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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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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18일 00시 06분 등록

사람들이 노후대책에 대해 걱정할 때마다, "몇 년마다 백 킬로미터씩 후진하면 된다"던 분이 있었지요. 시골생활을 해 본 저는 그 말이 어떤 뜻인지 잘 압니다. 전원주택이 포진한 근교 말고 진짜 시골에는 빈 집이 많거든요. 집을 비워 놓으면 빨리 망가지기 때문에 그런 집은 적은 돈으로 빌릴 수 있구요. 농사짓는 사람 셈법으로는 백 평, 이백 평이 조그만 땅이기 때문에 빌리거나 구입하기에 억! 소리가 나지는 않습니다. 경치 좋고 안전한 시골에서 굳이 집이 클 필요도 없구요. 채소와 과일을 자급자족하고 겉치레용 소비를 줄인다면 생활비가 대폭 줄어들 것이라, 저도 그걸 믿고 배짱껏 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형편없이 게으른 제가 자급자족을 할 수 있을지가 문제인데, 요즘 <삼시 세끼> 덕분에 부쩍 엄두가 나네요. 40대 주부들도 직접 김치를 담그지 않는 사람이 많은 세태에, 188센티미터에 배우 포스 '쩌는' 차승원이 배추김치, 파김치, 동치미를 척척 해 내고, 동동주까지 담그고 있으니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을 밖에요. 한국인으로서는 보기드문 8등신이라던가요, 훤칠한 A급 배우의 숙달된 요리솜씨가 "먹방"을 평정해 버렸네요.

 

물론 여기에는 나영석PD라고 하는, 탁월한 트랜드세터가 있었지요. 저를 포함해서, 시골에 가서 삼시 세끼를 해 먹는 것이 어떻게 예능이 될 수 있겠냐고 생각한 사람 많았을 겁니다. 그러나 결과는 시청률 12.4%로 케이블TV 사상최고! 이 프로를 보면 참 느려요. 물고기를 잡기 위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어도 무려 5시간 동안 입질 한 번 오지 않습니다. 불을 피우고 고기를 잡는 등 '바깥양반' 일을 하는 유해진을 위해 차승원은 거북손을 다지고 갖은 야채를 넣어 죽을 끓여 내 갑니다. 김을 채취하여 말려서는 장작불에 굽고, 콩나물을 기르고, 닭을 키워 달걀을 얻어먹습니다. 지역에서 얻은 유기농 재료를 가지고 삼시 세 끼 해결하기! 나영석PD가 잘 생긴 스타를 내세워 우리에게 들이미는 것은 "자급자족"이라는, 어마어마한 가치입니다.

 

2주 만에 다시 내려간 만재도에서 유해진이 털어 놓습니다. 밥 사 먹기 어려워서 차라리 만재도 생각이 났노라구요. 또 다른 멤버인 손호준이 자기 몫의 짬뽕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먹고도, 차승원이 남긴 것까지 먹어치우는 것을 보면 그도 같은 생각일 것 같습니다. 영악스러운 재담 한 마디 못 하고 커다란 눈만 껌벅이지만, 그는 진심으로 차승원의 요리를 반김으로써, 이 프로그램의 취지에 온 몸으로 공헌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책이든 프로그램이든 너무 인기를 끌면 공연히 흘겨보곤 했는데, 이제는 그 원인을 곰곰이 생각하게 됩니다. 전세계의 식재료가 쌓여 있는 마트에서 장을 보고, 퓨전이라는 이름으로 정체가 불분명한 음식을 사 먹는 일도 잦아지면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는 고유한 행위가 너무 변질된 건 아닌지요? 딸기를 먹기 위해 초여름까지 기다리던 것을 아무 때나 먹을 수 있게 되면서 정작 딸기 맛을 잃어버리게 된 건 아닌지요? 빨리! 더 빨리!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가고 싶지도 않은데, 그렇다고 내릴 수도 없었던 롤러코스터에 지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건 아닌지요?

 

<삼시 세끼>는 먹는다는 몸짓의 원형을 되살려 줍니다. 먹기 위해서는 길러야 하고, 잡아야 하고, 만들어야 하는,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야 비로소 제 맛이 난다는, 소박하지만 너무도 귀해진 가치를 들고 나온 거지요. 자연 속에서 누리는 소박한 삶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면, 나의 로망이 그다지 외롭지 않을 것이라는 기운이 솟네요.

 

하고 싶은 일 두루두루 다 해 본 다음에 쉬고 싶어지면, 조그만 시골집 하나 얻어 자급자족에 도전해야겠습니다. 그때쯤이면 오히려 밭일과 바느질 같은 수작업이 좋아질 지도 모르겠어요. 평생을 몸을 놀리지 않고 산 데 대한 반작용이기도 하고, 느리고 단순하고 정갈한 것이 좋아질 때기도 하구요. 다만 요리솜씨는 지금부터 꾸준히 키워나가야겠습니다. 내 먹거리를 내가 책임지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고 소중하며, 자립의 시작인지를 한 프로그램이 각인시켜 주었기 때문이지요.

 

 

설날이네요. 그대의 삼시 세끼가 건강하고 자립적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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