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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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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24일 19시 35분 등록

이제는, 생긴 대로 살아야

 

내 생긴 대로 살지 못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마흔 줄, 낯가림이 심해지고 낯선 사람과 낯선 곳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 걸 알았다. 아이들 학교 적응을 걱정했더니 왠걸 적응이 어려운 건 아이들이 아니라 나였다. 환영 받지 못하고 안절부절 불편한 자리는 한시라도 있지 못했고 오랫동안 단련했다고 믿었던 사회성이란 것도 알고 보니 허술했던 것이어서 삶의 곡절 어디도 뚫어내지 못하는 연약한 면역력만 되레 확인할 뿐이다. 그렇게 전전하며 나는 너덜해지고 약해지고 깎이어졌다. 누구나 겪는 통과 제의는 아닐 테고 더 깊어지라는 우주의 명령도 아닐 텐데 스스로 벌려 놓은 트랩에 스스로 빠져 허우적대는 꼬라지가 됐다. 세상을 어거지로 살아서 그렇다.

 

월급쟁이 16년에 제 멋대로 살아본 적 없는 인생을 늘 원망했다. 원망만 하다가 인생 종치겠다 싶어 원망하는 그 마음을 비이커에 올려 놓고 연구하기로 마음 먹었다. 엑셀만 들입다 두드리다가 인생의 종말을 맞이하면 억울할 것 같았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이 월급쟁이 시시포스 삶을 벗어나야 하는데 막상 벗어나려니 발목 잡는 것들이 많았다. 아닌 말로 당장이라도 벗어날 수 있지만 새로운 모험 앞에서 당황하며 슬그머니 발을 빼는 얍삽한 내가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원인은 나였지만 나라는 원인 안에 뭉뚱그려진 어떤 욕망과 두려움 같은 것들이 감지되는데 그것들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나를 덮치고 감추고 숨기고 있을까를 가만히 들여본다. 당최 드러나지 않는다. 결국 니체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한나 아렌트의 조언을 받기도 하고 이런저런 돌아가신 저명한 ’(살아 있는 사람이 갑이다)들을 소환했었다. 한꺼번에 벗어 던지려니 이 놈들이 만만한 것들이 아니어서 작전을 바꾼다. 하나씩 구역질 나는 것부터 검지와 엄지로 잡고 징그러운 걸 본 얼굴을 하고 내 던지려 한다. 월급쟁이 연구, 그것은 모두 나 생긴 대로 살기 위해서다.

 

17세기 조선, 사후 영의정으로 추대되기도 했던 이식李植은 살아생전 아들에게 편지 하나를 남겼다. “근래 고요한 중에 깊이 생각해 보니, 몸을 지녀 세상을 사는 데는 다른 방법이 없다. 천금의 재물은 흙으로 돌아가고, 삼공三公 벼슬도 종놈과 한 가지다. 몸 안의 물건만 나의 소유일 뿐, 몸 밖의 것은 머리칼조차도 군더더기일 뿐이다. 모든 일은 애초에 이해를 따지지 않고 바른 길을 따라 행해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실패해도 후회하는 마음이 없다. 이것이 이른바 순순히 바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만약 이해를 꼼꼼히 따지고 계교를 절묘하게 적중시켜 얻으면 속으로는 부끄러움을 면치 못하고, 실패하면 후회를 못 견딜 것이다. 그때 가서 무슨 낯으로 남에게 변명하겠느냐.” – ‘일침’ (정민 지음)에서 인용 -

 

생긴 대로 살아라는 말을 이렇게 멋들어지게 표현할 수 있다. 신이 내리는 마법의 주술이 한 순간에 나를 휘감아 데려가지도 않을 것이고 내가 나에게 가는 길을 누군가가 알려주지도 않을뿐더러 세상의 율법은 그 길을 은폐하기에 급급하여 이제 그 길은 오로지 나에게 물어 갈 수밖에 없다. 이제는 많은 것을 어중간하게 아는 것보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걸 택하고 나에게 침잠하려 한다.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따라 움직이는 현명한 자보다는 차라리 내 힘에 의지하는 바보가 되고 싶다. 사무실에서 키보다 자판을 두드리는 손을 구슬치기에 구슬을 움켜쥐던 손으로 바꾸려니 첫 번째 만났던 벽이 월급쟁이였다. 늦기 전에, 나는 아무래도 그 벽부터 넘어야겠다.

IP *.161.53.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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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5 18:04:13 *.130.115.78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따라 움직이는 현명한 자보다는 차라리 내 힘에 의지하는 바보가 되고 싶다


마음에 콕 박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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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6 06:31:35 *.103.213.218

자기답게 산다는 것이 정말 중요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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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6 21:29:21 *.181.106.109
생긴대로 살기, 동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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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2 09:05:05 *.236.209.222

제게 이식의 편지는 '스스로 당당하라'는 이야기로 마음에 전해지네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다시 한 번 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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