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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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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26일 17시 11분 등록

바야흐로 소설이 읽히는 계절이다. 요즘 산책을 나가면 우수수 떨어지는 잎사귀들 때문에 미치겠다. 어제는 평소보다 두 배는 파란 하늘에 광활한 구름터널이 가득 찬 것만으로도 장관인데, 나뭇잎이 서걱거리며 마구 쏟아졌다. 새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빨간 단풍잎을 배경으로 떨어지는 누런 잎이 너무 아름다워 가슴이 저며질 것 같았다. 누구나 한 번은 지게 마련이라는 것을 이렇게 명징하게 보여주는 이미지가 또 있을까? 말라빠진 떡갈나무 잎들은 한 줄기 바람에도 공중으로 솟구치며 멀리까지 날아가며 세상에 아쉬운 이별을 고했다. 한 시절 잘 살았잖아. 질 줄도 알아야지. 떨어지는 모습이 이토록 아름다우면 그걸로 된 것 아니겠어? 나는 마음 깊이 나뭇잎의 조락을 위로했다.

 

그 길을 걸어 도서관에 갔다. 벌써 8년째 오가고 있는 나의 산책로에는 낙엽이 수북이 쌓여 지표면이 점점 올라가고 있는 듯이 보였다. 머지않아 이 길에 흰 눈이 쌓이고, 그리고 어김없이 나무들이 일제히 새 잎을 다는 계절이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이 소중했다. 나도 새 잎을 달기 위해 가을과 겨울 두 계절을  책 속으로 침잠하기로 한다. 이번에는 소설이다. 전에는 한 두 줄에 불과한 주제를 깨닫기 위해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허구를 읽는 것이 내키지 않았는데 달라졌다. 탐욕스러울 정도로 인생을 느끼고 수집하고 싶어진 것은 떨어질 때가 가까워서인가.^^ 널리 회자되는 고전이든 통속소설이든 식자들이 권해서가 아니라 내 손으로 일일이 발굴하여 남은 시간의 시금석을 삼고 싶었다. 소설을 읽으려고 마음먹어도 그 범주와 층위가 좀 복잡한가! 문학공부를 하지 않았기에 권위와 소문에 눌리지 않은 어린아이의 눈을 가지고 보통사람이 소설에서 얻을 수 있는 위안을 오롯이 펼쳐 보이고 싶었다.

 

도서관에는 이런 내 결심을 칭찬이라도 하듯 신간서적이 도착해 있어서 마음에 드는 책을 6권이나 독차지할 수 있었다. 2010년에 발표되었다는 <살인자의 딸들>도 그 중의 한 권이다. 일단 참 잘 읽힌다. 나는 아무리 유명한 책이라도 술술 읽히지 않으면 밀어 놓는다. 가독성이 그 책과 만나는 첫 관문인 셈이다. 별거 중인 아빠가 어느날 문을 비집고 들어와 엄마를 죽이고, 마침 옆에 있던 여섯 살짜리 둘째 딸을 찌르고 자기도 동반자살하려다 실패한다. 책은 네 살 위인 언니와 동생이 살아가는 이야기다. 언니는 책벌레고 강인한 성격이며 의사가 된다. 엄마를 닮아 빼어나게 예쁘지만 여리기만 한 동생을 보살피겠노라고 할머니와 한 약속을 지키려 무진 애를 쓴다. 보육원과 양부모와의 생활이 담담하게 펼쳐지고 성인이 되는 동안 동생은 꾸준히 교도소로 아빠를 면회간다.

 

언니는 32년 만에 처음으로 간다. 형기 8년을 남겨두고 모범수로 출옥하는 아버지에게 자신이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로 가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다. 그리 어려울 것 없이 전개되는 이야기를 읽으며 저자의 가족주의에 놀랐다. 부모자식이나 형제 사이라는 것, 성장기에는 애틋하고 비중이 크지만 저마다 자기 살림하고 삶에 지치다보면 적절하게 멀어지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생각을 하는 내게, 엄마를 죽인 아버지를 인정하는 문제 때문에 대립하는 자매가 놀라웠다. 언니의 딸들에게 외할아버지의 실체를 밝혀야 한다는 동생의 주장은 예기치 않은 사건 때문에 그대로 실현된다.

 

내가 너무 많은 문제를 가져왔어요.”

가족이 그런거지 뭐, 마음 가라앉혀.”

 

언니와 남편의 대화이다. 첫 만남에서 언니가 비밀을 털어놓을 만큼 신뢰를 준 사람이었다. 자매의 갈등이 주요 문제기에 남편의 존재는 배경으로 밀려나지만, 이 책에서 가슴이 철렁했던 곳은 바로 이 대화였다. 내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자세였다. 나는 내 문제를 가족이든 남이든 제3자에게 내 놓은 적이 없다. 언제나 나의 과제는 누구에게도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끝내 출옥한 아버지와 같이 지내는 동생을 보며, 개인주의가 팽배했다고 알려진 미국의 소설에서 발견한 가족주의가 낯설어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성장한 자녀와 지내다보니 갈등이 없을 수 없다. 내가 늙어갈수록 문제의 양상은 달라질 것이다. 그런데 갈등을 회피하는 습관이 있는 나는, 독립적이라는 미명 아래 대화다운 대화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뚝 떨어져서 지내게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싸우면서 진짜 속마음이 표출되고 쏟아져 나온 문제들을 추슬러 담는 과정이 중요하기에 잘 싸워야 한다는데, 아마 나는 싸움의 초입에서 포기하고 말 것이다. 예기치 않게 읽은 책 한 권에서 촉발된 내 모습을 들여다보기가 겁이 난다. 심상해보이는 일상의 한 꺼풀만 뒤집으면 득실거리는 문제투성이에 질겁을 할 정도이다. 바로 그것이 저자가 엄마를 죽인 아버지로 상징한, 문제투성이의 가족의 모습일 것이다.

 

이제 초입이니 서둘지 말자. 소설 속에 푹 빠져 보낸 두 계절이 지난 후의 봄날이 기대된다. 적어도 나는 진정성으로 가득찬 나만의 서재를 가지게 될 것이다.  "너무 많은 문제"에 대한 대답은 아마 소설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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