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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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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11일 15시 26분 등록

호치민에서 만난 쓸쓸한 표정의 사내



라오스 지척에 베트남이 있다. 베트남의 경제 수도라 불리는 호찌민이 있다. 옛 이름은 사이공(Saigon)이다. 시내 중심에 있는 통일궁(‘주석궁’이라고도 한다) 엘 들렀다. 발랄하게 그러나 느린 걸음으로 차근차근 둘러본 뒤 내쳐 인접한 전쟁박물관 (War Remnants Museum, 전쟁기념관이라고도 하는데 전쟁을 기념할 순 없다. ‘전쟁, 증적박물관’이라 해야 옳다. 전쟁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증거와 흔적을 모았다는 말이겠다) 까지 들린다. 실로 오랜만에 여행자 모드가 되어 신이 났으나 그곳이 어디 신나게 갈 수 있는 곳인가. 이내 무거운 마음이 되어 걸음이 한없이 느려지고 침묵은 길어졌다.

 

한 사내가 있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 땅을 밟았던 사내가 있었다. 월급쟁이 정글을 들쑤시고 다니며 살아 있는가를 지겹도록 물어대는 나처럼, 그 사내는 40여년 전, 무참한 타국의 정글에서 매일 아침,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기뻐해야 했다. 어릴 적 앨범에서 봤던, 낡은 군복을 걸치고 앳된 얼굴의 사내가 거기 있었다. 사진은 흑백으로 회칠 된 세상이었고 까마득한 옛날로 여겨지던, 그래서 박제된 듯 이제는 견고한 기억으로만 남아있던 사내를 나는 호찌민에서 보게 됐다. 지금의 나보다 어린 나이의 아버지. 가족이 천대받는 일은 기어코 막아야 해서 전쟁터도 마다하지 않았던 사내, 외로움도 굴욕도 참아야 했던 사내, 벌고 또 벌어 자식들 입에 밥 들어가는 게 낙이었던 사내, 그곳이 사지(死地)라 해도 길을 나설 수밖에 없던 사내.

 

누군가 내게 말했다. ‘네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성정 자체가 분명치 않은 이유는 네 소년기에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사회성 결여 때문인 것 같아.’ 맞서 보려다 고개를 떨구고 중얼거렸다. 맞다, 나도 안다, 어찌하여 한 치도 틀리지 않는가, 화가 치미는 한편에 섬뜩함이 있다. 아버지는 내가 태어났을 때도, 성인이 되어서도 그러니까 당신이 일을 그만두실 때까지 줄곧 외지에 계셨다. 더러는 먼 나라에 계시기도 했고 한국에 같이 있을 땐 그마저 지방에 일 있는 곳으로 이리저리 다니셨다. 그러나 일이 없으시면 3개월이고 4개월이고 줄곧 방 안에만 계시다, 어느 날 훌쩍 다시 떠나는 생활을 반복했다. 나는 당시 어렸기로 아버지는 어린 자식들이 보고 싶지 않은 냉혈한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다 다시 집에 오게 되면 일없이 빈둥대는 아버지 모습이 그렇게도 싫었다.

 

어릴 적 아버지 난닝구 (러닝셔츠의 사투리)엔 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속옷에 파스텔처럼 물든 녹물은 처음부터 그런 줄 알았다. 한여름 60℃를 넘어가는 철판에서 꿈쩍 않고 불질을 했기 때문이고, 새벽이슬이 처진 어깨를 적셔도 거대한 선체(船體)에 붙어 불똥을 맞아가며 일했기 때문인 줄은 훗날 알게 됐다. 전쟁터와 사지(死地)를 건너온 사내는 그렇게 일만 했다. 해외니, 지방이니 가리지 않았고 자식새끼 성격이고 뭐고 살아서 일하는 게 축복이었던 사내였다. 사지에서 살아왔으므로 그곳이 어디든 살아 있다는 게 중요했고 일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할 따름이다.

 

어느, 아버지는 나와 단 둘이 타고 가던 차 안에서 월남에 관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스무 살, 콩나물시루 같은 군용 선박에 구겨 넣어져 항해해야 했던 첫 여정, 나짱, 처음 밟은 땅에서 날아오던 이국의 냄새, 낯선 부대의 마크가 휘날리던 깃발, 어머니 생각, 두고 온 후회스런 일들, 전쟁터에서 잃은 동네 친구의 죽음, 살아 돌아온 뒤 만났던 죽은 친구의 어머니. 남세스러운 줄 모르고 이것저것 물어오는 나이든 아들에게 더러는 침묵으로 더러는 추억에 잠겨 조곤조곤 말한 기억이 아득하다.

 

통일궁을 나섰다. 난리 통에 개, 보수했다는 통일궁은 화려하다. 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이들은 여기서 내 아버지를 지휘했을 테다. 내 할머니는 매일 아들이 살아있기를 기도했을 것이고, 죽어 돌아온 아들을 속으로 조심스레 예견하며 마음을 단단히 했을 테고 그 마음이 하루에 열두 번도 바뀌고 또 바뀌며 가슴 졸였을 것이다. 40여년 전, 아버지의 사지였던 이곳에 내가 다시 오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나에게도 여기가 사지일까. 전쟁, 인간에겐 피할 수 없는 숙명일까. 복잡한 질문을 뒤로 하고 전쟁박물관을 나선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던 그때의 유물들이 다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나는 4만동(우리 돈 2천원) 을 주고 들어와 여행자로 구경하다, 사람들이 지나는 복도 한 켠에 앉아 주책스럽게도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부끄러움이 밀려 왔기로 황급히 뛰쳐 내려왔다. 추석이기도 해서 가까스로 눈물을 지우고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밝은 웃음으로 여기 호치민이라 했더니 아버지는,

 

“그래 그라고, 아부지 월남참전 했다 말하지 마라이. 함부레, 니 크일난다이, 아라째...

 

수화기 너머 씁쓸한 표정의 사내를 짐작한다. 웃다가 앞이 흐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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