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본형 변화경영연구소

오늘의

마음을

마음을

  • 연지원
  • 조회 수 2291
  • 댓글 수 0
  • 추천 수 0
2014년 11월 10일 10시 04분 등록

 

친구가 세상을 떠난 지 4개월이 지났습니다. 죽마고우 여섯 중 하나를 빼앗긴 그 사건은 남은 다섯에게 크고 작은 충격을 안겼습니다. 절실한 깨달음 중 하나는 삶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사실과 소중한 사람끼리는 자주 만나야 한다는 교훈이었습니다. 우리 만남을 더 이상 미루지 말자! 그렇게 다섯 친구들은 일년에 두 번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친구의 49재를 지낸 후, 우리는 카페에 모여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의미 있는 결정을 했습니다. 한 시간을 훌쩍 넘기는 동안 여행 이야기를 나눴지만, 막상 정해진 규칙은 간단했습니다. 첫째, 다섯 명이 번갈아가며 여행을 주최한다. 둘째, 모든 결정은 주최자가, 참가자는 무조건 따른다! 두 가지가 끝입니다. 결론은 고작 두 가지에 불과했지만 정해지는 과정 자체가 즐거웠지요. 

 

"주최자 순서는 어떻게 할까?" 재치 만점의 친구가 대답했습니다. "키 작은 순서대로 하자."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친구들이 웃었습니다. 우린 늘 이런 식입니다. 서로의 약점을 붙잡아 놀리지만, 어느 한 명 마음 상하는 일은 드뭅니다. 놀림 당한 당사자도 웃으며 욕을 하다가, 결국엔 모두가 함께 웃습니다. 친구 한 명이 다시 순번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러지 말고 이름 가나다 순으로 돌아가자."

 

모두가 동의하여 주최자 순번이 정해질 찰나, 친구 '재치'가 한 마디를 던졌지요. "야, 근데 가나다 순이랑 키 작은 순서랑 똑같네." 머리 속으로 순번을 헤아리던 친구들의 2초간 정적이 흐른 후, 다함께 폭소가 터졌습니다. 정말 가나다 순이랑 키 작은 순서가 똑같았던 겁니다. 공교로운 우연이지만 박장대소할 만큼 재미났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뭐가 그리 웃기나 싶은데, 우리끼린 그랬습니다.

 

떨어지는 낙엽에도 웃는다는 여고생처럼, 우정 앞에서 순수함을 잠시나마 되찾았기에 작은 일에도 웃었던 게 아닐까요? 그러고 보면, 우정은 사람을 젊고 순수하게 만드나 봅니다. 엔돌핀이 샘솟는지 어떤지의 여부는 과학에 속하겠지만, 우정이 행복을 높인다는 사실은 굳이 과학적 연구 결과를 접하지 않더라도 확신할 수 있잖아요. (과학적 성과들이 직관적으로 빤히 아는 것들의 재검증인 경우도 많고요.)

 

이번 주말, 가나다 순 첫번째 주최자가 진행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의 키가 몇번째인지, 또 저는 몇 번째인지는 굳이 밝히고 싶진 않군요. 저, 의리 있는 친구거든요.) 갓난쟁이 육아로 힘들어하는 아내 곁을 지키느라 한 명이 참석하지 못해, 삼십 대 후반의 남자 넷이서 떠난 여행입니다. 둘씩, 셋씩 여행을 떠난 적은 있지만, 공식적으로 모두가 함께 떠난 것은 15년 만입니다.

 

막상 여행을 떠나니, '무엇 때문에 십 오년 씩이나 못갔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행을 다녀온 지금은, 그간 여행을 가로막았던 온갖 그럴듯한 이유들이 어쩌면 변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실은 서로 마음 씀의 부족 때문일 거라는 느낌도 듭니다. 글을 쓰면서 새삼 다짐합니다. '중요한 일이라면 미루지 말자, 소중한 관계에는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듬뿍 선사하자!'

 

주최자의 사전 준비 부족으로 여행 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습니다. 알차고 특별한 여행을 기대했던 저는 허접한 숙소에 들어서며 투덜대기도 했지만, 불평을 불만족이나 비협조로 확대시키진 않았습니다. 나를 비롯한 모든 친구들이 적극적으로 여행에 참가했고 서로의 취향과 여행 라이프스타일을 존중했습니다. 주최자 스스로도 준비가 미흡했음을 느껴, 줄곧 고기를 구으며 분위기를 띄웠고요.

 

어떤 주부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냉장고에 가족들을 위한 음식이 가득하면 마음이 든든하다고. (절전에는 도움되지 않지만)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 저도 말을 받았습니다. "저는 차에 기름을 가득 채워두면 그런 기분이 듭니다." 하지만 최고의 든든함은 따로 있더군요. 고향 친구들이 서울에 왔다는 사실로 인해, 집을 나와 여행 집결지인 (서울 마포구) 상수동을 향하는 제 마음이 한없이 든든했거든요. 

 

서로 사랑하거나 신뢰하는 인간관계를 체험하는 것보다 마음 든든할 때가 있을까요?

 

아내와 함께 있을 친구와는 여행 전후 카톡으로 마음을 주고 받았습니다. 영원히 떠나버린 한 놈과는 어떤 기별도 주고 받을 수가 없었고요. 여행 도중 불쑥불쑥 그 놈 생각이 날 때마다 마음이 알싸했지만, 제게 남은 또 다른 친구들로 인해 행복했고 마음 든든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 휴일 밤이네요. 우정 덕분입니다.  

IP *.208.215.164

덧글 입력박스
유동형 덧글모듈

VR Left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056 완벽주의와 이별하기 위한 노력 file 연지원 2014.11.17 2354
2055 어머니 손은 약손 書元 2014.11.15 2452
2054 꿈꾸던 사랑의 한 가운데 박미옥 2014.11.14 8572
2053 삶은 눈부시면서 또한 눈물겨운 것 김용규 2014.11.13 5807
2052 액션! [4] 한 명석 2014.11.12 2058
2051 경제학적 관점으로 본 인간의 욕망 차칸양(양재우) 2014.11.11 2588
» 언제 마음이 든든해지세요? 연지원 2014.11.10 2291
2049 오 세브레이로에서 보내는 편지 로이스(旦京) 2014.11.08 2612
2048 빠르게 무언가를 이루어야한다는 욕망 박미옥 2014.11.07 2403
2047 행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하냐는 질문에 김용규 2014.11.06 2919
2046 챔피언과 칼잡이의 차이 [2] 한 명석 2014.11.05 2088
2045 생물학적 관점으로 본 인간의 욕망 차칸양(양재우) 2014.11.04 3309
2044 얼마짜리 시계 착용하세요? 연지원 2014.11.03 3171
2043 몽당연필 書元 2014.11.01 2448
2042 걱정하지 말아라. 인간은 그렇게 약한 존재가 아니다. [2] 박미옥 2014.10.31 2217
2041 훌륭한 스승은 김용규 2014.10.30 2202
2040 전에 한번도 되어본적이 없는 내가 된다는 것 [2] 한 명석 2014.10.29 2691
2039 나는 중산층입니다 [3] 차칸양(양재우) 2014.10.28 2089
2038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보내는 편지 로이스(旦京) 2014.10.25 2768
2037 살아남기 위하여 박미옥 2014.10.24 2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