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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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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4월 6일 22시 41분 등록


첫번째 원칙

김동리선생이 젊어서 문단에 등단했다는 소식을 들은 친지하나가 이렇게 말했단다.
‘굼벵이도 뒹구는 재주는 있다더니...’ 글재주 있는 사람들에 대한 현실적 평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예라고 생각한다. 나역시 커다란 글재주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실감각이나 수완이 상당히 부족하다. 한정치산자에 가까운 경제감각, 경미한 조울증과 자폐증이 아닐까 의심스러운 정서를 가지고 ‘저자거리’에서 살았다. 경제나 소시민적인 삶에 아예 관심이 없는 사람이 그 바닥에서 성공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자연히 게으르고 산만하고 수완없는 ‘미숙이’ 그 자체일 수밖에.

그런데 요즘 연구원 과제를 이행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책읽기와 글쓰기에서는 내가 절대로 게으르지 않더라는 사실이다. 상담전화 한 통 하려면 2박3일을 미루다 그예 하지 않는 내가, 이 홈페이지에서는 부지런한 사람으로 꼽히는 것이다.
믿을 수 없을만큼 빨리 지나간 세월 앞에서,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앞에서, 내가 한 번 갖고 놀아봐야 할 유일한 재료가 책과 글이라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어쩌면 이만한 절실함은 세월이 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얼결에 지나간 시간의 무게에 비해 텅 빈 손을 쳐다보는 심정, 누군가 정확하게 짚었듯, ‘더 이상 이렇게 살수는 없다고 중년의 흙바닥에 엎드려 울었다’.

그래서 나는 결단코 연구원 1년차의 목적을 분명히 하려고 한다. 첫째도 연구, 둘째도 연구이다. 나는 오직 독서량과 글로 말하는 사람이다. 동료 연구원들의 글을 매섭게 지적하고, 흥겹게 인정하는 첫번째 독자가 될 것이다. 구소장님이 말하듯, 보통사람이 힘껏 노력하고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최소기간인 3년을 힘차게 시작할 것이다.

두번째 원칙

앞에서 말했듯 재주라고는 도무지 없는 나는, 음치에 기계치에 관계痴이다. 사실 사람을 많이 버렸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거의 현실과 신변에 갇혀 있었다. 나는 현실과 신변의 그 너머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과 나 사이에 만날 수 있는 지점이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코리아니티 경영’에서 인용된 귀절 하나를 읽으며 잠시 망연자실했다.
알렉시스 토크빌은 <미국 민주주의>에서 ‘조상을 잊고 동료를 무시함으로써 개인을 영원히 홀로 남겨두어 결국 자기 마음의 고독 속에 가둬버리게 될 것이며... 독자적인 삶을 얻을 수는 있으나 그것은 죽음보다 더 나쁜 삶이며... 바로 이 부분이다. 누구를 무시한 적은 없다. 단 무심했다. ‘독자적이라는 미명아래 죽음보다 더 나쁜 삶’이라는 귀절이 뒷덜미를 쳤다. 설상가상으로 요즘 읽고 있는 신영복선생님의 ‘강의’에서도 시종일관 ‘관계’를 강조하신다.

이제 글을 통해서 본 바로는 나와 상당히 기질이 비슷한 연구원들과의 커뮤니티가 시작된다. 할 수 있다면 조심조심 연구원 커뮤니티 안에서 관계맺기 연습을 하고 싶다. 사소한 실수는 용서받고, 큰 목표는 독려하는 평생동지를 얻고 싶다.

세번 째 원칙

바라건대 나를 ‘언니’나 ‘누나’라고 부르지 말고 ‘한선생’으로 불러주었으면 한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고 또 내가 제일 연장자 같으니 ‘先生’ 맞다. ‘언니’나 ‘누나’같은 호칭에서 나는 사회적으로 부과된 여성성 혹은 모성성을 감지한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 연장자층에게 기대하는 너그러움과 인내같은 덕목도 느낀다. 하지만 우리 연구원들은 나이와 성별을 떠나 독립된 인격으로 만나는 것이고, 오로지 연구성과에 따라 서열이 매겨진다면 너무 살벌하게 들릴까. 한번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인생에 걸쳐 아주 특별한 상대에게만 남성이고 여성인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고용주와 고용인, 고객이나 행인, 국회의원과 출입기자로 만나는 것이지 여성과 남성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멋모르고 살아온 그 세월에 값을 매겨 ‘나잇값’을 할 자신도 없다. 그래서 생각해 보았다. 연구원 커뮤니티 안에서는 나이와 성별을 뛰어넘는 ‘건강한 도발’ 을 표현하고 수용하는 ‘단독자’로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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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06.04.06 23:03:36 *.81.61.158

이제 내일 모레면 모두 만나뵙게 되네요. 글로는 이미 익숙해졌지만, 조금 걱정도 되구요. 제가 낯가림이 좀 심하거든요. ^^
꽃이 핀지도 모르고 지냈네요. 제비꽃이며 개나리를 보고 깜짝깜짝 놀랐어요. 내일까지 열심히 살고, 남해 모임을 나에게 주는 최상의 선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숙제가 또 있네요 ~~
자, 여러분. 곧 뵙겠습니다. 그 때까지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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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희
2006.04.06 23:06:19 *.142.175.37
중년의 남자분으로 당연히 생각했었습니다.. ^^;; 요즘행복해 보이십니다. 꿈같은 연구원생활 기원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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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자식
2006.04.07 08:40:32 *.229.28.221
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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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
2006.04.07 08:40:54 *.244.218.8
저보다 연배가 높으신 분들을 이곳에서 만나며 나이가 들어도
비슷한 고민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더 이상 이렇게 살수는 없다고 중년의 흙바닥에 엎드려 울었다’.
이 말 참. 서늘하네요.
항상 좋은 글 읽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녀를 떠나 독립인격으로 만나는 건 당연한 말씀이시지만,
연구성과에 따라 서열이 매겨진다는 건 부정하고 싶네요.^^

주말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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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승
2006.04.07 09:20:08 *.109.152.197
한선생님...

한 20년전쯤 나름대로 고민을 하다 군대로 도망을 쳤습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찾는데 실패해서.
중년이 된 지금은 그 고민 중에 '인간의 얼굴'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세상의 남음과 모자람과 부족함도 '인간의 얼굴'속에서는 다 함께 넉넉함으로 어울려 질 수 있을 것 같아서 입니다.
그런 어울림이 만들어 내는 조화로움은 늘 저를 감동시키고 행복하게 하거든요.
행복한 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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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
2006.04.07 17:35:58 *.145.231.47
한선생님...

어색하지만 부르고 나니 친밀감이 듭니다.
중년이 부끄럽지만은 않은 시간으로 채워 나가실 것으로 믿습니다.
근데 저보다 위실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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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간디
2006.04.11 11:59:00 *.200.97.235
한명석 선생님의 성우같은 음성이 귀에 쟁쟁합니다. 사람을 알고 글을 읽는다는 재미의 매력에 빠지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책읽기와 글쓰기의 모범을 보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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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요한
2006.04.11 21:05:43 *.253.83.76
안녕하세요.

글이 참 맛깔나요. 그리고 글 속에 좋은 예로 제 글을 소개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올 한해 한 선생님의 '건강한 도발'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할것 같아요.
기대만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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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석
2006.04.11 22:56:31 *.225.18.46

아, 요한님. 안녕하세요?
요한님처럼 <명확한 직업>을 가진 분이 그만한 연구력과 집필력을 갖고 계시니 파급력이 상당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형경의 <사람풍경>처럼, 요한님이 만나는 상담자나 문학작품을 전문지식과 접목시키면, 보다 많은 독자에게 내 철학을 전파할 수 있을 것같아요.

저야말로 요한님의 전문성 + 문학성에 기대를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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