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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21일 12시 08분 등록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입덧도 서서히 줄어들고, 8월 말이 되었습니다. 임신 주수로 따지면 20주 정도 되었을 때입니다.
그동안 진료받았던 회사 근처의 난임병원에서는 분만은 진행하지 않아서 분만이 가능한 다른 병원으로 전원 했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분만 병원 중 일반 병원은 눈에 잘 띄지 않아서 가장 가까이 있는 대학병원으로 결정했습니다. 환자 한 명에 대한 세심한 케어는 부족할 수 있어도 분만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즉각적인 조치가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생각보다 병원의 도움이 필요했던 사례가 주변에 많이 있어서 아무래도 그 편이 낫겠다고 마음을 정했습니다.

8월 말에 처음 방문했던 대학 병원 산부인과는 낯설었습니다. 대기실에 수많은 임신부들이 앉아 있었고, 남편들이 함께 온 경우도 제법 많았습니다. 9월 11일에는 상세 초음파를 보았습니다. 초음파 검사를 하는 도중에도 아기가 뱃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이 포착되어 정말 귀엽게 느껴졌습니다. 아직은 뼈와 장기밖에 볼 수 없지만 과연 어떤 얼굴과 성격을 가지고 있을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아기가 점점 선명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는 것은 상당히 신선한 경험입니다.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배의 움직임, 그리고 임신하고 있는 당사자만 느낄 수 있는 뱃속에서부터의 진동 같은 것이 점점 크고 빈번하게 느껴졌습니다. 로르카는 임신이 살아있는 새를 핏속으로 쥐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고 이야기했다지요. 남자인데 어떻게 이런 기분을 표현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임신 중기의 소감은 앵무새 정도이 새를 뱃속에서 손으로 잡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처음에는 태동도 저만 느낄 수 있었는데 며칠이 지나자 남편도 손을 대보면 알 수 있을 만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대화 혹은 교류를 시도하면 가능할까요? 22주가 지난 태아는 자궁 속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26주가 지나면 바깥소리도 들을 수 있는 청력이 생긴다고 합니다. 목소리를 알아채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되어 꾸준히 쓰다듬거나 말을 걸고 있습니다.

태동의 경우 제가 옆으로 돌아누우면 뱃속의 공간이 좁아지는지 잠시 후에 배를 팍팍 두드리는 느낌이 듭니다. 양수를 사이에 두고 언어 없는 대화가 이뤄지는 듯한 느낌입니다. 임신과 출산의 주체라는 점에서 고통을 겪어야 하는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 애석하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는데, 뱃속에 아이가 점점 자라면서 태아와 잉태자의 특수한 관계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축복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성장하고 있는 인간의 시작을 온몸으로 경험해 볼 수 있다는 것은 신비로운 일입니다. 나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고, 자신의 의지가 따로 있는 존재가 보이지는 않지만 움직임이 느껴지는 것이 정말 신기합니다. 몸속에 있지만 저와는 별개의 존재라는 것이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 몸을 공유하고 있다고 해서 제가 태아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태아가 저의 심리상태나 생각을 전부 알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계는 같은 육신을 공유하고 있는 일시적인 동반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심장이 뛰고 손과 발이 자라나고 등뼈가 생기고 장기가 만들어지고, 전에는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던 존재가 점점 커지면서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제 쪽에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몸짓뿐일지라도. 새로운 의지는 아주 연약하고 의존적이지만 시간을 천천히 들여 점점 하나의 동등한 인격체로 자라나게 되겠죠. ‘내가 여기 있음’을 태어나기도 전부터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심장 소리가 가장 처음 들었던 인간 생명의 시작이듯이 태동 또한 인간이란 존재의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살아 있음과 죽었음 사이에서 태아는 본인이 살아있다는 증거를 스스로 내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책을 읽다 보면 육체와 영혼 중 영혼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 보는 작품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임신 과정을 겪으면서 추상적인 영혼의 구체적 증거는 바로 우리의 육체 안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거나 '살아있는 게 맞는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만 그럴 때 조용히 베개에 귀를 대고 심장소리를 들은 다음 팔과 다리를 움직여보세요.우리의 삶이 시작되던 순간부터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생명의 목소리가 아주 또렷하게 들릴 것입니다. 다음 주 월요일이면 아기 예수가 태어났던 크리스마스입니다. 나의 탄생의 순간을 상상해 보는 시간을 잠시 가지며 올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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