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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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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27일 13시 37분 등록

 

 

루소를 읽다가 아내가 떠올랐습니다. 두 사람은 전혀 상관성이 없는데 읽어가던 루소의 한 구절에서 갑자기 얼마 전 아내가 내게 건넨 말이 떠오른 것입니다. 당시 아내와 나는 냉면집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제 두 끼만 먹어도 살아. 나는 어떤 날은 하루에 두 끼도 벅찬 날이 있더라고.” 요샛말 중에 집에서 꼬박꼬박 세 끼 밥 챙겨달라고 요구하는 남편을 삼식놈이라 칭하는 표현이 있다지요? 상대적으로 집에서 한 끼만 먹는 남편을 일식님’, 두 끼 먹는 남편은 이식이이라고 한다던가요? 일터에서 은퇴한 남자들이 집안에만 있는 것을 부인들도 버거워한다는 심리를 농담처럼 표현한 것이겠지요. 오늘은 이런 세태에 대한 사회학적 사유를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아내가 내게 건넨 하루 두 끼로도 산다는 말을 혹시라도 그렇게 해석하진 마시기 바랍니다.

 

연애시절부터 그랬듯이 그날 냉면집에서 나는 회냉면을, 아내는 물냉면을 시켰습니다. 서로의 것을 조금씩 나눠 맛을 보이고 우리는 각자의 음식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예전에는 내가 사리 하나를 꼭 추가해서 먹었고 또 이따금 물만두까지도 시켜 먹었던 것 기억나지? 이젠 이 한 그릇만으로도 충분하니 신기한 일이야.” ‘이제 하루 두 끼도 충분하다는 아내의 그 말은 나의 이 말을 받은 말입니다. 나이가 들면 일반적으로 밥을 적게 먹게 된다는 것이지요. 대사활동이 줄고 어쩌고 하는 생리적 설명까지 덧붙여서 말입니다.

 

아내 말을 듣고 가만 생각해 보니 최근 내 식습관이 확연히 변했습니다. 나는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늘 밥 한 공기를 더 시켜서 최소한 반 그릇 이상의 밥을 더 먹던 사람입니다. ‘내가 귀농한 이유는 서울의 식당들이 추가 공기밥을 무료로 주지 않고 돈을 받는 야박함 때문이다. 시골 식당들은 부족하면 늘 공기밥 추가는 무료인데귀농 초창기 나를 찾아온 서울 친구들과 밥을 먹을 때, 밥 한 공기를 더 시키며 나는 이런 농담을 했을 정도로 한 공기의 밥으로는 늘 부족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정말 밥 양이 확실히 줄었습니다. 아내 말처럼 이런 추세라면 곧 하루 두 끼만으로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하는 중입니다.

 

몸이 요구하는 밥의 양이 확실히 줄고 있는데도 나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홀로 머물면서도 나는 세 끼 밥을 꼭 챙겨 먹어 왔습니다. 그득한 포만감 때문에 괴로워하는 순간들이 자주 있으면서도 콩나물 해장국을 시킬 때면 공기밥 하나를 더 달라고 해야 될 것 같은 생각이 매번 들었습니다. 내가 내 몸의 변화와 그 신호에 이토록 게으른 사람임을 아내 덕분에 알았습니다.

 

이게 어디 몸의 변화와 밥 양의 변화와만 관계된 이야기겠습니까? 자각하지 못하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제 삶의 온 국면에서 수단과 목적을 전도시키는 삶을 살다가 가게 되지요. 예컨대 이동하기 위해 필요한 교통수단이나 안온하기 위해 필요한 집을 오히려 소유나 과시,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집착하며 삽니다. 또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 위해 만난 사람을 나와 같아지게 하려 유무형의 폭력을 자행합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하는 정치인이 사적 혹은 집단적 이기심을 위해 복무하는 모습 역시 크게 보아 제 삶을 자각하지 못하는 모습의 하나입니다. 행복하자고 공부하는 것이어야 할 텐데, 공부가 행복하지 않다는 학생들의 설문결과는 교육과 사회가 자각을 잃은 모습에 다름 아닙니다.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 대부분이 문명을 예찬하던 때, 동시대의 루소는 이단아였습니다. 체계적 교육을 받은 적 없는 그는 노년에 식물과 자연을 깊게 들여다보았습니다. 당시의 식물학은 의학에 종속돼 있었습니다. 자연 역시 인간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자원에 머물러 있었습니다.(이 부분은 오늘날도 다르지 않지요.) 그런 흐름 속에서도 루소는 송곳 같은 사유로 자각과 함께 깨어있는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묻습니다. ‘몸에 유익한 작업이 우선되는 것에 동의하지만, 어떻게 식물이라는 생명이 환자만을 위해 창조되었겠는가?’ 그리고 그는 말합니다. “(자연) 나는 거기서 경탄의 대상을 보며 그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을 느낀다.”

 

내 청년의 몸은 넉넉한 양의 밥을 필요로 했고 또 밥이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 몸의 관습이 내 중년의 정신과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전에 없이 배가 나오는 현상의 까닭도 아내의 말을 통해 알아챘습니다. 이제 나는 밥을 새롭게 대하기 시작할 작정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중국 사상가 오경웅 선생은 인생 최대의 비극은 수단과 목적을 뒤바꿔 사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깊게 공감합니다. 어떠신지요? 그대 삶을 위한 수단과 목적은 제 자리에 놓여 있으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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