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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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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2월 31일 09시 28분 등록

영화나 책을 본 뒤 리뷰를 쓸 때 줄거리를 자세하게 쓰는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누가 봐도 정해진 것이라 개성이 없다는 생각을 했고, 좀 따분하기도 해서지요. 그런데 김탁환의 <읽어가겠다>를 읽으며 그 생각을 수정해야겠네요. 저자가 라디오에서 소개한 백오십 권 중에 젊음에 해당되는 책 스물 세 권에 대한 소개를 모아 놓았는데, 태반이 그 책의 줄거리에 대한 거거든요. 그런데 그게 너무 아름다워요.

 

<크눌프>를 시작으로 <어린 왕자> <플랜더스의 개>, <폭풍의 언덕>처럼 널리 알려진 책도 있고, <이것이 인간인가> <서부전선 이상 없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처럼 읽지는 않았어도 익히 알고 있는 책들이 많아서 만만해 보이는데, 저자는 본문에서도 어려운 용어라곤 입에 담지도 않아요. 그저 담담하게 줄거리를 알려주고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구절을 짚어주는데 그것만으로도 인생에 대해 아주 많은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문학의 힘일까요, 저자의 내공일까요?

 

뭐니 뭐니 해도 군인에게 땅만큼 고마운 존재는 없다. 군인이 오랫동안 땅에 납작 엎드려 있을 때, 포화로 인한 죽음의 공포 속에서 얼굴과 수족을 땅에 깊이 파묻을 때 땅은 군인의 유일한 친구이자 형제이며 어머니가 된다. 군인은 묵묵 말없이 자신을 보호해주는 땅에 대고 자신의 두려움과 절규를 하소연한다. 그러면 땅은 그 소리를 들어 주면서, 다시 새로 10초 동안 그에게 생명을 주어 전진하게 한다. 그러고는 다시 그를 붙잡는데 때로는 영원히 그러고 붙잡고 있기도 한다.

땅 땅 땅!

땅에는 고랑이며 구멍이며 패인 곳이 있으므로 그곳에 뛰어들어 몸을 웅크릴 수 있다! 너는 공포의 경련 속에서, 초토화의 아수라장 속에서, 폭발로 인한 죽음의 비명 속에서 우리의 목숨을 되살려 주는 엄청난 일을 해주었다! 갈기갈기 찢기기 직전에 존재의 거센 폭풍이 갈팡질팡 하다가 역류하여 땅에서 우리 손으로 흘렀다. 그래서 살아남은 우리들은 땅 속으로 파고 들어가 불안스런 가운데 무사히 살아남은 순간을 말없이 축복하면서 우리의 입술로 너를 깨물고 싶어진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서 가져 온 단락입니다. 전쟁문학을 읽을 생각은 없는데 이렇게 섬세한 묘사가 숨어 있다면 그 생각도 달리 먹어야겠습니다. 이 구절은 10초 단위로 생명을 연장 받는 곳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요즘 휴일이 넘쳐나서 시간을 뭉터기로 허비하고 있는 나의 뒤통수를 후려 칩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절로 무릎이 꺾이며 내 두 다리를 떠받쳐 주는 대지에 입술을 댈 수 밖에 없는 조용한 환희라는 것을 더 늦기 전에 깨달아야겠어요.

 

줄거리 위주로 풀어나가면서 한 마디씩 덧붙이는 저자의 소감이 촉촉히 내리는 봄비 같아요. 한 방울도 넘치지 않고 내 시간의 뜰을 고루 적셔 주어서, 소설읽기와 살아내기에 대한 의지가 비 맞은 칸나 잎사귀처럼 반짝거립니다. 덕분에 익숙한 책들도 다시 읽고, 앨리스 먼로나 존 버거 처럼 손에 들었다 놓은 저자들의 책도 다시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일렁이네요.

 

밑줄 그은 부분이 무수히 많았지만 이것 하나만 소개할까요? 밀란 쿤데라는 <불멸>에서 사람은 많되 몸짓은 별로 없다고 했다는데요, 지구 상에 수십 억 명의 사람이 살지만 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몸짓은 몇 개 안 된다는 거지요. ! 그럴 수 있겠다 싶었어요. 요즘 그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한 평생을 살아내서 깨닫는 것이 너무 별 거 아니라는 생각? 겨우 요걸 깨달으려고 그 난리부르스를 치고 살았나 싶을 때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오에 겐자부로의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나와요.

 

삶이 굉장히 복잡한 것 같지만 결국엔 시 한 구절로 돌아가는 경지가 이 소설이 아닌가 합니다. 고마바 캠퍼스 시대로부터 오십수 년 지나, 이제 도착지가 확실치 않은 여행을 떠나려 하는데, 그렇게 이끈 것이 바로 이 시구(엘리엇의 황무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결국 인생이란 이렇게 단순하면서도 집요한 사이클을 말하는 것이었나, 싶어 망연자실하게 된다.

 

이렇게 단순하면서도 집요한 사이클! 그렇다면 내가 삶의 정수를 얼추 맛보았고, 좋은 삶을 위한 경험이나 요소는 이미 내 안에 있다고 말한다면 비약일까요? 더 살아 본다고 해도 더 현명해 질 것은 없고 오히려 이미 깨우친 것을 속속들이 체화하지 않은(실천에 옮기지 않은) 회한만 더해질 지도 모른다는 것! 다작으로도 유명한 저자의 역사소설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글과 책에 대한 산문집은  세 권 째 읽네요. 어느 책을 보나 소설노동자 김탁환의 근면성실이 묻어나 귀감이 되었는데, 이번 책에서는 더 농익은 질문을 던져 주네요. 해가 바뀌는 이 즈음에 읽으며 인생의 문제와 해답이 농축된 문학에의 초대를 받아들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자는 이 책들을 적어도 네 번씩 읽었다고 하네요. 밀란 쿤데라의 <불멸>은 무려 일곱 번을 읽었다구요. 이 책이 내게 큰 기쁨을 주고, 독서나 공부에의 의지를 부채질 해준 것처럼, 좋은 소설은 더 큰 기쁨과 의지를 주겠지요. 소설을 읽겠다고 작심하고도 종종 길을 잃곤 했는데(너무 재미가 없어서), 이렇게 좋은 안내서를 만나 고마울 따름입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읽어내 저자처럼 조용한 선동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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