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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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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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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23일 16시 59분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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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다. 산자락과 산자락이 만나 이룬 평원이 탁 트였는데 나무 한 그루가 없다.  고인돌이 따로 있나 딱 그런 느낌의 바위들이 듬성듬성하고, 잡풀이나마 빨갛게 단풍이 들어 누런 벌판에 가을색을 더해 준다. 그 넓은 평원에 사람 하나가 없다. 4시간 동안 산을 오르는 동안 만난 사람이라곤 딱 세 팀으로 커플이 두 팀, 남자들로 이루어진 한 팀이 전부였다. 심지어 가축도 없다. 목동도 없이 지들 맘대로 오가는 소 예닐곱 마리가 전부.

 

그러니 있는 것은 자연뿐이었다. 흑해 주변의 명산 카츠카르(Kackar), 트래킹코스로 꽤 이름이 난 듯 등반코스가 32개나 된단다. 딸과 나는 카부룬(Kavrun)에서 올라가는 길을 택했다. 카부룬은 궁벽해 보이는 산간마을이었다. 슬레트 지붕을 인 일자집이 탄광촌을 연상시키는데 채마밭 하나가 없고, 소 몇 마리가 보일 뿐이라, 몇 십 호나 되는 마을이 무얼 해서 먹고 사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카부룬의 배경 하나는 기가 막혔다. 카츠카르의 부속 산이 이루는 U자형 골짜기 너머로 신령스러운 바위산의 실루엣이 펼쳐졌다. 그 바위산이 카츠카르의 주봉이고 우리는 지금 그 곳을 향해 오르고 있다. 정상에는 호수가 여러 개 있다고 했다.

 

산이라고는 해도 나무가 한 그루도 없고, 일부를 제외하고는 경사가 완만한 평원이라 등산이라기보다는 트래킹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리는 코스였다. 그래도 몇 번의 고비가 있었다. 여독이 쌓인데다가 무엇보다 햇볕이 너무 강해서 입안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얼음장 같은 계곡물로 얼굴을 적시고 목을 적시며 걸어갔지만, 절반 지점에서 내가 먼저 손을 들었다. 풍경은 이것으로 족하다고, 가도 가도 똑같을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저기 보이는 능선까지만 가 보자고, 거기에서 호수가 보인다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하는 딸의 말에 마음을 돌이켜, 다시 무거운 다리를 재촉하던 중에 이번에는 딸이 못 가겠다고 했다. 원래 발목이 약한데 몹시 시큰거린다고 했다. 이번에는 내가 오기가 났다. 눈앞에 보이는 싯누런 언덕에 서면 새로운 시야가 펼쳐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밑에서 보기에 능선이라고 여긴 곳은 능선이 아니라 펑퍼짐한 곳이었다. 길은 또 다시 계속되었고 드디어 작은 호수가 보이는 지점에서 내가 녹다운되었다. 마을에서 까마득하게 보이던 바위산이 코앞이니 할 만큼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아예 돗자리를 펴고 한쪽으로 쓰러져 버렸다.

 

딸은 반대였다. 연못을 보고 기사회생이라도 한 듯 나머지 연못을 찾아 가벼운 걸음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이어 환호성이 터졌다. 연못은 모두 4 개였다. 정상 저 편으로는 거짓말처럼 산하가 황폐해져 기괴할 정도로 적막한데 거기 연못이 있었다. 7월까지만 해도 만년설을 보았다는 포스팅이 있었으나 지금은 골짜기에 박힌 서 너 군데의 흰빛으로 상상력을 동원해야 할 판, 그래도 좋았다. 마지막 5분의 투혼을 발휘한 딸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나는 역시 근성이 부족하다니까.


위풍당당한 바위산 아래 고원에 우리 둘 뿐, 딸은 만년설이 있을 때 다시 오겠다며 가슴 설레어했으나 나는 자꾸 서둘러졌다. 우리보다 앞선 터키 커플도 다 내려갔을 시간이니, 이 커다란 산에 우리 둘 뿐이라는 사실에 몸서리가 쳐지고, 산 속이라 빨리 어두워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조바심이 났다. 얼마나 서둘렀는지 올라갈 때 4시간 걸린 산을 내려오는 데 1시간 10분밖에 안 걸렸다. 내려오고 나서야 고원에서의 성취감을 느긋하게 누리지 못한 것이 아까웠다.

 

연하디 연한 꽃이 이파리나 줄기의 도움도 없이 척박한 땅을 뚫고 피어나 있었다. 산이 높아질수록 이 하얀 꽃은 늘어나 평원을 애틋하게 만들어 주었다. 말로만 듣던 터키의 야일라(yayla-고원)를 맘껏 흡입한 감격이 컸다. 야일라는 방목지를 뜻하기도 하고, 야일라치즈, 야일라초르바(수프) 하는 식으로 널리 쓰여 관심이 컸던 것이다. 그 넓은 야일라를 소 몇 마리가 차지하고 있는 것도 분통이 터졌다. 잠시라도 이 곳에 머물며 가끔 산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삶과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과도한 생존경쟁에 지친 사람들에게 그런 시간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차마 동부에는 못 가고 흑해 주변을 훑고 있는데 이쪽은 원시 자연의 보고이다. 날마다 펼쳐지는 비경의 파노라마에 정신이 없다. 앞으로 터키 지도를 보면 흑해 쪽에서 시선이 멈춰 있을 것 같다. 우리 둘이 독차지했던 대평원의 감격이 되살아나 가슴을 쓸어내릴 것 같다. 생텍쥐페리가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거기 어딘가 우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라고 했듯이 내게 터키 동북부가 아름다운 것은 카츠카르가 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그 산에 영역표시를 하고 오긴 했지만 그래서가 아니라 내 발로 딛어 본 곳이 내 것이기 때문이다. 가 보았으며 언제고 다시 가고 싶은 곳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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