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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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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7월 23일 08시 16분 등록

박웅현 선생은 <여덟 단어>에서 80세에 한글을 배우고 시를 쓰기 시작한 한춘자 할머니를 예로 들며 인문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강조합니다. 한 할머니 이야기는 CBS 정혜윤 PD가 쓴 <여행 혹은 여행처럼>에 나오는데 박웅현 선생이 이 책을 읽고 자신의 책에서 재인용했습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정혜윤 PD가 할머니께 시를 쓰니 뭐가 달라졌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할머니가 답하길, 이제 들국화 냄새도 맡아보고 돌멩이도 들춰보게 됐답니다. 이를테면 이전에는 안 보이던 꽃이 보이는 겁니다. 애정을 가지고 보기 시작했거든요. 여든까지 보지 못하던 꽃을 보게 돼서, 시를 쓸 수 있어서 할머니는 행복해 보였습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종종 들었습니다. 부러웠습니다. 내게는 언제 저런 일이 생길까 궁금했습니다. 아니, 저런 날이 올까 의심스러웠습니다. 본격적으로 인문 관련 책을 읽은 지 5년째입니다. 그 동안 450권 정도의 인문학 서적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뭐가 달라졌을까요? 한 달 전만 해도 이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궁색했습니다. 그럼 지금은? 뭔가 달라지고 뭔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사연이 있습니다.

 

우리 집 옥상에는 여러 개의 스티로폼 박스로 만든 작은 텃밭이 있습니다. 몇 달 전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일상에서 소소한 기쁨을 느껴보라며 만들어준 것입니다. 상추, 깻잎, 적근대, 쑥, 토마토와 오이 등을 심었는데 잘 키우지 못해서 지금은 민망한 모습입니다. 그래도 옥상에 오를 때마다 일상에 푸른 빛깔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어느 날 옥상 한쪽 구석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내가 심은 것이 아니고, 얼마 전까지 보이지도 않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리 잡은 곳이 애처롭고 위태롭습니다. 옥상 구석의 배수구. 니은(ㄴ) 자 모양의 배수구에 흙이 쌓여 막혔는데 그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막힌 배수구가 작은 화분이 된 셈입니다. 왜 하필 이 자리일까 생각하다가 문득 고은 시인의 시집 <순간의 꽃>에 있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급한 물에 떠내려가다가

  닿은 곳에서

  싹 틔우는 땅버들 씨앗

 

  이렇게 시작해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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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식물에게 ‘배수구 화분’이 숙명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하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도 탄생의 시점과 지점을 선택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배수구 가까이 가서 보니 하나가 아니라 모양이 아주 다른 식물 둘이 한 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하나는 쑥인 게 분명한데 다른 하나의 이름은 모르겠습니다. 안 그래도 좁은 공간에 둘이라니, 이것 또한 운명인가 싶었습니다. 위태로운 자리에서 둘이 잘 살 수 있을지 염려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몇 번씩 어떻게 지내나 관찰하곤 합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잘 살고 있습니다. 아래 왼쪽 사진은 6월 26일에 찍은 사진이고, 오른쪽은 7월 18일에 찍은 것입니다.

 

sw20130723-2.jpg  sw20130723-3.jpg

 

불현 듯 식물에 아는 것 없고 관심도 적었던 나의 변화에 놀랐습니다. 어설픈 의인화일지 모르지만 식물을 대하는 마음씀씀이에도 스스로 놀랐습니다. 예전 같으면 구석에서 살고 있는 풀을 보지 못했을 것이고, 설사 봤어도 관심 갖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내게 일어난 변화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일어난 변화인 듯합니다. 인문을 공부하면서 그전에는 지나치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며, 보이던 것들은 다르게 보입니다. 내 자신과 삶도 그렇게 보이곤 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낯설고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또 그래서 일상이 새롭고 즐겁고 풍요롭습니다.

 

돌아보니 쑥과 이름 모르는 풀을 발견했을 때 나는 박웅현 선생의 <여덟 단어>을 읽고 있었습니다. 이 책은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8가지 키워드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견(見)’입니다. 그가 강조하는 ‘여덟 단어는 ‘인문학적 삶의 태도’로 수렴합니다. 마찬가지로 사건과 책과 체험이 연결되어 글쓰기로 꿰어지고 ‘각(覺)’으로 수렴합니다. 그러고 보니 ‘깨달을 각(覺)’에 ‘볼 견(見)’이 들어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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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웅현 저, 여덟 단어, 북하우스,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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