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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15일 15시 45분 등록

화요편지

종종의 종종덕질

일생에 단 한 번, 그날의 도시락


D-3, 수능을 코 앞에 둔 고 3 수험생의 엄마로서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물건이 도착했습니다. 일생에 단 한 번, 운이 따르지 않으면(?) 두 세번까지 쓰게 될 지 모르는 이 가성비 떨어지는 물건은요. 바로 보온도시락통입니다. 


아이들이 전면급식을 먹게 된 이래, 소풍이 아니면 도시락을 쌀 일은 없어졌습니다. 소풍을 가더라도 김밥처럼 야외에서 식어도 먹기 좋은 특식을 싸가는 편이니 무거운 보온도시락통은 쓰지 않죠. 게다가 최근 수 년간 코로나 사태로 인해 외부 체험학습은 전면 폐지되다시피 했으니 아예 도시락을 쌀 기회가 없어진 겁니다. 


그렇게 까맣게 잊고 있던 보온도시락통의 존재감이 수능 한 달 전부터 여기저기서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수능 기획전 보온도시락 할인 대전!’ ‘합격을 부르는 필수템  00 보온도시락 구입찬스’ 요런 광고문구들과 함께요.  장장 7~8시간 동안 진행되는 수능시험 당일은 시험장에서 급식이 제공되지 않으니 각자 도시락을 싸가야 하고, 추운 겨울에 혹시라도 찬 밥을 먹다 체하면 큰 일이니 과연 보온도시락통은 수능 응시생들의 필수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시험 당일 아들의 컨디션을 지켜주기 위해 엄마가 할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일이 든든하고 속 편안한 도시락을 만들어 보내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도 한시적 할인이라는 광고문구에 맘이 급해져서 ‘운이 좋으면’ 일회용품이 될 수도 있는 요  물건을 거금 6만 8천여 원을 들여 주문했습니다. 택배로 도착한 보온도시락통을 분리해서 일일히 씻어 말리고, 보온 기능에 문제가 없는 지 점검 차 하룻밤 동안 따뜻한 물을 담았다가 다음 날 확인하는 절차까지 마치고 나니 그제서야 조금 안심이 되더라고요. 


그리고는 아이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수능 당일에 필요한 것들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불고기? 계란말이? 소고기무국? 비엔나소세지? 뜨거운 물? 차가운 물? 아니 둘 다 가져가자. 하여튼 절대로 탈이 나지 않을 반찬이어야 돼. 배가 아프지 않을 메뉴, 늘 먹던 것 중에서 고르자. 참, 집중하려면 귀마개도 필요해!’ 아이의 주문은 꽤나 구체적이더라구요. 


늘 시크하고 무심한 녀석이라 별 생각 없을 줄 알았는데, 배앓이가 잦은 체질이라 본인도 꽤나 신경이 쓰였나 봐요. 평소 같으면 엄마가 대충 알아서 해줘, 하고 말텐데 도시락은 물론이고 수능 당일까지 계속 순하고 편한 음식만 먹어야겠다며 엄마가 어떤 음식을 할 건지 확인을 다 하고 말이죠.


그러니 수능 당일 도시락은 물론 3일간 집밥 식단이 갑자기 고민이 되는 겁니다. 늘 먹던  음식, 탈 안 나는 메뉴를 고르는 게 뭐 그리 어려울까 싶었는데, 인터넷 검색창에 수능 도시락을 치니 줄줄이 추천 메뉴와 사진들이 뜨더라고요. 전국 오십만 수험생 엄마들의 고민이 일맥상통하는 거겠죠… ^^;


그 와중에 *플릭스에서 특이한 영화 제목을 발견했는데, 이름하여 ‘461개의 도시락!’ “뮤지션 아빠가 매일 도시락을 싸주고, 고등학생 아들은 대신 하루도 결석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한다” 라는 간단한 시놉시스가 붙어 있었습니다. 평소라면 딱히 끌릴 게 없는 줄거리였는데, 마침 도시락 때문에 일대 고민에 빠진 터라 무심코 플레이 버튼을 누르게 됐어요. 그런데 음… 빨래 개는 동안 대충 훑어봐야지 싶었던 영화를 결국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보고 말았습니다. 


줄거리는 시놉시스 그대로, 늘 자기 세계에 빠져살던 뮤지션 아빠가 아들에게 3년 간 매일 아침 정성을 다해 도시락을 싸주고, 부모님의 갑작스런 이혼과 입시실패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통과하던 아들은 매일매일의 도시락 덕분에 다양한 해프닝과 인연을 만나서 완벽하진 않지만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는 가족의 의미를 발견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사실 제가 이 영화를 틀게 된 건 461개나 등장하는 도시락 메뉴를 참조해 수능 도시락 메뉴 선정을 마무리짓자는 얄팍한 속셈 때문이었는데 말이죠. 낯선 음식을 질색하는 아들의 성향 상 의미가 없겠더라고요. 그럼에도 한 가지, 얻은 것이 있었습니다. 


매일 매일 도시락과 씨름하던 아빠와 아들 덕분에 지난 십수년 간 출퇴근 준비에 쫓기는 와중에도 아이들의 아침과 저녁을 어떻게든 해먹이려 애썼던 저의 날들을 돌아보게 됐거든요. 이제 막내가 이틀 후 수능을 치르고 나면, 제 손길 없이는 하루도 못 살것 같던 아이들이 모두 성인이 된다는 사실도 퍼뜩 깨달았고요. 그러자 누가 칭찬해준 것도 아닌데 마음이 뿌듯,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어어… 그러고보니 내가 꽤 대단한 일을 했군. 잘했다, 애썼다, 나님!!!!’ 


뜬금없이 켜진 자화자찬 모드에 요 며칠 지쳤던 몸과 마음에 난방이 들어온 듯 훈훈해지고 부쩍 기운이 났어요. 내친 김에 저처럼 수능 도시락을 고민하고 있을 지 모르는 엄마, 아빠, 그리고 수험생들 모두에게 든든한 한 끼의 응원을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다들 그간 너무 너무 애썼고, 수고 많았잖아요. 11월 17일, 이 날만큼은 우리 수험생들에게 세상의 모든 행운이 쏟아지기를, 그리고 후회 없는 결과를 맞이하기를 바라며 오늘의 편지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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