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오늘의

마음을

마음을

  • 장재용
  • 조회 수 1036
  • 댓글 수 1
  • 추천 수 0
2021년 8월 31일 17시 46분 등록

나는 나를 본 적 없다

 

공기가 희박한 높은 산을 오를 때 내 심장은 이 세상 심장이 아니다. 벌써 수 시간째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배낭은 무게를 잊게 하고, 내 팔이 더는 내 팔이 아니게 한다. 핏기가 빠진 다리는 일찌감치 감각을 잃어버리고 무심하게 걸음을 반복하는 기계 같다. 살아있던 감각들이 느껴지지 않고, ‘라고 알고 있던 것들이 죄다 나를 벗어나 버리는 것, 등반의 또 다른 이름은 자기외화自己外化다.

 

세상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 사람은 없다. 다만 봤다면 거울과 사진, 그리고 영상으로 자신의 모습을 봤을 뿐이다. 그것은 자신의 모습을 직접 본 게 아니라 상에 맺힌 자신의 모습을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눈으로 나의 모습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태어나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자신을 맨눈으로 보지 못하고 죽는다.

 

그렇지만 거울과 사진으로 보는 나는 나의 모습이 맞다. 거울과 사진은 이 시차(視差, 자신을 볼 수 없는 자신의 시선)를 극복한 것처럼 보인다. 볼 수 없는 것을 본 것 같은 이 강한 시차가 자기외화의 요체다. 그것은 단순한 역지사지의 교훈적 사설이 아니라 사물 자체를 자신으로부터 빠져 나온 완전한 타자他者로 대하는 자세다.

 

자기외화는 자신을 타자로 대하는 방식이다. 고도의 수행자는 스스로 이 강한 시차로 자신을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사물 자체로 대하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삼법인三法印 중 하나인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경지는 이 시선으로 완성되는 것이리라. 이 시선을 가진 자는 편안하다.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빼내 자신을 바라보는 세계는 모두가 자신으로 보인다. 또 모두가 자신 아닌 것으로 보이게 되니 나를 잊는 게 아니라 내가 없어지는 무화無化의 세계다.

 

알면 알수록,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모든 것은 흐리멍덩해지고 답이 없다는 한 가지만 점점 명확해진다. 이젠 포털에 소개되는 자기계발서의 요약이나, 누군가가 삶에 답이 있는 양 말하면 웃고 마는 것이다. 답을 가졌다고 믿는 진리 담지자 같은 오만함만을 경계하라. 철학은 진리를 밝힌다지만, 분명한 건 사는 데 철학은 필요 없다. 철학적 사유가 내 삶을 온전히 덮이게 하지도 않을 것이다. 삶에 답이 없는 만큼 답이라 우기지 말고, 해라, 마라 하며 진리 담지자의 맹목에 빠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자신이 사물 자체인 것과 같이 나 아닌 타자를 존중하며 사는 법 밖에 없다.  

 

십방세계를 둘러봐도 얼어붙은 눈 밭 뿐인 설산에서 심장과 다리와 팔이 나를 빠져 나와 나 아닌 것이 되는 경이로움은 나 스스로 미물이 되는 자기외화의 시선이다. 쌔빠지게 산에 오른 자, 그대는 나 아닌 나를 스스로 만들어 내고 자신의 시선으로 자신을 본 유일무이한 인간이다. 무아라는 강한 시차를 가진 답 없는인간이다. 혼란한 개소리는 뒤로 하고 이제 정상에 다 올랐으니 용기 내라, 산을 내려가면 고민과 사유는 사라지고 오늘 뭘 먹을까만 남을 것이니 자신감을 가져라, 이 세상 잘난 인간들도 모두 이 고민을 최고로 안고 산다.


 

IP *.74.104.25

프로필 이미지
2021.09.03 16:39:42 *.169.227.25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을 시작하면서 그랬다는군요 

" 다 헛되고 헛되니 헛되도다" 

그래도 인간적인 노력으로 신에 다가가려는 정성이니 중요하다 그 자체로 중요하다라고

누군가 물었습니다. 

'사는 거 그리고 인생이 뭐냐고 ? ' 

답하기를 

' 나도 모르니까 살고 있는거 아닌가 .. 아마 알면 재미 없을지도 모르지 !...' .라고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336 [수요편지] 잡념, 상념, 걷기 [1] 불씨 2024.04.17 111
4335 [내 삶의 단어장] 코인, 영어 할배 [1] 에움길~ 2024.03.12 166
4334 [수요편지] 전문가에 대한 미신 불씨 2024.03.27 200
4333 [수요편지] 거시와 미시 불씨 2024.03.13 208
4332 [수요편지] 목적을 위한 삶, 삶을 위한 목적 [1] 불씨 2024.03.06 221
4331 [책과 함께] 모든 나라의 역사는 같다 /피의 꽃잎들 [1] 에움길~ 2024.02.27 236
4330 [내 삶의 단어장] 각인, 그 무엇으로부터도 에움길~ 2024.01.30 251
4329 [내 삶의 단어장] 바구니, 진정성 [2] 에움길~ 2024.02.20 256
4328 [내 삶의 단어장] 덧없이 흐르는 이야기: 마그리트와 프랑스어와 루이비통 [1] 에움길~ 2024.03.05 259
4327 [수요편지] 행복에 대한 또다른 이런 저런... [1] 불씨 2024.02.28 267
4326 [내 삶의 단어장] El Condor Pasa 철새는 날아가고, 나는 편안하고 [1] 에움길~ 2024.03.19 293
4325 언제나 들리는 소리 어니언 2023.12.21 294
4324 [수요편지] 행복에 관해 헷갈려 하지 말아야 할 것들 불씨 2024.02.21 303
4323 [내 삶의 단어장] 호박, 마법 또는 저주 [1] 에움길~ 2024.02.06 305
4322 [수요편지] 잠 못 드는 밤 비는 안 내리네 [2] 불씨 2023.11.22 321
4321 [수요편지] 답 없는 리더 [1] 불씨 2024.02.07 327
4320 안 해도 좋았을 도전이란 없다 어니언 2023.12.07 343
4319 [내 삶의 단어장] with, 함께 할 수 없다면 에움길~ 2023.07.10 348
4318 [수요편지] 흉터 [2] 불씨 2024.02.14 352
4317 [수요편지] enlivenment 불씨 2023.12.20 3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