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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종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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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18일 05시 48분 등록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첫 아이 돌잔치는 코앞에 닥쳤는데 집사람이 맡긴 숙제는 아직 시작도 못했으니 명치 끝에 두꺼운 국어사전이라도 올려놓은 듯 숨이 가쁘다. 그냥 못한다고 했어야 하는데 오기가 화를 불렀다.

벌써 한달 전에 집사람이 물었다.

"돌잔치 때 상영할 동영상을 만들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전문 업체에 맡길까?"

여기서 난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얼만데? 15만원? 무슨, 까짓 거 내가 하고 말지."

큰소리는 쳐놨는데 앞이 깜깜하다. 날짜는 하루하루 다가오는데 죽었다 깨나도 못하겠다는 소리는 할 수가 없었다. 평소부터 컴퓨터라면 좀 다룬다고 큰 소리를 쳐온 탓도 있지만 그보다 집사람의 서툰 컴퓨터 실력에 몇 번 면박까지 준 터라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후로 집사람은 사이사이 다른 돌잔치 성장 동영상을 구해다가 보여주며 본인의 기대치와 내 능력치 사이에는 근접할 수 없는 차이가 있음을 수시로 확인시켜줬다. 몰래 인터넷으로 동영상 편집 관련 책을 '삼만 원'씩이나 주고 주문했다는 것까지 들통 나고 보니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수요일 저녁 10시에 아이를 재우고 컴퓨터에 앉았다. 각오는 비장했지만 기초 군사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전장에 배치된 학도병의 마음이 이랬을까?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우선 지난 일 년 동안 디카로 틈틈이 찍어온 천여 장의 사진과 동영상을 천천히 살피기 시작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일 년 사이에 찍어온 사진들, 동영상들을 뒤적이다 보니 그 사이 잊고 있었던 분만실의 기억이 되살아 났다. 지난 일년 간의 시간들이 행복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신기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무엇에 홀린 듯 사진을 고르고 늘어놓고 글을 적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침 7시반이었다. 모니터 화면엔 아이의 모습이 돌아가고 있었다.

잠시 시간을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보자.

월요일 회사에 출근해서 메일을 확인하니 구본형 변화 경영 연구소 연구원 1차 합격이란다. 기쁨도 잠시 머리가 바삐 돌아가기 시작한다. 마감일 정오를 목표 시간으로 정하고 나니 당일을 포함해서 일주일이 남았다. 점심 시간에 서점에 들러서 책을 확인하니 두께도 엄청나지만 내용은 더 아찔하다. 가격도 만만치가 않다. 그런데 여기서 또 어리석은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하면 대략 오천 원을 아낄 수 있다는 값싼 욕심이 화를 자초하고 말았다.

'하루 배송 보장'이라는 인터넷 서점의 광고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화요일, 수요일에 걸쳐 주문했던 사이트로, 택배 회사로 뻔질나게 전화를 하며 속을 태웠지만 아무 소용없는 짓이었다. 다시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돌잔치 동영상도 만들어야 하니 그걸 끝내고 책에 매달려야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희망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결국 책은 목요일 오후 늦게 도착했다. 수요일 밤을 1분도 못 자고 꼬박 깨어 있었던 탓에 책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발음 하기도 어려운 도시와 사람의 이름들은 자장가를 불러댔다. 내 절실함은 체력을 넘어서지 못했다.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뜨니 금요일 아침이었다. 난 의자에 앉아 있었고 책은 방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출퇴근 전철에서 읽는다고 읽었지만 절대 시간이 부족했다. 금요일 밤이 유일한 희망으로 남았다. 그러나 잔뜩 벼르고 도착한 집에는 토요일, 돌상을 차리기 위해 집사람 혼자서는 할 수 없는 내가 '해야 할' 일들이 그득했다. 자정까지의 시간을 집사람에게 헌납했다. 다음 날도 난 의자에서 잠이 깼다.

토요일, 호화 돌잔치에 대한 신문 기사가 천 원도 아껴가며 준비한 집사람의 심기를 조금 건드린 것을 빼곤, 돌잔치는 무사히 끝났다. 아이도 집사람도, 덩달아 나도 행복했다. 어렵게 만든 동영상은 히트를 쳤다. 덕분에 돌잔치 동영상 2개 그리고 웨딩 동영상 1개를 의뢰 받는 엉뚱한 영광도 누렸다. 이제 그 의뢰들을 어떻게 잘 거절하는가가 숙제로 남았다.

사랑하는 아이의 첫 생일잔치 준비와 연구원 과제 사이에서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게 흥분 가득했던 일주일이 흘렀다. 이렇게 바빴던, 이렇게 정신 없었던, 이렇게 마음 졸였던 한 주가 도대체 얼마만인가? 그 동안 내겐 얼마나 절실함이 부족했던가?

지금 시간은 월요일 아침 7시다. 토요일 밤부터 지금까지 미친 듯이 읽고 밑줄 친 '미완의 시대'를 보니 대략 100여 개의 포스트잇이 빼곡히 붙어 있다. 스스로 선택한 일에 흠뻑 빠지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온 몸과 마음으로 가득 누렸다.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자니 부끄러운 마음이 앞서지만 물먹은 솜처럼 피곤한 몸과는 달리 보라색으로 밝아오는 하늘을 따라 가슴이 두근거린다.

두 번째 과제 준비를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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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동안 가슴을 태웠던 두 가지 중에 하나는 글이고 다른 하나는 다음에 남기는 영상입니다. 정말 행복했던 한 주였습니다. 더 가슴 두근거리는 한 주를 기대해봅니다.



주원이 첫번째 생일 동영상 다운로드 <= 여기를 클릭해주세요. )

IP *.227.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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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동
2007.03.12 10:09:22 *.219.66.78
영상을 보니 무척 섬세하시네요. 사진 한장 한장에 의미 부여하시는 능력도 남달라 보이고.. 나중에 뵙게 되면 영상 편집에 대한 노하우 좀 많이 전수 주셨으면 좋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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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윤
2007.03.12 10:16:50 *.227.22.4
저도 처음 해본 작업이라 노하우라고 전해드릴만한 게 있을지 모르겠네요. 궁즉통이라고 했던가요? 급한 마음에 정말 급하게 만들었습니다. 다음엔 좀 더 나아질 것 같은데... 둘 째 돌잔치를 기다려야할까요? ㅎㅎㅎ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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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윤
2007.03.12 13:52:56 *.249.167.156
인터넷서점에서 배송된 두꺼운 책을 받아들고 아찔하던 기억이 남 일 같지 않네요^^ 주원이의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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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박
2007.03.12 14:54:39 *.218.205.173
제 아이도 아닌데 제가 눈물이 찔끔.. (황당)
정말 아빠의 마음이 이런 것이구나..하고 느껴지는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진짜 감동적이네요.

그나저나 이걸 처음 만드신 것이라구요? 헉.. 저나 신재동님이나 동영상 편집을 가끔 하는데.. 이건 재능이 있으시다고 밖에 말을 못하겠는데요?

게다가 돌잔치 준비에 동영상 작업에 연구원 과제까지..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입이 안다물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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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자식
2007.03.12 18:04:42 *.252.38.3
동영상은 아직 못봤지만 글로만 봐도 대단하시네요.
앞으로도 화이팅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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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2007.03.12 21:11:18 *.99.84.60
동영상 정말 잘보았습니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뭐랄까.
해보지 않은 일도,
도저히 불가능한 일도
될수 있게끔 하는 믿음과 열정이 있는것 같습니다.
주원이 첫돌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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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윤
2007.03.13 11:16:05 *.227.22.4
아~ 글로 말하라고 하셨는데 동영상으로 말한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입니다.

주원이 생일 축하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하루하루 아빠로 살아가는 기쁨에 푹 빠져있는 요즘입니다. 연구원 준비와 초보 아빠의 임무 사이에서 줄타기를 좀 더 열심히 해야할 것 같습니다.

참! 김귀자님~ 전에 들려주신 팬플룻 소리 너무 좋았습니다. 꼭! 다시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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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찬
2007.03.14 02:42:33 *.140.145.63
저도 작년에 첫아이 돌을 치를때 아내에게 큰소리만 쳤다가 결국
백기들고 전문업체에게 작업을 맡겼는데 아이가 커서 추억을 되새길
생각을 해보면 후회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신종윤님이 존경
스럽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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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엽
2007.03.14 12:05:41 *.76.81.52
종윤님-
저는 출장갔다가 돌잔치 당일날 새벽에 도착한 일이 생각납니다. 게다가 그날 비행기도 stand-by해서요! 그래도 치열하게 모든일을 다 하신 종윤님께 박수를 보냅니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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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수
2007.03.14 20:13:05 *.77.4.206
홉스봄이 겪은 한세기의 역사와 맞먹는 일주일을 보내셨군요.
아빠의 따뜻한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는 동영상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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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선
2007.03.14 23:36:52 *.142.243.87
전 이제야 봤습니다.
처음 동영상 저렇게 만드신거,, 연구원 지원과제랑 같이 하신 거
대~단~하십니다.

마음이 훈훈해지는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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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3.15 22:14:12 *.70.72.121
대단해요~ 그 아빠의 그 아가겠죠?
주원이 잘 자라세요. 나중에 실물 보자. 주원이도 당연 꿈 벗. 친구들도 많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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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윤
2007.03.18 01:22:58 *.254.151.8
제대로 된 칼럼이 아님에도 아이 이야기를 팔아 호사를 누렸네요. 이렇게 칭찬하고 축하하고 응원하는 분위기도 코리아니티 아닐까요? 축하 많이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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