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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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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7일 23시 05분 등록

[내 삶의 단어장] 쵸코맛을 기다리는 오후 2



  그건 늦은 오후의 일이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방과 후를 하더라도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일렀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텅 빈 집에 들어 온 아이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냉장고를 연다. 그날 아침, 엄마가 만들어 둔 간식을 찾아 먹고 때로는 시리얼을 먹고는 학원 갈 준비를 하는 그런 일상이었을 것이다. 유치원을 졸업하고 이제 초등학생이 된 아이의 봄날은.

  그날은 좀 더 맑고 고운 봄날이었다. 창문 밖엔 봄꽃이 팔랑거리고 새들은 자유롭게 비상하며 높게 날아오른다. 불을 켰어도 적막한 공간보다 밝은 풍경 속으로 아이의 고개가 달려가고 유독 사람들의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린다. 아이는 아무도 없는 식탁을 벗어나 발코니로 나간다. 발끝으로 올라서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킥보드와 자전거를 타고 아파트를 돌고 있는 또래들, 그런 아이들을 보며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는 엄마들을 보며 집안 가득 무섭게 웅크린 어둠에서 벗어나 밖으로 나가고픈 마음이 커진다. 아이는 허겁지겁 발코니에 서서 허기를 채운다. 우유를 가득 부은 초코맛 시리얼을 숟가락으로 떠먹으며, 그릇째로 우유를 마시며 계속 밖을 흘끔거린다. 얼마쯤 먹었을 때였을까. 너무나 배가 고파 손이 떨리는 첫 숟가락이었을까, 몇 숟가락 남지 않았을 때였을까. 아니면 그릇째 들고서 꿀떡꿀떡 삼키던 때였을까. 초코맛 가득 입은 우유 몇 방울이 떨어진 순간은. 아이의 옷도 아니고 아이 집 발코니도 아닌 아랫집을 향하여 그렇게 초코과자물이 든 우유가 한방울, 두방울……, 떨어진 것은.

  아이의 오후는 초코맛 한가득한 나날이었다. 외로움과 기다림으로 잔뜩 물든 오후였다. 그날만이 아니라 많은 날이 그러했을 테다. 초코물든 우유 한 방울로 아이의 오후를 생생하게 알게 된 워킹만의 마음 또한 무너졌다. 차라리 삼겹살 핏물을 뚝뚝 흘려보내는 오후였다면 덜 했을까. 화라도 낼 수 있어 그 편이 더 마음 편했을지 모른다. 아이에 대한 짠한 마음과 죄책감에 덜컹거리는 언니에게 같은 마음을 보내면서, 생각해보면 우리도 그렇게 자라지 않았느냐, 다 그렇게들 살아간다는 그렇고 그런 말을 들먹이며 위로했다. 그래, 그런 시절이 있었다. 나의 초코맛 가득했던 날들.

 

옛날에 나는 나무에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었네

엄마를 기다리다 허기마저 지친 오후

……

세상의 모든 그리운 것들은

도무지 누군가 저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는 줄 모른다며

알면서도 모른 척 무시한다며 야속해질 때

그래, 비밀 같은 바람소리였네

숨 죽여 들을수록 낮아져 하마 끊길 듯 이어지는 다독거림

 

내 어느날 문득 더 자랄 수 없는 나이가 되었을 때

묵념처럼 세상은 함부로 권태로워지고

더 이상 간직할 슬픔 하나 없이 늙어가는 동안

옛날에 나무에 스치며 나를 키우던 바람소리

다시는 듣지 못했네 들을 수 없었네

 

강연호, 옛날에 나는 나무에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었네

 

  어릴 적 학교에선 우유급식을 했다. 2교시가 마치고 나면 당번은 우유를 가지러 갔는데 1, 2학년 때는 고학년이 가져다주었다. 우유가 오는 즉시 물방울이 맺힌 우유갑을 뜯어 마시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우유 상자는 수업이 마칠 때가 되어야 가득찼다. 우유 상자가 다 먹은 우유갑으로 빨리 채워지는 날은 초코우유가 나오는 날이었다. 환호 소리가 큰 날이기도 했는데, 나는 그날도 우유를 먹지 않았다.

  나는 우유를 두 개씩 먹었는데 물기를 머금은 신선한 우유를 학교에서 먹지 않고 늘 집으로 가져왔다. 하나는 아직 학교에 다니지 않는 동생 몫이었는데 동생과 같이 먹기 위해서였다. 흰 우유는 요구르트와 섞어 마시기도 했다. 초코우유가 나오는 날은 빨리 마시고픈 마음이 잔뜩 들었지만, 참았다. 우유 한 개를 나눠 먹는 것도 아니고 내 몫이 따로 있는데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오늘은 초코우유래! 환호하던 반 아이들이 우유를 마시며 즐거워하던 그 순간, 나도 꿀꺽꿀꺽 마시고 싶은 마음을 참고 혼자 있을 동생을 함께 엄마를 기다릴 오후를 버텨줄 우유를 책상 모서리에 두었다. 두 개의 우유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면 왜인지 모르게 뿌듯했다. 동생도 초코우유가 나오는 날을 좋아했다. 어린이날 전날엔 초코우유가 나왔다. 어린이날까지 더해 4개의 초코우유를 가방에 넣고서 신나게 달렸다. 책을 펼치고 마시다 보면 한방울씩 똑똑 떨어지는 때가 있었다. 흘리면 닦고 흘리면 닦고 그렇게 우유를 마시며 동생과 나는 엄마 없는 오후를 버텼다. 엄마가 오기까지 오후를 달래는 우유였다.

  초코우유는, 초코맛을 기다리는 오후는 내게는 한없는 기다림과 같은 말이었다. 엄마를 기다리는 그 오후는 초조하고 지루하고 길었다. 초코우유는 한번만 벌컥하면 사라지니까 엄마가 오기까지 버텨주지는 않았다. 기억을 더듬어가도 엄마와 같이 초코우유를 마셨던 건 뚜렷하지 않아 옅은 웃음이 나온다. 어쨌든 난 아이였구나 싶어서 그냥 그리워진다.

  초코맛 가득한 오후가 오래도록 내겐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의 오후였는데, 그 어느 봄 삼겹살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오후를 경험하고 난 후에는 엄마의 기다림이 추가되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를 반겨주지 못하고, 텅 빈 집안에 홀로 있을 아이를 생각하는 엄마들의 오후. 그리하여 아이에 대한 걱정과 안쓰러움에 내 탓이오로 종결되고 마는 워킹맘의 마음을 더 생각하게 된 건, 아이들만큼이나 엄마들이 받는 상처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느끼게 되어서였다. 더불어 그러한 모성 신화를 뛰어넘어 다독거릴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에 맞는 말을 찾지 못한다면 세상의 엄마들은 계속 그 마음으로 삐걱거리며 가슴 가득 핏물을 뚝뚝 흘리며 살아갈 것이기에, 우리에겐 인식을 전환시킬 '말'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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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13 15:25:41 *.169.227.149

슬프네요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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