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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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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27일 01시 42분 등록

요즘 눈 참 자주 내립니다. 오두막살이 몇 해 동안은 눈 오는 것이 무척 반가웠습니다. 눈 쌓여 오두막에 갇히면 찾아오는 이 거의 없고, 나가는 일도 쉽지 않으니 온전히 고립, 그 자체로 별도의 세상이었습니다. 먹을 것과 땔감, 그리고 수도만 얼리지 않는다면 일 년 중에 가장 깊이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때가 바로 그때였습니다.

 

요즘은 눈 오면 걱정이 커집니다. 드물기는 해도 이 겨울에도 여우숲을 예약하고 찾아오는 분들이 더러 있으니 눈을 치우고 길을 터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개천으로 소금기 흘러들고 그 때문에 이 숲에 사는 다른 생명들 힘겨울까봐 염화칼슘이나 그것 섞은 모래를 뿌리지 못하는 나의 성질머리는 이미 아실 것입니다. 그러니 넉가래나 눈삽, 아니면 대빗자루로 길을 낼 수밖에 없습니다. 여우숲 주차장 입구에서 숲학교 건물을 거쳐 백오산방까지 한 바퀴 돌면 대략 500m는 됩니다. 혹시 올라올 차에 대비하려면 바퀴가 밟을 자리를 따라 길을 내야하니 족히 1km는 눈을 치워야 합니다.

 

폭설에는 눈삽이나 넉가래를 쓰고, 가벼운 눈에는 빗자루질을 합니다. 반나절 넘는 시간을 쓰면 2/3쯤 눈을 치울 수 있습니다. 허리가 뻐근하고 손바닥도 아파옵니다. 온 몸에 땀이 절로 나는 시간입니다. 홀로 연장을 들고 눈을 치우다보면 자연스레 자꾸 뒤돌아보기도 하고, 멀리 남은 거리를 가늠해 보게도 됩니다. 그리고 이내 한숨을 푹 쉬게 되지요. 갈 길이 멀다는 막막함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는 그런 막막함을 싹 지우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눈을 치우는 시간이 더없이 특별한 성찰의 시간으로 바뀌었습니다. 남은 거리나 시간을 가늠하지 않으면서부터입니다.

 

오직 그저 묵묵하게 비질을 해나가기 시작하면서 부터였습니다. 빨리 치우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그저 삽질과 넉가래질에 몰두하면서 부터였습니다. 몸에 힘이 자연스레 빠졌고 몸동작은 리듬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일하는 내내 그 좋아하는 담배를 피우고 싶은 생각도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눈을 치우다가 눈 쌓인 길 위에서 만나게 되는 다양한 흔적들에게 눈길을 주며 빙그레 웃는 순간도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툭하고 부러져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 한 조각, 고라니나 멧토끼의 발자국, 그들을 쫓아 총총 사라진 산과 바다의 발자국, 새발자국, 덮인 눈 위로 올라와 새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키 작은 풀들의 열매...... 암담한 노동으로 여길 때는 놓쳤던 많은 것들이 살아나 내게 말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사유를 키우게 했습니다.

 

숲에는 숲만의 시간이 흐릅니다. 그것을 전문가들은 천이라고 부릅니다. 벌거숭이 산이 다시 깊은 숲이 되려 해도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적 시간이 있습니다. 아주 볼품없는 한해살이풀부터 두해살이풀, 여러해살이풀과 키작은 관목들이 차례로 저마다의 시절을 살아내고 스러지고 또 다른 생명에게 자리를 내주고 나서야 마침내 소나무 같은 선구목들이 키 큰 나무들의 숲을 열어낼 수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생명들이 자신의 시절을 살아내고 물러가기를 반복하면서 숲은 깊어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갈나무나 떡갈나무가 자신의 시대를 열어내고 싶어도 거쳐야 하는 시간과 경로가 배치되어 있는 곳이 숲이라는 자연인 것입니다. 눈을 치워 길을 내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빨리 길을 내고 싶어도 오직 한발자국씩 흙빛을 되살려내며 길을 낼 수 있습니다.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찾아간 어느 진보적인 지역의 도서관 강연회에서 나는 많은 사람들의 눈빛에서 상실감을 느꼈습니다. 아마 그들이 투표한 인물을 당선시키지 못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이 사회에 지역갈등과 이념갈등도 부족해서 세대 간 갈등마저 증폭되는 기운도 감지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나는 모두 빗자루를 들고 눈 덮인 숲으로 오시라 권하고 싶었습니다. 승리감도 패배감도, 획득감도 상실감도 모두 눈을 치우는 것과 같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숲에 흐르는 시간의 법칙, 눈을 치우는 시간의 법칙을 느끼게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잊고 사는 그 시간의 법칙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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