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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3일 08시 10분 등록

"인간은 동굴의 좁은 입구를 통해 만물을 보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다. 만일 우리가 인식의 좁은 동굴 문을 박살낸다면, 만물은 그 자체의 무한한 모습을 인간에게 드러낼 것이다"  
- 윌리엄 블레이크



혜능과 신수

중국 당나라 시대 선종의 5조인 홍인(弘忍)이 제자들에게 깨달음에 대해 말해보라고 하자 수제자로 인정받고 있던 신수가 말했습니다.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다.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가 붙지 않도록 해야 한다."

스승인 홍인을 비롯한 제자들은 신수의 말을 인정하고 칭찬했습니다. 절간 부엌에서 일하다 이 게송을 들은 혜능은 글을 아는 동자를 불러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쓰게 합니다. 

“깨달음에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도 대(臺)가 아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느 곳에 먼지가 붙겠는가?”

결국 스승 홍인은 신수를 비롯한 쟁쟁한 제자들을 젖혀두고, 부엌에서 일하는 무지렁이 혜능에게 불법을 계승합니다. 극화하자면, 이 게송 한방으로 중국 불교의 역사에서 신수는 찌그러지게 되고 우리는  육조혜능만을 기억하게 됩니다. 이는 해골바가자에 담긴 물을 먹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삼국유사의 유명한 설화 한방으로 원효가 의상보다 뛰어난 인물로 후대에 기억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사실 신수나 의상은 혜능이나 원효만큼이나 훌륭한 승려였고, 불교계에 남긴 업적도 지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 사람들이 원효나 혜능을 우러러 보는 이유는 뭘까요? 그것은 원효나 혜능이 우리가 닿을수 없는 천재의 경지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수나 의상처럼 착실히 닦아서 조금씩 나아지는 것, 즉 점수(漸修)는 평범하다고 생각합니다. 점수를 통해 이루는 점오(漸悟)의 가치 역시 대단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요. 사람들에게는 사물의 이치를 단박에 깨치고 개오(開悟)하는 돈오(頓悟)가 더 훌륭해보입니다. 더 고차원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범인이 넘볼수 없는 경지라고 생각하니 더이상 생각할게 없는 겁니다. 자기와는 상관없어 보이고 그냥 멋있어 보이는 딴 세상 이야기가 되는 셈이죠. 

과연 점수점오가 없는 돈오가 가능할까요? 불교의 깨달음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보통의 사람에게 돈오라는 것은 로또나 다름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오와 점오, 돈수와 점수는 글자로 구분하듯이 확연히 나눌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아는 것만큼 볼 수 있지만, 또한 볼 수 있는 만큼 알 수 있습니다. 착실한 수행으로 임계점을 넘어서면 돈오 역시 가능할 것입니다. 기연을 얻어 돈오의 순간에 들어서도 받아들일수 있는 그릇이 없다면 풍화되고 마는 작은 깨달음에 그칠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시 신수와 혜능의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사실 신수는 측천무후를 비롯한 세 명의 황제로부터 국사로 추앙받았던 대선사입니다. 신수가 창시한 교파를 북종선이라고 하고, 혜능의 선종을 남종선이라고 합니다. <북종선>이라는 책을 쓴 동국대 교수인 혜원 스님은 한국의 선종이 남종선의 영향을 받은 것, 그리고 승자에 대한 역사인식으로부터 신수와 혜능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꾸준한 노력과 점진적인 개선을 대단치 않게 보는 범인들의 인식도 분명 이유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밥먹고 살기도 바쁜데, 무슨 깨달음이냐는 뜬 구름 잡는 이야기라는 면박이 들려오는군요. 기실 삶은 깨달음은 연속입니다.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도 많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아이는 뜨거운 불에 데여보고, 불은 조심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반면 불에 직접 데이지는 않았어도 다른 간접경험과 교육을 통해 불은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 역시 깨닫게 됩니다. 깨달음 덕분에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는 또다른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인생에 있어 가장 큰 깨달음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견성( 見性)이라고 합니다. 숨겨져있던 본연의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되찾아오는 것입니다.  성철스님이 말한대로 성불은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본디 부처임을 깨닫는 것이 성불입니다. 



별을 보는 방법

점수와 점오의 가치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만, 분명 깨달음에 있어 점수점오만이 정공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법정스님의 책 <설전>에 보면 이런 고사가 나옵니다. 선 수행자가 절에 들어가서 큰 스님에게 얼마만에 깨달음을 얻을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이에 큰 스님은 10년이 걸린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선 수행자가 그럼 두 배로 열심히 수행하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큰 스님이 대답했습니다. 

"20년".

또다른 유명한 고사가 있습니다. 중국의 유명한 고승이였던 덕산 스님은 금강경에 통달했고 그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날 용담이라는 금강경에 정통한 스님이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어, 가르침을 얻기 위해 용담 스님을 찾아가게 됩니다. 사실 가르침을 얻으려는 요량보다는 '설마 나보다 금강경을 더 잘 알것인가'하는 자만심이 더 컸습니다. 용담 스님을 찾아간 덕산은 늦은 밤까지 별 소득없이 있다가, 방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일으킵니다. 밖이 깜깜해서, 덕산은 춧볼을 들고 방을 나섭니다. 덕산이 밖으로 나가는 순간 갑자기 용담은 촛불을 입으로 불어 꺼버립니다. 용담의 느닷없는 행동에 덕산은 당황하여 주위를 살폈습니다. 칠흙같은 어둠을 마주한 순간 덕산은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미약한 촛불이 사라지자 비로소 어둠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별들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작은 자아가 더 '큰 나'를 가리고 있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덕산은 바로 가지고 있던 금강경을 모두 태워버립니다. 그리고 이후 덕산은 대선사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우리 역시 작은 촛불을 꺼뜨리지 않으려 애를 쓰면 살아갑니다. 작은 촛불 너머 펼쳐진 광대무변한 공간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말입니다. 칠흙같은 어둠 속에서 촛불은 우리가 의지하고 살아가는 삶의 한 방편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밥 벌어먹는 기술일수도, 삶을 지탱하는 가치관일수도 있습니다. 삶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믿지만, 그것들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우리는 머리 위에 찬연하게 빛나는 별들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삶에 고난이 찾아오고, 의지하며 버텼던 그 미약한 촛불마저 꺼져버리면 우리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깁니다.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암흑속에서 좌절하면서, 어떻게든 꺼진 촛불에 다시 불을 붙여보려 안간힘을 쓰게 됩니다. 이때 고개를 들어 한번이라도 하늘을 보면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별들을 볼 수 있을텐데 말입니다.

돈오, 점오, 점수, 돈수 모두 맞습니다. 노력없이는 성취할 수 없고, 사고의 전환 없이는 새로운 삶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은 분명 성취의 대상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경험의 대상에 가깝습니다. 가만히 앉아있는다고 주어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길을 부단히 걷다 보면, 결국 자기 자신에게 다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견성성불(見性成佛)이 아닐런지요.



 "우리는 과학이 가장 멀리 발전해간 곳에서,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끌어낸 것은 결국 우리가 자연에 부여했던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미지의 해변에서 이상한 발자국 하나를 발견했고, 그 발자국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심오한 이론들을 하나씩 차례로 개발해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는 발자국을 만든 존재를 재구성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보라! 그 발자국은 우리 자신의 것이다." 
-  물리학자 에딩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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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3 15:49:11 *.169.227.149

운동과학에서 두 가지의 학습곡선이 있습니다.  하나는 일반적으로  연습량(노력한 시간)에 비례해서 성과나 결과가 향상되는 사선형 파워곡선(power curve)  다른 하나는 시간이나 노력의 정도에 관계없이 향상 없이 진행되다가 어느 순간에 계단형처럼 기하급수적으로 변화 되는 엑스포넨셜 곡선((exponential curve) = 우리식으로 통찰이겠죠 ))  있습니다.                                                         아직 인지가 통찰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는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깨달음은 전수되지 않는다"는  동양적인 제언과 같습니다. 다만 깨달은 스승의 곁에서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더 많다는 것 정도...  

세계화의 최전방에 있었던 한국의 스포츠를 글로벌한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것은 점진적인 변화가 아니라  서울 올림픽이라는 계기에 의한 급격한 혁명적 진화라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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