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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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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4일 13시 07분 등록
안녕하세요. 한 주 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지난 주 월요편지 받고 어떠셨나요? ‘손에 막 힘이 들어가고, 가슴이 답답해지고....’로 시작하는 끝까지 꼭 써 달라는 응원의 답장을 받았지만, 한 주 동안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왜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를 쓰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남의 속 얘기를 듣고 그것을 갚자면 자기 속을 털어놓는 것 말고 다른 길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최인훈 <광장> 중에서) 

변화경영연구소의 마음편지 연재기간은 3년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2020년 2월이면 제가 마음편지를 쓴지 3년이 됩니다. 그동안 저는 독자의 사연을 받아 필자인 제가 답장을 써 드리는 형식의 가족처방전을 연재했습니다. 보내주신 사연 중에 ‘시댁’ 이야기가 가장 많았고, 명절 전에는 특히 더 많았습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첫 마음은, 저를 믿고 사연을 보내주신 분들께 마음의 빚을 갚는 마음으로 기한이 다하기 전에 ‘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습니다’ 시리즈를 끝내보자 했던 겁니다. 제 이야기를 듣고 당신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개개인의 이야기가 모여 더 많은 생각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만들어지면 좋겠습니다. 모두에게 이로운 새로운 가족 문화가 만들어지면 좋겠습니다. 이왕 시작한 일 끝까지 한 번 써 보겠습니다. 

자, 이제 지난 편지에 이어 ‘시숙모님들과의 에피소드’를 이어서 쓰겠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된 저는 일곱 살, 세 살 두 아이를 데리고 아파트 놀이터를 옮겨다니며 또래 여성들을 만났습니다. 1960~70년대 가족계획사업 세대의 자녀들인 우리는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구호에 걸맞게 한 집 건너 한 집이 맏며느리, 외며느리였습니다. 저처럼 종손부를 만나는 일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마흔을 앞두고 있었지만 아들 출산을 고민하는 이가 적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서로 마주보며 “시댁이란 무엇인가?”와 “아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왜 아들을 낳아야 하는가?”를 질문했습니다. 

“정은 씨, 절대 아들 가지려고 노력하지 마세요.”

동네 여성들은 입을 모아 이야기했습니다. 맏며느리나 외며느리로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중반 출생의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공유해 주었습니다. 

사례 #1
태아가 여아임이 확인되면 인공 유산을 감행했다. 여러 차례 유산을 경험한 후 아들을 낳았다.

사례 #2
아들 낳을 때까지 낳아 3남 1녀를 두었다. 다자녀를 양육하느라 남편은 투잡, 쓰리잡을 뛴다. 아이들 교육비가 가장 부담스럽다.

사례 #3
첫째 딸을 출산하고서 임신이 되지 않았다. 둘째는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이 임신을 어렵게 한다는 의사의 소견을 듣고 시험관 시술을 받아 아들 쌍둥이를 낳았다.

사례 #4
딸을 낳고 몇 년 후에 시댁과 연을 끊었다. 부부와 딸, 세 가족은 매우 단란하다. 그러나 명절 때나 시부모님 생신 때가 되면 마음이 편치 않다. 

사례 #5
결혼하고 직장을 다니면서 아들을 낳았다. 직장을 그만두자마자 제사를 물려받았다. 이전보다 삶이 적어는 열 배는 더 힘들어졌다.

또래 여성들은 아들을 낳기 위해 여성으로서 많은 것들을 희생하고 스스로에게 잘못을 저지르며 평생 잊지 못할 상처를 떠안고 있었습니다. 굉장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설사 아들을 낳았다 하더라도 시댁과의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가부장제의 핵심으로 들어가 더 많은 문제에 노출되었습니다. 아들 출산과 상관없이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이 상황을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를 계산했습니다. 3년 이상은 어렵겠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당시 두 딸이 일곱 살과 세 살이었고, 두 딸이 더 커서 남아선호사상의 실체를 알게 되기를 저는 원치 않았습니다. 시댁에서 자랐으므로 두 딸에게 어쩌면 자연스레 배어 있을 가부장제 문화가 그들 자신의 발목을 잡거나 스스로 극복해야 할 벽으로 굳어지는 일이 생기지 않기를 저는 원했습니다. 그전에 모든 것을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딸들이 보기에, 엄마인 저의 삶이 멋지고, 그들의 삶이 더욱 빛나기를 바라는 열망이 올라왔습니다. 이민을 갈까, 다시 유학을 갈까를 고민하다가 가장 작은 것부터 바꾸어나가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시어머니 포함 시숙모님 다섯 분이 전부 제게 가혹하지는 않았습니다. 다섯 명 중 가혹한 정도가 심한 사람은 단 한 분뿐이고, 가혹한 정도가 중간인 사람이 또 한 분일뿐이었습니다. 나머지 세 분 중 두 분은 방관자로서 겉으로는 가혹한 분에게 동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는 않았습니다. 다행히 제게 호의적인 분도 한 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들, 아들’ 하는 소리를 듣는 와중에 미소를 짓고 있는 나란 인간에 대해서 숙고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제가 받는 스트레스의 가장 큰 부분은 생각한 바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속과 겉이 다른 바로 저 자신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저는 조금 솔직해지기로 결심했습니다. 가장 가혹한 분의 전화번호를 수신거부 리스트에 올렸습니다. 그 분이 문자를 보내거나 말을 걸면 요즘말로 ‘읽씹(문자는 확인하고 회신을 하지 않는 행위)’ 또는 ‘듣씹(듣고도 못 들은 척 하는 행위)’으로 일관했습니다. 면전에다 대놓고 ‘아들, 아들’하는 경우에 거짓 미소로 회답하는 대신 눈빛 레이저를 한 번 쏘아드렸습니다. 반면, 제게 호의적인 단 한분께는 가끔 “제 편이 되어 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문자를 보내며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그렇게만 해도 숨이 좀 쉬어지는 듯했습니다. 거대한 둑이 무너지는 것도 작은 구멍 하나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말 한 마디, 눈빛 한 번으로 작게나마 생각하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주 ‘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습니다, 스무 번째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김정은(toniek@naver.com)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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