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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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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28일 18시 52분 등록

월급쟁이가 책을 읽는다는 것

 

주말 아침, 해는 떴지만 아무도 깨지 않아 집은 조용했다. 널브러진 책 중 한 권을 잡아 잠시 넘겨본다는 게 얼굴을 파묻고 읽었던 모양이다. 뒤늦게 일어난 딸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 본 것 같다. 그리고는 내게 물었다. ‘아빠는 내가 같이 놀자고 하면 맨날 나중에라고 하면서 책은 왜 맨날 보는 거야?’ 자기보다 책이 중하냐는 말일 텐데 그럴 리가 있겠는가, 책을 읽어야 하는 직업도 아니고 책에서 얻은 지식을 밑천 삼아 써먹을 때도 없는데 고작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것이 피붙이 딸보다 중할 수야 있겠는가. 그래, 그러니까 말이다, 나는 왜 어디 쓸 데도 없는 책을 읽고 있는가?

 

행복에 대한 보편적 요구와 우리 사회의 광범위한 불행은 인간성의 상실로부터 온다. 인간성이 상실됐다는 말은 사람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어서 그것이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부랴부랴 인간성을 회복하려 한다. 인문적 가치를 회복하자 말한다. 틀렸다. 가치, 그러니까 값어치, 값 매겨진 무엇은 자 전후에 써선 안 된다. 이미 인간성이 훼손된 지점에서 돈을 벌어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 벌었던 돈과 시간을 써가며 되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애초부터 잘못 꿰어진 단추다. 시인 김수영이 말한 것처럼 혼란이 없는 시멘트 회사나 발전소의 건설은, 시멘트 회사나 발전소가 없는 혼란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는 그대로 두고 너만 잘하면 된다는 식의 자기계발서가 인문적 소양으로 둔갑하는 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 위해 돈에 걸신 들린 사람처럼 맹목적인 처세술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 인문학적 문구와 서정으로 회칠되어 다시 인간을 말하고 있는 장면을 자주 목격한다.

 

이 지점에서 월급쟁이가 책 읽는다 것에 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된다. 월급쟁이는 훼손된 지점한 가운데 서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시포스가 매일 올려야 했던 돌무더기가 있는 바닥이다. 꼭대기로 올리면 보란 듯이 떨어지고야 마는 바닥에 늘 월급쟁이는 있다. 어제 읽은 책에서 자유와 사랑을 알게 됐지만 다음 날 아침엔 여지 없이 월급이 지배하는 세계로 다시 들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책 읽을 땐 구름과도 견주었던 영혼의 높이가 출근하자마자 땅으로 떨어지는 일을 매일 목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예 몰랐다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즐겁게 지하철에 몸을 맡길 수 있겠지만, 노예적 일상과 돈 벌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빌어먹을 세계의 질서가 자각된 마당에 사무실로 들어가는 발걸음은 천근만근이다. 할 수만 있다면 책 속에 매장된 영혼의 부비트랩을 과감하게 밟고 고마 터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읽지 말지니 사는 게 괴롭나니, 살지 말 것을 읽기가 괴롭거늘.

 

지금 살아있는 나를 알기 위해 죽은 자들의 지혜를 빌려야 한다는 건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나를 먼저 살리고 봐야겠다는 마음이 앞선다. 온갖 모욕에도 책 읽고 생각을 정리하는 일을 멈추지 마라. 읽은 책은 내 정신세계를 이루는 골이 된다. 골은 뼈다. 뼈는 근간이다. 골수와 피는 뼈에서 시작해 뼈에서 죽는다. 내 생각의 뼈는 무엇인가? 책이다. 죽은 지 백 년이 넘은 자들의 책, 그럼에도 여전히 살아남은 책을 읽어라. 그렇지만 책은 결국 버려야 한다. 사랑을 찾고 나면 책은 버려야 한다. 피안에 닿으면 타고 왔던 나룻배를 버리는 것과 같다. 내 모든 것을 걸어 이루고자 하는 것, 나를 바쳐 창조할 사랑의 대상을 찾게 되면 책은 무용하다. 사랑은 책보다 귀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책을 읽는 이유는 내가 사랑하는 것을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의 일,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았다면 선인과 현자의 말들을 깡그리 잊어도 좋다. 왜냐하면, 왜냐하면, 그때, 나는, 자유이므로.

 

사족) 그날 밤, 딸의 침대에 같이 누웠다. 전날의 꿈 얘기를 하던 딸이 대뜸 꿈은 참 이상한 것 같다고 했다. 꿈 꿀 땐 진짜인 줄 알았는데 깨고 나면 진짜가 날아가 버린다고 했다. 나는 말했다. ‘전생이라는 게 있어서 그게 가끔 꿈으로 나타날 때가 있다, 어제 꿈에 나왔던 너는 아주 아주 오래 전 네가 실제로 살았던 너였는지도 모른다.’ 한참 pause 가 있어 같이 침묵하던 중에 딸이 말했다. ‘무슨 개소리야.’ 직선을 좋아하는 여성은 참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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