연에 대한 무모한 편견이나 뉴톤으로부터 물려받아 실증주의만을 주도한 전통과학은 책임이 있는 답을 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생각으로 그 교수는 세계 선(善)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적 ‘필요악’에 대해 세계가 인정할 수 있는 보다 긍적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아니면 그들은 신격화된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종교재판을 하고 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반면에 우리도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가 있다. 서구의 문화나 미국의 문화를 배우는 것은 그래서 그것들은 수용하는 것은 배고픔이나 불평등한 간섭만을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과 자유와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능력과 지식을 획득하자는 것이 아니었던가?

우리에게 옳은 사람이 사라져 버리고 옳은 방법과 옳은 수단만 있는 것은 아닌가?
아무도 백 년 전에 검객이 쓰던 검술로 오늘날의 시합에서 최고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그 정신을 깨달은 자는 오늘날의 시합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선진국을 돌아 다녔지만 그 어떤 나라도 한국사람 만큼 버는 것에 비해 잘 먹고 잘 입고 잘 쓰는 나라는 보지 못했다. 분수를 넘고 있지는 않는가? 남의 나라에 가서 어설픈 객기를 부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짓이나 싹쓸이하는 잘못된 배포는 수정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혹시 장원급제하면 동네 잔치를 베풀어 더불어 살고 있음을 알리던 조상들의 생각을 잘못 배워서 한 몫 잡아서 팍팍 쓰겠다는 생각으로 변질된 것은 아닌가? 고시레를 하면서 밥 한덩이 내어 놓던 온정이 ‘내 것 갖고 내 맘대로 하겠다는데 뭔지랄이여! 가 된 것은 아닌가? 겸양지덕의 예가 ’독불장군은 없어! 건방진 놈이 찍소리 말고 있어! ’ 로 바뀌어 버린 것은 아닌가? 우리를 지켜주던 정신은 사라져 버리고 ‘ 다들 그렇게 하니까?’ ‘어쩔수 없이...’ 라는 나만을 지켜주는 잘못된 정신을 가지고 계모임, 동문회, 향우회를 쫓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과학에 의존하고 있는 문명의 도구로는 아직은 인간의 무의식을 다시 포맷할 방법이 없다.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선택하고 실천하고 반복하는 것이다. 아'직까지 사람의 정신에 관한 한 목숨은 빼앗을 수 있을 지언정 스스로가 포기하기 전에는 그 누구도 어쩔 수 없다.

어떻게 포맷할 것인지는 과학문명이 가져다 준 정보와 효율로 충분히 선택과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보여 진다.

다만 무엇을 포맷할 것인가?에 대한 우리의 고민은 옳은 사람, 올바른 한국인, 한민족의 혼을 가진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에 대한 의문을 풀어야만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Coreanity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의 기억으로 지구상에 수 천년이 넘도록 민족을 유지해 온 나라는 별로 많지 않은 것 같다. 또 진나라의 시황제는 동이족의 침략을 염려해 만리장성을 축조했지만 우리나라는 남의 나라를 선제 공격한 적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우리가 스스로를 부정하거나 대체하려는 자신감 없는 스스로에 대한 태도는 어떠한 문화 어떠한 노력으로도 궁극적으로 우리 스스로에게 확신이나 긍정적인 태도를 기대할 수 없다. 그저 잠시 그런 것처럼 보일 뿐이다.
우리가 역사로부터 배운 교훈은 사대주의, 당쟁, 쇄국 같은 우매함이 아니라 지략과 견제와 자주의 정신과 기개의 불균형과 치우침이었다.
우리에겐 장구한 세월의 고난과 극복 속에 체득한 민족적 기개와 탁월한 기예와 기지 넘치는 우리만의 민족혼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집념과 끈기로 상상을 초월하는 불가능한 성과를 거두며 온 세상 사람들에게 ‘오~ 필승 코리아!’ 라는 주문을 가르쳐 주었다.
아직도 우리는 손님을 접대할 때 정성껏 차려놓고 ‘차린거 없지만 많이 드세요! ’라고 말하고 ‘ 상다리가 부러지겠네요, 진수성찬입니다.! ’ 라고 답한다.
역사의 기록에 한 줄 나오는 내용으로 온 국민을 열광하게 하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드라마 왕국이다. 어깨너머로 흘낏 보고도 뚝딱 만들어낼 수 있는, 줄기세포의 핵을 손쉽게 제거할 수 있는 손재주를 가진 민족이다.
한국만이 숟가락으로 밥을 먹고 숟가락이라는 고유한 단어가 있다. 일본이나 중국은 숟가락이라는 단어가 아예 없다. 그냥 ‘국자’다.
이만하면 일부러 상투 틀고 짚신신고 무명저고리 입지 않아도 충분히 한국적이지 않은가?
애써서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찾을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족의 정체성, 'koreanity'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이루는 것들의 적절한 평형에 있지 않을까?
( 나는 인터넷의 여러 곳에서,, 그리고 구본형선생님의 저서들을 톨해서 찾고 상상하고 꿈꾸고 있다.)

진정한 강자, 옳은 아버지, 옳은 사람, 올바른 지도자란 남의 위에 서지 않아도 존중받고 사랑받는 사람이란 것은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삶을 통해서 그들에게 전해야 하고 깨닫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를 찾아온 외국인 선수들에게 독립기념관의 광개토대왕비를 보여 주면서 말했다.
“ 나는 저 제왕의 기개와 정신을 물려받았다. ”
그리고 등에 업혀 잠들어가는 어린 아들에게 그렇게 말한다.
“아들아! 남자는 스스로 일어서서 강자가 되고 자기 자신과 남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내가 함께하고 있는 이들에게 물려주는 나의 Coreanity 다.

IP *.75.166.34

프로필 이미지
사랑의기원
2005.12.14 08:38:20 *.190.172.112
김성렬선생님 !
코리아니티 coreanity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동감의 마음도 함께하고 싶습니다.
코리아니티에서 부족한 것중에 하나가 우리민족의 정체성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옛이야기가 압축되어 전해지는 우리 역사를 스스로 신화라고 하는 지금 우리는 무언가 반성을 해도 한 참 해야하합니다. 제가 배운 단군의 역사를 신화로 인식되어진 것에 통열한 반성을 합니다.
너무나 역사가 오래되고 길어서 전할 수없는 것을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전하는 방법은 압축헤서 전해줄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그 한줄의 역사을 길게 펼쳐볼 수있는 객관적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나의 정체성과 민족의 정체성은 여러가지에서 같은 점이 많습니다.
우리민족이 흥했던 때와 내가 흥했을때 그 역활이 분명했습니다.
누군가를 어떤 빈족을 해하려는 마음을 먹었을때 흥한 적이 없습니다.
스스로 열정적이었던 때 그 순간이 우리의 정체성에 몰입을 주는 순간이었고 저자신도 열정과 몰입이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우리민족과 나의 정체성을 찾는 순간
목적을 향해가는 기준이 확립되는 것이고
그 목적은 더 분명하게 보여지며
힘차게 나갈 수있을 것입니다.

모처럼 참 좋은 글 만났습니다.
감사합니다.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프로필 이미지
김성렬
2005.12.14 11:39:18 *.75.166.34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설과 신화' 그것은과거시제인 암울한 기록의 인간의 역사와는
대조적으로 정화되고 꿈과 희망을 주는 살아있는 역사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것들이 오늘 속의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사실의 진위를 가리는 마음이 아니라
믿음의 정도를 기대할 뿐이거든요...
프로필 이미지
황명구
2005.12.14 14:32:14 *.94.41.89
지난주에 중국에서 합작회사 임원과 회의를 하고 식사를 하는중에 최근 한국의 드라마가 중국에서 인기있는 이유에 대해서 중국사람이 들려 주더군요. 인기의 키워드는 "가족간의 드라마" 라고 하더군요. 조금은 난망 했읍니다. 실제 한국에서의 가족간의 가치는 점점 드라마 에만 존재하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한국의 진정한 가치를 스스로 버리고 있지만 주변국에서는 버리고 있는 그가치가 "한류" 로써 사랑받는 본질이라고 하더군요. 저도 요사이 혼란스럽습니다. "렉스서와 올리브나무", "자본주의의 미래" 등에서 요구되는 경쟁력은 좋튼 싫튼 글로벌 표준의 따르라는 것이지요. 자신의 고유가치와 변화의 가치를 접목하는 혜안이 필요한때라 생각되네요. " 아무도 백 년 전에 검객이 쓰던 검술로 오늘날의 시합에서 최고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그 정신을 깨달은 자는 오늘날의 시합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라는 글이 세삼스럽게 가슴에 와 닺읍니다.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