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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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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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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30일 11시 19분 등록


어제 여수에 다녀왔습니다. 한 군()의 공직자들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KTX 호남선이 복선화되면서 오송에서 여수까지의 시간도 많이 당겨졌더군요. 보슬비 내리는 봄 들판과 숲의 초록빛이 눈과 마음을 씻어 내리는 기차 여행이었습니다. 다만 열차 편이 많지가 않아 강연 시작 세 시간 전에 도착했다가 강연 마치고 다시 세 시간 넘게 기다려 돌아와야 한다는 불편이 있었습니다. 너무 일찍 도착한 나는 강연이 예정된 리조트 근처의 찻집에 앉아 밀린 사무 몇 가지를 봤고 여천의 풍경을 즐겼습니다.

 

앞 강연자가 시간을 길게 써서 나는 저녁 먹을 시간을 삼십분이나 넘겨가며 강연을 마쳤습니다. 내 일상의 철학에는 밥 먹는 일보다 중요한 게 없다는 관점이 있습니다. 해서 밥 먹는 시간이 늦어진 것이 참 미안했고 자연스레 청중들의 눈치를 살피며 강연을 이어갔는데 놀랍게도 어느 한 사람 싫은 내색이 없었습니다. 어제 강연의 하이라이트이자 결론에서 다룬 한 생활인이요 지역민이자 공직자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다루는 시간에 모두는 앉은 몸을 반듯이 세워가며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강연이 끝나자 한 여성 공직자가 내게 다가왔습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품어왔던 자기 인생에 대한 비애감과 최근 겪고 있는 슬픔을 씻어 내릴 힘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강의에서 만난 풀 한 포기의 삶이 자신을 치유해줬다며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밥을 먹으러 갔습니다. 레크레이션과 함께 저녁식사가 진행된 장소의 한 원탁에 나도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함께 밥을 먹었습니다. 신규 임용자를 포함해 서로가 서로를 소개하고 격려하는 시간이 끝나갈 즈음, 본격적인 여흥이 시작될 기미를 포착한 나는 텅 빈 강연장으로 돌아와 책을 꺼내들었습니다. 남아 있는 기차 시간동안 지난 주 어느 수녀님께서 선물해주신 책과 마주할 작정이었습니다. 책을 펼쳐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다른 여성 공직자 한 명이 내게로 왔습니다. 그녀는 강연 내내 깊게 눈을 맞추고 대답도 또박또박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농업기술센터에서 귀농귀촌자를 지원하고 마을을 만드는 사업을 담당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나를 자신의 프로젝트에 초대해 강연을 듣고 싶다 하여 서로 연락처를 나누고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시골에 살거나 시골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섬기는 새로운 () 때문에 겪는 지역의 아픈 현실에 대한 이야기로 긴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그 새로운 ()은 바로 物神(물신)입니다. 각종 농촌 정책이 궁극적으로는 돈과 성장 중심의 정책으로 쏠리고, 또한 어른이 사라져가는 상황 속에서 도시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이 시골로 빠르게 침투하면서 걸핏하면 법적 분쟁이 터지고 결국 시골마저 사람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개탄을 공유하는 대화였습니다.

 

지방정부에서 관련 사업을 맡고 있는 공직자로서 그녀는 이 개탄스러운 현실을 넘어서고 싶어 했습니다. 나보다 300년 먼저 태어나 80여년 가까운 삶을 살다가 떠난 이탈리아의 역사철학자 비코(Giambattista Vico)가 생각났습니다. 비코는 역사가 세 단계를 거쳐 흘러왔다고 구분했습니다. 첫째 신의 시대, 둘째 영웅의 시대, 마지막으로 인간의 시대가 그것이지요. 그런데 인간의 시대가 열리다가 우리는 다시 새로운 신, 즉 물신의 시대를 열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지요. 그녀는 다시 사람의 시대가 복원되기를, 자신의 현장에서 자신이 그 복원에 기여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 무겁고 심지어 절망스러울 때가 많다며 해법이 없겠느냐 물었습니다. ‘참된 사람이 사라져 가는 시대를 넘어설 대안을 나 같은 촌부에게 구하다니그 공직자의 절박감과 열정이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일어서는 막막함을 어쩌지 못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나는 숲을 떠올렸습니다. 불모지 숲이 울창한 숲으로 변해가며 다채로운 소리와 향기와 빛깔로 채워져 가는 그 숲의 역사, 마침내 정점의 숲에 도달하면 그 공간에서는 한 발자국 발을 떼는 것도, 함부로 침을 뱉는 것도 자연스레 조심하게 되는, 신발을 벗어 맨발로 걷고 하늘로 솟구친 나무 아래 당장 무릎을 꿇고 기도라도 올리고 싶어지는, 마침내 그 자체로 평화, 그 자체로 성스러움을 발하는 지경을 이루어내는 숲과 생명의 역사! 그 숲의 역사에도 산불이 나고, 산사태가 나고 욕망들이 쟁투를 벌이는 시간이 있음을 떠올렸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우리 인간의 역사도 느리지만 그렇게 가고 있다는 믿음을 나는 가지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그 신령스러운 숲의 지경을 볼 수 없을지는 몰라도 나는 그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 같은 분들이 도처에 있다는 것을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저 괴물 같은 새로운 신, 물신의 시대를 넘고 참된 사람의 시대를 꿈꾸는 사람들이 경향 각지에서 힘들지만 작게라도 꽃을 피우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니 아프다고 절망하지 말자고 그녀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이는 사실 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기차로 돌아오는 길은 어두웠습니다. 비는 그쳤지만 담녹색을 향해가던 숲은 어둠이 삼켜버렸습니다. 그 어둠으로 가득한 바깥 풍경을 나는 오래토록 바라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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