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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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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12일 19시 26분 등록


월급쟁이의 스승


어느 날 수많은 군중이 석가의 말을 들으려 모여 앉았다. 오래 기다린 끝에 드디어 석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군중 앞에 선 석가는 아무 말 없이 꽃을 들어 보인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석가가 말하려는 게 뭘까, 저 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느닷없이 꽃을 들어 보인 깨달은 자의 의중을 파악하려 모든 사람들이 여념 없던 그때, 가섭은 조용히 일어나 미소 짓는다. 석가는 가섭을 보고 천천히 말했다. “가섭이 깨달았다”. 저 유명한 염화시중 拈華示衆의 미소다. 가섭은 사람들이 우러르는 부처를 보지 않고 아름다운 꽃을 보고 미소 지었다. 모든 사람들이 부처의 의도를 읽어 내내리 할 때 가섭은 지축을 울리는 부처의 모습보다 꽃이 아름다워 넋을 놓고 미소 지었던 것이다. 부처라는 큰 벽을 넘어섰다는 의미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스승을 만나면 스승을 넘어서야 한다. 내가 월급쟁이에 목을 매고 달려드는 이유는 월급쟁이를 넘고 싶어서다. 어쩌다 보니 내 앞에 가장 큰 벽이 되었고 그것을 넘어서지 않으면 삶의 다음으로 나아갈 수 없어서다. 월급쟁이를 죽이는 방법은 월급쟁이 정체성을 갈아 입는 것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내 안에 숨어 있는 삶의 노예성을 끝까지 파고 들어 찾아내고 그것들을 모두 드러내 대나무를 깨듯 가차없이 부술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날은 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찾아 헤맸는지 모른다. 나는 그 중에 월급쟁이를 가장 극적으로 뛰어넘은 한 사람을 알고 있다. 내 스승에 관해 말하려 한다.


한 시인이 있었다. 나는 지독하게 평범했는데 그 시인은 나에게 너의 평범이 위대함으로 가는 길이라 늘 말했다. 나는 믿지 않았으나 돌이켜보니 그 말은 무섭고 아름다운 주술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때 나는 천둥벌거숭이였는데 시인은 나에게 북극성으로 향하는 떨리는 나침반 하나를 툭 던졌다. 시인도 오랫동안 너저분한 월급쟁이의 삶을 살았는데 내게 던져준 나침반은 그가 쓰던 그것이었다. 그가 월급쟁이를 뛰어넘었던 방법을 알려줬던 것이다. 지저분한 삶을 헤어나오지 못하던 나는 냉큼 그 나침반을 받아 들고 삶의 지도를 정치하고 자북磁北을 맞추었다. 내 안에 조금 특별한 하나를 스스로 끄집어 내어설랑은. , 시인아 어디 있는가. 스승은 끝내 시인이 되었다.


나는 스승이 좋아했던 제자는 아니었다. 분명 그랬을 테다. 그가 그토록 제자들로부터 기다리던 천진한 질문 하나 하지 못했고 살갑게 다가서지도 못했다. 살갑기는커녕 인사치레라도 제대로 한 적이 있었다면 이토록 그립진 않았을 테다. 그의 제자라면 한번쯤은 몰려가 본 적 있을 스승의 가택도 가보지 않았고 자연스레 깊게 나눈 대화의 기억이 없다. 식사할 때 그의 면전에 앉기가 부담스러워 일부러 자리를 피하기 일쑤였다. 왜 그랬는지 모른다. 나는 그렇게 졸렬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스승에겐 나는 별 볼 일 없는 제자 중에 한 사람에 지나지 않지만, 나에게 스승은 그의 작은 흉터마저 닮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초라한 시민성에 남지 않게 했다. 월급쟁이 사다리 끝이 무엇인지 볼 수 있게 했고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미친 삶의 대열에서 탈주하게 했다. 여전히 월급쟁이 째째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잘 살고 있는 것이냐를 늘 묻는다. 어쭙잖은 middle class value는 개에게 던져 준지 오래고 이제껏 이룬 게 어디냐며 차지한 자리 뺏기지 않으려 안절부절 않는다. 그런 게 있는지도 모르겠으나 혹시라도 있다면 지금의 지위나 안위를 더 이상 애지중지 하지 않는다. 내 삶을 실험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실험은 실패가 반이 될 테고 성공하더라도 듣보잡 필부(匹夫)의 삶을 세상은 알아주지 않을 게 뻔하다. 그런들 어떠랴, 깨지고 낙담했다가 다시 희망하고 떠난다. 스승이 가르쳤고 나는 배웠다.


그가 내 삶에 등장한 건 순전히 우연에 기대어 있다. 그 우연을 설명할 도리는 없다. 언젠가 이 말을 넌지시 지나가며 했을 때 스승은 버려질 그 말을 다시 주워 담아 정색하며 나에게 일렀다. ‘준비된 자, 간절한 자가 스승을 만나는 건 우연이 아니다.’ 그랬다. 월급쟁이 그 지난한 인생이 에베레스트를 오르고 작가가 되고 삶의 터전을 마음대로 떠나는 걸 보면 모든 것은 그리 되려 정해진 만남이었는지 모른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세상은 위험하다고 했지만 스승은 바로 그 길이 네가 유일함으로 가는 길이라 말했다. , 간지 폭발이다.


내 나이 마흔을 넘긴지 오래다. 오래 전 스승이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던 때와 얼추 같은 나이가 됐다. 이 사실에 나는 몸 속 깊은 곳까지 동요했었다. 그를 뛰어넘으리라. 스승과 대자 구도를 이어가려는 게 아니라, 그의 말과 행동을 따져 묻고 연구적 대상으로 삼겠다는 게 아니라, 나는 그의 삶이 극적으로 전환됐던 그 시점의 에너지를 넘어서고 싶었다. 자유로운 결정으로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느껴지는 삶의 충일함을 끝까지 밀어 부치는 욕심을 부려보고 싶다. 그런 중에 스승은 친구이자, 연인이고 또 도반이 됐다. 깊이 그리고 또 깊이 내 내면의 오지를 탐험할 때 동행하는 단테의 베아트리체와도 같은. 그 길을 함께 걸으며 스승에게 안내 받고 그러다 따라하고, 모방하며 닮아가고, 닮아가며 끝내 넘어서려 한다.


이 글을 끝내려니 내 눈앞에 갑자기 멋진 수염을 기르고 얼굴 무너지도록 웃는 시인이 나타난다. 항상 그의 오래 된 책상에 앉아 무엇을 쓰거나 읽는 한 시인. 스승은 시인이었고 마지막 그의 삶은 시였다. 그 해 봄, 병색 짙은 스승의 초췌한 모습에 눈물 보이는 우리에게 춤을 추라 했다. 그리고는 마지막 힘을 내어 눈으로 말했다. ‘이것이 시와 같은 삶이다.’ 행간의 도약과 함축, 복선과 반전이 있는 시와 같은 삶 말이다. 모레, 스승의 날엔 실로 오랜만에 아주 멀리 떨어진 그와 마주해야겠다. 요새 비대면이 유행인건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간지나는 그 목소리, 성대모사라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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