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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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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3월 18일 12시 49분 등록

1년 내내, 나는 파스타를 만든다. 해마다 봄이 오면 두릅 나오기만 목 빠져라 기다린다. 가시를 하나하나 손으로 다듬은 어린 두릅을 소금을 뿌려가며 살짝 볶는다. 달력 같은 걸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두릅 파스타를 먹지 않고는 봄이 왔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없다. 여름에는 가지, 가을에는 생표고, 겨울에는 굴 파스타와 함께 가는 계절을 보내고 오는 계절을 맞는다. 토마토 소스를 좋아하지만 햇볕을 받고 빨갛게 익은 노지 토마토가 없는 철에는 꾹꾹 눌러 참는다. 홀토마토나 토마토페이스트 따위, 신선한 토마토를 오래오래 조린 소스에는 견줄 수 없다. 해가 짧아지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크림 소스 생각이 난다. 체면이고 양심이고 내다 버리고 크림과 치즈를 무조건 들이붓는다. 오일 파스타에는 새우에 홍합에 고명을 푸짐하게 얹는 것도 좋지만 바싹 튀긴 마늘과 면만으로도 훌륭하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기름으로 버무린 밀가루보다 맛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파스타가 좋다. 하지만 사 먹는 일은 없다. 남들이 알리오올리오랑 카르보나라 사이에서 머리 터지게 고민할 때 나는 평온하게 말한다. "피자." 평소에 하도 먹어서는 아니고, 내가 만든 게 훨씬 맛나서도 당연히 아니고 나에게 파스타는 맛있는 음식이지만 동시에 돈값 못하는 음식이기도 하다. 내 돈 주고 사 먹을 일은, 단호하게 말하지만 없다. 시시하지만 엄중한 세계관을 형성한 것은 한 권의 책이다.

-- 정은지, “내 식탁 위의 책들에서


 

그러면서 저자는 에릭 시걸의 <러브 스토리>를 이야기한다. 영화로도 크게 히트한 만큼 <러브 스토리>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많겠지만, 그 책에 나온 한 줄의 대사로 해서 글 한 편을 쓴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올리버는 어마어마한 부호의 자제다. 하버드에서 제일 큰 강당을 지어준 집안의 외동아들이다. 제니는 가난한 홀아버지의 외동딸이고, 이탈리아계다. 그들이 사랑에 빠져 졸업과 동시에 결혼하기로 했을 때, 집안에서 내쳐진 올리버에게 제니가 말한다. “스파게티를 좋아하는 법이나 배우시게나.”

 

바로 이 대목을 읽으며 아직 어렸을 저자는 스파게티에 대한 인상을 각인했던 것이다. 그러나 몇 년후 멀끔한 레스토랑에서 만난 스파게티는 1만원을 훌쩍 넘었고, 저자는 의문을 품게 된다. 분명 제니와 올리버가 한 말이 있는데 뭐가 잘못 된 거지? 궁금증을 풀기 위해 저자는 수많은 책을 읽고(이 책을 쓰기 위해 200권을 읽었다고), 웹을 뒤지고, 외국식당의 리뷰를 훑는다. “잘못 된 것은 그 레스토랑의 가격이었다.”

 

1880년에서 1914년 사이 500만 명의 이탈리아인이 미국으로 건너가 초기 미국 사회의 하층 계급을 형성했는데, 제니의 아버지 필도 미국에서 이탈리아계가 가장 많은 로드아일랜드에 살고 있다. 이탈리아 요리는 자연스럽게 미국의 풍토에 녹아들어, 2000년 미국 레스토랑 연합이 이탈리아요리는 더 이상 외국 요리가 아니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는데..... 결혼 승낙을 받으러 찾아온 예비 사위에게 필은 과자 부스러기만 한상 가득 차려낸다. 사랑에 빠진 빈털터리 젊은이는 미래의 장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과자를 잔뜩 먹어댔지만, 과자는 입가심에 불과했을 것이다. 우선은 피자스트립에 시칠리아식 오징어 튀김에 고기 대신 치즈를 넣은 시금치 파이.... 전부 기름진 음식으로만 한 상 가득 차려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저자는 먹는 이야기가 나온 책을 소개한다. 권정생의 <슬픈 나막신>에서는 '센베이'를, 스티븐 킹의 <스탠 바이 미>에서는 '햄버거'를 집중조명한다. 신종 책소개요 독보적인 컨셉이라 눈에 띄고, 음식문화사에 가까운 호기심과 검색력에 감탄하게 된다. 어려서부터 책의 줄거리보다 먹는 장면에 심취하여 그 장면을 보고 또 보다, 급기야 어른이 되어 한 권의 책으로 펴낸 근성이 놀랍다. 게다가 문체는 또 얼마나 쫄깃한지, 그녀가 껌벅 죽는다는 페이스트리에 지지 않는다.

 

혓바닥에 닿는 고소한 맛, 깨물 때의 바삭한 소리, 기름의 고소한 냄새, 그리고 입천장을 스치는 뻑뻑한 느낌. 맛으로 한 번, 냄새로 한 번, 소리로 한 번, 그리고 질감으로 또 한 번, 페이스트리는 나를 네 번 죽인다.”

 

영국 해군을 라이미라고 부르고, 독일 선원은 크라우트라고 불린다. 영국 해군이 괴혈병 방지를 위해 '라임'을 싣고 다니고, 독일 선원은 자국민에게 필수적인 양배추절임- '자우어크라우트'를 싣고 다녔기 때문이다. ‘빅맥지수라는 것도 있다. 나라별로 다른 빅맥 가격을 비교해 환율의 적정성을 평가하는 것이다. 만일 미국에서 빅맥이 2달러고 한국에서 3000원이라면 적정 환율은 1달러당 1500원으로, 시장 환율이 이보다 높으면 원화가 저평가된 것이고 낮으면 고평가되었다는 식으로 실물경제의 중요한 지표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모두 그녀의 책에서 읽었다. 한 끼 식사에서 출발하여 경제와 문화를 아우르는 관심사로 확장되는 의식이 아무래도 감탄스럽다. 시작은 어릴 적 읽은 동화의 한 장면이었다. 그녀는 책 속의 먹는 이야기에서 시시하지만 엄중한 세계관을 형성해 왔다. 그런 것이라면 사실 누구나 한 두 가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보통사람이 쓰는 첫 책을 비롯해서 산다는 것 또한 바로 그것을 믿고, 구현하는 일에 다름없지 않을까? 문득 그대의 시시하지만 엄중한 세계관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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