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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9일 13시 05분 등록

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습니다, 열두 번째 이야기


안녕하세요. 저는 '아내'가 아닌, '남편'입니다. ‘며느리’가 아니라 ‘아들’ 입장에서 옛 사고방식에 갇혀 명절의무를 놓지 못하는 저희 ‘어머니’를 설득하고 싶어서 이 글을 씁니다.
 
저희 아버지는 4남 3녀 7남매 중 둘째 아들입니다. 이제껏 제사 준비는 큰집에서 큰어머니, 저희 어머니, 숙모님들, 형수님들과 제 아내 이렇게 대식구가 함께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큰아버지께서 서울 큰형네로 이사를 가시고 나서, 명절 때 대가족이 서울로 이동하기는 어려우니 둘째 아들인 저희 아버지 집에서 간소하게 음식을 준비해서 성묘를 하기로 했습니다.


여기서 제 불만이 폭발합니다. 말이 간소하게지, 명절 준비를 저희 어머니 혼자서 도맡아 하십니다. 명절 전날 부부가 본가에 가지만, 저희 역시 타지방에 살고 있어서 도착할 때쯤이면 웬만한 음식 준비는 끝난 상황입니다. 숙모님들과 며느리들은 오지 않습니다. 돗자리부터 시작해서 전, 과일 등 모든 음식은 저희 어머니가 혼자 준비하신 것들이고 음식 먹고 나서 음식쓰레기봉지까지 제 차 트렁크로 들어갑니다.


작년 추석 때는 미리 사촌형들에게 각자 음식 나누어서 장만하고, 집에 들르지 말고 바로 산소에서 보자고 했는데, 그래도 계속 저희 집으로 오시고 명절 날 오지 말라고 삐쳐서 맘 상한 분도 계시네요. 역시나 손님치레와 제사 음식 장만은 저희 어머니 혼자 다 하셨고요. 제가 숙모님들께 음식 준비 배분까지 하면 건방져 보일 것 같아서 사촌형들에게 말한 건데 전혀 씨알도 안 먹힙니다.


저희 어머니가 안 하시면 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머니는 아픈 무릎과 허리를 돌보지 않고 그 많은 사람들이 먹을 음식을 혼자서 다 준비하십니다. 큰집에서 제사를 지낼 때도 저희 어머니께서 고생하시면서 준비하셨는데, 이제 저와 누나들이 음식 줄이자고 말씀을 드려도 놓지 못하시네요. 어떻게 하면 저희 어머니를 멈추게 할 수 있을까요?


올 설 명절 전에 받은 편지입니다. 이제야 답장을 보냅니다. 많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내내 이 편지를 생각했어요. 그동안 어떻게 하면 어머니를 멈추게 할 수 있을까 생각을 거듭했습니다.


아버지를 먼저 설득하세요!


보내주신 사연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종손인 큰아버지께서 고향을 떠나고 나서 둘째 아들인 나의 아버지가 명절 제사를 물려받게 되었네요. 명절노동의 주체가 큰어머니, 어머니, 숙모님들, 형수님, 아내 등 대식구 며느리들이었다가 나의 ‘어머니’ 한 분에게로 집중되었고요.


명절노동을 행하는 노동력은 줄었으나, 삼촌들을 비롯해 사촌형네 식구들은 여전히 명절 손님으로 집으로 찾아오고 성묘도 지내야 하는 상황이네요. 말로는 간소하게 하라고 하지만 손님치레와 성묘 음식 준비로 어머니는 성치 않은 무릎과 허리로 고생을 하고 계시고요. 글을 쓰신 아드님 입장에서는 어머니를 말리고만 싶고요.


사연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면서 ‘아버지’가 등장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습니다. 큰아버지인 종손을 대신해 둘째 아들로 제사를 물려받은 ‘아버지’는 어디 계신가요? 아들이 나서서 ‘숙모님들께 음식 준비 배분까지 하면 건방져 보일 것 같아서 사촌형들에게 말한 건데 전혀 씨알도 안 먹힌’다면, 제사장인 ‘아버지’께서 직접 나서는 건 어떨까요?            


애초에 ‘기울어진’ 성역할을 부여하는 가부장제를 깨부수고 모두가 ‘평평하게’ 관계를 맺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요. 명절노동으로부터 어머니를 구하는 일이 시급하기에, 일단 당장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제사장이자 가부장이 직접 나서서 기울어진 명절노동을 평평하게 조율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효과적인 대안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아버님 먼저 설득하세요! 


어머니 건강이 더 나빠지기 전에 바꾸어야 합니다!


저는 9월 1일에 성묘를 다녀왔습니다. 16년차 며느리로서 내 몸을 돌보기 위해 한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시댁 방문 전에 병원에 먼저 들립니다. 명절노동 전에 몸 상태를 최적으로 만들기 위해 약을 처방받기도 하고 필요한 경우에 주사를 맞기도 합니다. 장거리 운전을 앞두고 미리 차 상태를 점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번에도 집 앞 병원에 들러 진찰을 받았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설 명절때와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어머니, 시댁에 왜 가요? 가지마세요! 요즘엔 안 간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 없어요! 이 몸 상태로는 안 돼요, 안 돼!”


처음에는 우리 동네 명의로 소문난 의사 선생님께서 농담 하시는 줄 알고 말없이 미소만 지었습니다.


“안 가면 안 된다고요? 그럼, 깁스 처방 해 드릴게요. 가지 마세요.”


농담이 아닌 걸 알아채고서 저는 시댁에 가야만 하는 이유를 장황하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몸 대신 돈을 써요! 벌초 업체 전화번호 드릴게요. 요즘에는 무덤 하나에 6만원만 들이면 돼요. 병원비, 차비 생각해봐요. 훨씬 적게 들잖아요. 요즘 사람이 먼저 나서야지, 시어머니도 몸도 안상해요!”


주사도 맞고 약 처방도 받아서 몸 상태가 훨씬 나아진 것도 있었지만, 대한민국 오십대 중반의 성인남자 의사 선생님의 변화에 마음이 한결 더 가벼워졌습니다. 올해 설 명절 때만 해도 당연한 듯이 주사와 약 처방을 해 주셨었는데,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어떻게 이렇게 달라졌을까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의사 선생님의 아내 혹은 어머니께서 명절노동으로 건강이 나빠지신 건가, 의사이자 가족으로서 미리 손을 쓰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로 인한 변화인가, 짐작 해봤습니다. 


어머니의 건강이 더 나빠지기 전에 변화를 도모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추석이 답답한 일들이 해결되는 변화의 시작이 되길 바랍니다.  


김정은(toniek@naver.com)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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