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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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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2일 16시 58분 등록

침묵으로 오르는 자

 

말주변이 없기도 하고, 말이 느리기도 해서 말을 하는 것보다 듣는 게 편할 때가 많다. 말을 하면 그 안에 경박한 언사가 똬리를 틀고 있다는 믿음 때문에 말을 삼가 하는 편인데 이런 습관이 좋지 않을 때도 많다. 말을 해야 할 때 적절하게 하지 못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번잡한 일들을 벌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앞선 나머지 나서야 할 때 나서지 못하는 건 성실과 경청으로 포장한 졸렬함인 줄 안다. 가야 할 길을 비켜가는 건 얍삽한 일이다. 분명 경계해야 할 일이지만 가십이 난무하는 요즈음엔 곁에 있어도 말없이 침묵할 줄 아는 사람이 그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선가, ‘인간의 삶의 절반은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암시하거나 얼굴을 돌리고 침묵하는 가운데 지나간다.’

 

말하지 않고, 느리고, 서두르지 않는 것들이 나는 좋다.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빠르지 않다. 이 세상 모든 풍요로움은 초조하지 않다. 이 세상 모든 환희는 서두르지 않는다. 산이 그렇다. 산은 사람을 숨 차게 해서 말하고 싶어도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하게 한다. 산에서 미덕은 느린 것이고 서두르면 가차없이 다치게 된다. 산에서까지 시간에 쫓기는 자들을 산은 모질게 대한다. 억겁으로 다져진 화강암에 발을 댄 자들은 거대한 지구의 등껍질 위에 작디 작은 등산화 발바닥을 맞대고 있음을 알아야 할 테다. 부디 산에 오를 땐 공간도 잊고 시간도 잊어라. 말초적 갈애渴愛는 애초에 버리는 게 좋다.

 

시간에 쫓기는 사람은 죽으러 가는 사람이니 그렇다. 목적지 도달에만 혈안이 되어 가속 페달을 밟는 드라이버는 창밖에 들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산 너머로 지는 해가 얼마나 황홀한지 알지 못한다. 우리 생이 꼭 그와 같으니 쫓기고 쫓기다 결국 막다른 곳이 무덤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서는 안 될 일이다. 우리의 일도 가족도 의무나 책임이 아닌 그저 멈추고 바로 보면 그저 멋진 산처럼 자신이 사랑하는 것으로 가득 채워 사랑하면서도 한번도 사랑한 적이 없게 만들면 좋을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는 늘 이런 생각 끝에, 아름다운 장면을 보는 중에도 휴대전화 포털 가십에 얼굴을 파묻고 침묵할 줄 모른다. 그것은 말하지 않지만 무언의 조잘댐이 사방팔방에 퍼지며 귀청을 때리는 고요함이다. 포털 가십과 영상매체를 습관적으로 보며 시간을 죽이는 습성에는 어떤 인간적 함의가 숨었을까? 은밀한 관음적 욕망, 남의 불행을 보고 느끼는 상대적 행복, 아니다. 그것은 창조할 필요 없고, 상상할 필요가 없고, 사유하고 생각하는 것을 포기한 광범위한 불행의 마스터베이션이다.

 

아무런 인간적 제어가 작동하지 않고 뉴스에 즉각 반응하는 경박한 인간의 표상이 본래 모습임을 알게 되고, 수많은 사람 중에 하나, 대중이라는 개념 뒤에 숨어서 편리한 훈수와 처세에만 촉수를 세우는 인간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보는 순간만큼은 훌륭한 사람이 될 필요가 없어지고, 당면한 프로젝트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자식들 걱정을 뒤로 해도 되는 것, 맞닥뜨려 풀어야 할 문제들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시시함, 지루함, 일상이라는 번쇄적 패배의식을 잠시 동안이라도 환기시키고, 팔짱 끼고 진흙탕 싸움을 구경할 수 있는 스텍타클의 지위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주인 됨을 포기한 노예도덕이 펼치는 발작적 욕망의 투사가 포털과 영상매체에서 벌어진다.

 

경박한 일상, 무엇이든 알고 있어야 하고, 뭐든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 질질 끌려 다니는 삶에서 빠져 나와 산으로 가라. 산을 오를 때 인간의 몸은 오래 전 ‘진짜 인간’이었던 때를 불현듯 기억해낸다. 휴대전화에 머리를 처박은 인간이 아니라 오랜 옛날의 유목민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인간이다. 산에서는 벌벌 떨고 나약한 현대인의 뇌가 강인한 야만과 야생의 뇌로 리셋팅 된다. 산이 주는 야생의 신선함이 전화기에 찌든 뇌를 풍욕한다. 많은 말을 하지 않지만, 온 몸은 살아있다는 감각으로 충만하다. 물을 찾고, 잠자리를 찾고, 가야 할 길과 예측되는 위험을 감지하고, 걷고 뛰는 중에 오감은 곧 살아있다는 존재의 끊임없는 확인이다.

 

알베르 까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말한다. ‘한 인간은 그가 말하는 것들에 의해서보다 침묵하는 것들에 의해서 한결 더 인간이다.’ 침묵으로 오르는 자, 알피니스트는 불안한 현대인의 오아시스 같은 인간이며 지구를 통째로 사는 신화 같은 인간이다. 지금, 붉은 배낭을 메라.



IP *.161.53.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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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8 21:15:25 *.52.45.248

눈에 보이는 산 말고도 산은 많은 것 같아요 ! 

평생을 오르고 올랐는데도 아직도 끝에 이르지 못한 그 산... 

이젠 조금은 보이네요, 육순이 되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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