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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2월 10일 22시 49분 등록

이번 겨울, 지난 십 수 년간 그리워했던 저만의 소울푸드를 맛볼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오늘은 저의 소울푸드 이야기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IMF 직후인 98년에 직장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대규모 구조조정이 끝난 직장에서는 한창 기존의 시스템을 정리하고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는 중이었고, 사회초년생이자 신입사원인 저는 98년과 99년 두 해에 걸쳐 새벽 출근과 자정 퇴근으로 해를 보지 못하는 날들을 보내야 했습니다. 직장생활에서 어떤 기쁨도 느낄 수 없었던 저는 2000년이 되자 무작정 미국행 비행기에 올라탔습니다. 



미국에 도착하고 나서 토플 시험을 치른 다음 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알바를 찾아 나섰습니다. 주립대 편입허가서를 받자마자 교내 식당 서빙과 학교 건물 청소 일을 구했고, 수소문 끝에 학교 밖 옷가게에 파트타이머가 되었습니다. 점심시간에는 학교 식당에서 서빙을 하고 저녁을 먹은 후엔 학교 건물 청소를 했으며, 틈틈이 수업을 듣고 또 시간을 쪼개 옷가게에서 일을 했습니다. 



한 달에 하루 날을 정해 옷가게 사장님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직접 옷을 해오셨습니다. 커다란 밴에 옷을 가득 싣고 밤새 운전을 해서 새벽 네 시경 도착하면 그때부터 알바생들의 새벽일과가 시작됐습니다. 밴에서 옷을 꺼내 먼지를 털고 같은 옷끼리 분류하고 같은 옷은 또 색깔과 사이즈별로 정리하고 상표와 가격 태그를 붙이고 옷걸이에 걸어 진열하면 아침 해가 뜨는 것이었습니다. 늘 배가 고팠지만, 그때가 되면 배가 등에 붙은 것만 같았습니다. 온 몸이 땀과 먼지로 끈적이고 정전기 때문에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어 있을 때, 사장님은 배달음식을 보내주셨습니다.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둥근 뚜껑을 열면 금방 구워 따끈한 팬케이크가 켜켜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 위에 홈메이드 버터 한 스쿱을 올리면 버터가 스르륵 녹아내리면서 구수한 향이 올라왔습니다. 포크와 나이프로 슥슥 썰어 메이플 시럽을 뿌려 먹으면 온 몸에 쌓인 피로가 싹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팬케이크가 먹고 싶어서 한 달에 한 번 엘에이에서 옷이 오는 날을 기다리곤 했답니다.    



네. 그렇습니다. 저의 첫 번째 소울푸드는 팬케이크입니다. 어릴 적에 엄마가 만들어주신 감자전과 김치전을 양손으로 적적 찢어먹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그 맛을 지금은 제 손으로 그대로 만들어 낼 수 있고 언제든 해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그 팬케이크만큼은 그 맛을 그대로 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팬케이크 전문점에 가도 실망만 했는데, 이번 겨울에 서울의 영등포에서 그 맛을 찾았습니다. 



유례없이 따뜻했던 이번 겨울의 가장 추웠던 날, 얇은 옷을 입고 나가서 덜덜 떨고 또 설상가상으로 길을 잃고 헤매다가 배가 고파져서 들어간 팬케이크 가게였습니다. 팬케이크가 켜켜이 쌓여 있는 사진을 보고 주문했고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그때 그 맛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 펜케이크가 그토록 맛있었던 건 힘들고 춥고 배고파서였을까 생각했습니다.  



옷가게 사장님께 외동딸이 있었고, 저보다 세 살이 어린 앨리샤와 저는 자매처럼 잘 지냈습니다. 앨리샤에겐 증조할머니가 있었고, 저는 그 할머니를 앨리샤의 할머니(Alicia's grandma)라고 불렀습니다. 아흔이 넘은 앨리샤의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해서 휠체어 없이는 이동이 불가했지만 쿠키를 굽는 솜씨는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백발의 앨리샤 할머니는 일 년에 딱 두 번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에 쿠키를 구우셨습니다. KFC 할아버지처럼 쿠키가 가득 들어 있는 커다랗고 둥근 종이 상자를 들고 옷가게에 오셨습니다. 앨리샤의 할머니 쿠키는 너무나 인기가 많아서 한 사람이 두 개 이상 먹진 못했지만, 그 쿠키가 먹고 싶어서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를 기다릴 정도였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저의 두 번째 소울푸드는 쿠키입니다. 어른 손바닥만 한 앨리샤의 할머니 쿠키는 두께가 3센티는 되었고, 겉은 바삭했지만 속은 촉촉했으며, 반으로 쪼갤 때 꾸덕하면서도 마지막 순간 빵처럼 부드러웠습니다. 한 입 베어 물면 입 안 가득 견과류와 초코칩 등이 풍성하게 씹혔는데, 달지 않아서 질리지 않았습니다.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도 명절이나 크리스마스가 되면, 앨리샤의 할머니 쿠키가 생각났습니다. 그 쿠키 맛을 찾아 전국의 디저트 가게를 순례했습니다. 수제쿠키를 만들어 파는 곳이라면 배송을 받아서라도 먹어보았습니다. 여대 앞이나 핫한 연남동 구석을 배회하며 쿠키를 찾았습니다. 지난 세월 ‘쿠키덕후’로 살았지만 그 맛을 다시 맛 볼 수는 없었습니다.



겨울 방학이면 취미가 베이킹인 큰아이는 쿠키 공장을 가동합니다.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 때부터 쿠키를 만들었으니 벌써 3년째입니다. 이번 겨울 방학에 아이는 엄마인 제가 평소 노래를 부르던 앨리샤의 할머니 쿠키 만들기에 도전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수차례 굽기를 반복한 후 아이는 그 맛을 그대로 재현한 것입니다.



겨울 방학 내내 이 쿠키를 먹고 있습니다. 힘든 시절에 저를 도와주셨던 고마운 분들을 생각합니다. 그리운 분들이 생각날 때마다 저는 이 쿠키를 먹을 것 같습니다. 오랜 시간 찾아 헤매던 엄마를 위해 미국식 홈메이드 쿠키를 만드는 유튜브 채널을 찾아보고 실제로 만들어준 큰아이에게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당신은 소울푸드가 있나요? 당신의 소울푸드는 무엇인가요?  



김정은(toniek@naver.com) 드림



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습니다 시리즈를 좋아하는 분만 초대합니다.
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습니다, 스물여덟 번째 이야기
https://blog.naver.com/toniek/221803063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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