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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6일 23시 45분 등록

피정을 왔습니다. 피정(避靜)이란 일상생활의 모든 업무를 피하여, 성당이나 수도원 같은 곳에 가서 조용히 장시간동안 자신을 살피며, 기도하는 일을 말합니다. 한해의 마무리와 새로운 해를 맞이하기 위한 의식으로 들리곤 하는데, 저 자신 온전한 머무름으로 자리하지는 않습니다.

나무 침대와 책상, 벽에 걸린 십자가가 전부인 독방.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을 내려놓기 위해 찾은 곳이지만 익숙지가 않습니다. 기도시간. 갈색 수도복과 모자, 맨발차림의 수도사들. 그들은 이곳에서 어떤 기쁨을 누리며 살고 있는 걸까요. 무엇이 그들을 이곳에 자리 잡게 하고 있을까요. 나도 따라 시늉을 내어보지만 어림없습니다. 뒤틀리는 몸, 끝없이 쏟아지는 졸음, 더디게 가는 시계바늘. 그냥 바라만 보고 있음인데도 이렇게 힘드네요. 그냥 바라보고만 있을 뿐인데. 어느 순간 지향은 내 것을 들어달라는 간구함으로 바뀌고 맙니다. 가정, 직장 등 잘되게 해달라는 것뿐. 그분께 구하는 사항만을 나열중입니다. 감사함에서 먼저 출발을 해야 함에도 그러질 못하니.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 낮잠을 청합니다.

저녁기도. 암흑의 텅 빈 방. 빨간 등하나 비워있음을 채우고 있습니다. 깨닫는 점은 어둠속에 있을 때 빛의 빛남을 더 잘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피정은 세상을 떠나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피해서 오기보다는 그 세상을 더 품에 안기 위함이 아닐 지요. 그 까닭은 이러합니다. 기도 속에 침잠할 때 무념의 상태로만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분주한 업무나 다른 일을 할 때보다 잡생각이 더 떠돌아다닙니다. 상처를 입힌 사람, 억울하고 분한 사건, 원망스러운 일,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들. 가만히 앉아 있다 보면 그것들이 허공에 맴돌고 이리저리 상념의 공간을 차지합니다. 머리를 애써 흔들고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복잡함은 떠날 줄을 모릅니다. 비워지기는커녕 더 난리입니다. 나는 그 생각에 잡혀 그 하나하나를 잡으려고 손을 내미니 또 다른 번민 속에 묻히게 됩니다. 왜 이럴까요. 일부러 이 먼 곳까지 왔는데. 피정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장소가 아닙니다. 그 문제를 좀 더 똑똑히 회피가 아닌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 문제의 피함이 아닌 문제를 직시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안고 나아가게 하는 것. 이것이 피정입니다.

 

수도원. 신을 찬미키 위해 세속과 떨어진 곳에서,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곳. 하지만 다시금 확인한 사실 하나는 이곳에 있다고 이곳에서 산다고 해서 세상을 떠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세상입니다. 단지 놓치고 있었던 보지 못했던 다른 부분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뿐입니다. 건물 뒤편에는 찜질방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빨간색 네온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수도원도 세상의 일부입니다. 세속의 사람들이 이런 곳을 찾는 이유는 숨겨진 무언가를 발견하기 위함 이겠지요. 그럼에도 저는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문자를 체크하고, 메일을 확인하며 회사 업무를 놓지 못합니다. 웃깁니다. 떠나왔다고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날이 밝았습니다. 밝음은 빛을 동반합니다. 빛이 있음에 문제와 어두움은 함께 환해지고 그것은 일체가 됩니다. 어둠과 빛이 일체가 되는 것은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아니, 원래 분리가 아닌 함께 있었던 것이기에 제자리를 찾아왔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싸우고 곪아터졌던 마음이 그러다보면 조금씩 가라앉습니다. 태풍 속에 그렇게 떠돌던 바다가 잠잠해지듯이 더욱더 뚜렷해집니다. 소낙비 흠뻑 내린 다음날 시야가 더 잘 보이듯이 그 뚜렷해짐을 마음에 내 가슴에 걷어 올립니다. 원래 내 것이기에.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이기에.

내안에 가지고 있는 것을 더 잘 알고, 더 잘보고, 더 잘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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