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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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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1일 15시 42분 등록

[월요편지-내 삶의 단어장


쵸코맛을 기다리는 오후 1

 



  핏덩이?”

   언니의 전화였다. 아랫집으로부터 발코니 방충망 전체를 교환하거나 전문 업체를 통해 청소 해주기를 요청받았다고 했다. 전해 듣는 나는 엽기적인 사건이 벌어진 줄 알았다. 아니, 엽기적인 사건을 일으킨 줄 알았다. 나의 어린 조카가.

  퇴근 후 언니는 진저리치며 발코니 창문 청소를 요구하는 아래층 사람과 마주쳤다. 방충망에 무언가 묻었다며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이 던진 말은 핏물을 뚝뚝이었다. 상대는 핏물아니라 핏물이라 말함으로써 그것이 우연이나 피치 못한 것이 아니라 고의로 벌어진 일이라 생각하고 있음을 내비쳤다. 얼룩이 무엇인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아랫집에선 계속 삼겹살을 던진 것이라 주장했다. 굳이 삼겹살 덩이를 던질 까닭도 삼겹살 얼룩이라는 확실한 증거도 없지만 그들의 주장은 강했다. 강한 확신을 바탕에 두고 대책을 요구하는 자세 또한 당연한 듯 혐오와 비난이 동반되었다. 자신의 집 방충망에 묻은 얼룩을 핏물을 뚝뚝 흘리는 삼겹살이라고 여겼고, 그건 윗집에서 날라 왔을 것이고 윗집엔 아이가 있으니 당연히 그 아이가 한 짓이고, 그러니 윗집에 대해 비난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기는 듯했다. 아이와 더불어 부모까지를 비난할 이유 말이다.

  더러움의 정도와 더럽힘의 주체에 대해 이견이 있으나 위층에서 행한 것이라는 주장에 전적으로 반박할 수는 없었다. 대체로 아파트 층간소음이란 바로 윗집에서 아랫집에서 행해지는 것이라 여겨지며 층간오물 역시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더 개연성이 높았다. 무엇보다 발코니에서 놀던 아이가 정말 무언가를 떨어뜨릴 수도 있었겠다 싶었고 퇴근하는 사람을 붙잡고 막무가내로 주장을 펼치는 아랫집 사람들과 싸우고 싶지 않았던 탓에 일단은 요구를 수용하고 언니는 돌아왔다. 냉장고에 삼겹살이 있었던가, 도대체 구워먹기도 모자란 삼겹살 덩이가 왜 아래층에 떨어져 있는지, 정말 아이가 던진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고, 삼겹살 핏물이라고 주장하는 그 얼룩이 무엇인지 궁금했을 테다.

  글쎄, 언니 또한 당연히 아들이 무언가를 행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서둘러 물어보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한밤중에 문 두드리며 아이 울음소리가 시끄러우니 좀 조용히 해달라는 사람들, 막상 그들이 확인한 건 그저 한참 고픈 잠에 숨소리만 그득한 것을 확인하고는 무안해져 , 이 집이 아닌가 보네요라며 서둘러 돌아서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릴 새도 없고, 낮밤을 모르고 시끄러운 소리가 항상 어디인지 모른다는 것, 그저 그렇게 공간을 뒤엎는 막연한 소리들이 쉴새없이 나오며 휘청이는 곳이 아파트라는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을 거다.

  벽 하나를 두고 타인의 방과 방이 맞닿아 있는 아파트라는 주거공간이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고, 공사비 절감을 위해 부실 자재를 사용함에 따라 층간소음이 문제가 되고 있지만 건축규제로 풀어내거나 시공 방법을 달리하는 해결책은 절대 제시되지 않는다. 아주 오랫동안, 그리고 앞으로도 많은 나날 아파트 공화국일 대한민국은 언제나 구조적으로 바뀌어 시스템화 해야 하는 일에 무감하다. 늘 개인과 개인이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일로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며 개개인의 선의에 의지한다. 그렇게 생겨먹은 아파트 구조에 맞추어 뛰지 않으며, 밤늦게 가전제품을 사용하지 않으며, 발뒤꿈치를 들어 조용조용히 걷거나, 숨소리조차 최소화하며 살아내면 되는 일이다. 윗집은 그렇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고, 아랫집은 거슬리는 소리에 밤잠을 설치는 일이 있다면 지나치게 예민한 성격이 아닌지 반성해야 한다. ‘소리에 관한 한 개인의 몸과 마음속에 참을 인을 새기며 살아야 하는 것이 아파트 공화국의 세상이다.

  참지 않으면 폭발한다. 아니, 지나치게 참다보면 폭발하려나. 층간소음을 방지하기 위한 슬리퍼와 매트, 층간소음을 극복(?)할 귀마개, 층간소음 발생 시 보복!할 우퍼 스피커가 만들어지는 것보다는 층간소음을 줄일 수 있는 자재를 사용하여 아파트를 짓고 구조와 높이를 조정하는 일이 더 필요할 테지만 그런 일은 없다. 아파트는 더 많은 수익 창출을 위한 곳이지 사람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아름답고 행복한 공간일 수는 없을 테니까. 매일매일 층간소음으로 인한 다툼, 사망 기사가 끊이지 않지만, 어제와 다를 리 없는 아파트만이 계속 증가할 뿐이다. 마침내, 아파트 속에는 소리를 만들지 않고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람들만이 살아가는 곳이 될지 모르겠다.

  아무튼, 윗집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아랫집의 항의에 대해 우선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할 아파트 공화국의 사회통념상 집으로 돌아온 언니는 무안함과 불쾌함이 뒤섞였을 테고 당황과 당혹스러움이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모든 것이 뒤섞여 잔뜩 화가 올라왔을 지도 모른다. 삼겸삽을! 왜 삼겹살을! 도대체 왜 삼겹살을! 아들아, 넌 거기서 도대체 뭘 한 거니?

 그리고, 곧 알게 된 그 핏덩이의 정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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