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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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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5일 07시 37분 등록

한 사람의 삶에 돌연 새로운 페이지가 펼쳐질 때가 있습니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가 갈리는 변곡점입니다. 나의 천복(天福)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런 만남은 느닷없습니다. 언제 어디서, 만남의 대상이 무엇인지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뤄지기에 신비스럽습니다. 그럼에도 이 순간은 첫사랑처럼 ‘예정된 만남’처럼 다가옵니다.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1세대 사진가 최민식 선생에게도 이런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서전 <진실을 담는 시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느 일요일 오후 동경의 헌책방에 들러 책을 고르다가 우연히 한 권의 사진집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사진집은 나를 반세기 동안 사진에 미쳐 카메라를 둘러메고 다니게 만들었다.”

 

같은 책에서 그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은 이 사진집이었다”고, “이 사진집이야말로 내 인생을 180도 바꿔놓은 계기”라고 여러 번 강조합니다. 내 마음 속에 장면 하나가 펼쳐집니다. 20대 후반의 한 젊은이가 낡은 헌책방을 둘러보고 있습니다. 타국에서 홀로 지내는 외로움을 잊게 해줄 책을 찾는 눈동자가 반짝입니다. 서가에서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옵니다. 룩셈부르크 출신의 사진가 에드워드 스타이켄(Edward Steichen)이 엮은 사진집 <인간 가족>입니다. 겉표지를 열고 사진을 한 장 한 장 살펴봅니다. 이제 다른 책은 관심 밖입니다. 시계는 가고 있지만 그는 시간 밖에 있는 듯합니다. 사진집에서 시선을 뗄 수 없습니다. 사진 속 피사체는 대부분 사람입니다. 아! 부산에 두고 온 아내와 자식이 떠오릅니다. 화가라는 꿈을 위해 아내와 아이를 부산에 두고 홀로 일본으로 밀항을 한 그입니다. 야간에는 미술학원에서 공부하고 낮에는 돈을 벌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살고 있습니다.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사진집을 삽니다. 폐품 모아 번 돈입니다. 오래 찾던 보물이라도 얻은 듯 양손으로 사진집을 꼭 끌어안습니다.

 

천복과의 만남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최민식 선생도 “그 사진집을 열어본 순간 왜 그렇게 열정에 휩싸이게 되었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사진에 대한 것이라고는 돈 많은 서양인들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찍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지 예술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사진이라는 ‘새로운 열정’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천복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운명적 끌림입니다. 이때 먼저 반응하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입니다. 이 일이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인지, 지금 형편에서 할 수 있는 일인지, 이 일로 먹고 살 수 있을지 생각해보기 전에 가슴이 먼저 뜨거워집니다. 이런 끌림은 외부의 어떤 것에 매혹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안에서 잠자고 있던 가능성과 미래의 나 사이의 만남입니다. 최민식 선생은 말합니다.

 

“우연한 기회로 <인간가족> 사진집을 본 순간 나는 내가 찾아 헤매던 보석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내 모든 열정을 기울여 평생 캐내야 할 광맥을 접한 순간 나는 새로운 열정에 휩싸였다.”

 

천복과의 만남에는 울림이 있습니다. 외부에서 온 메시지는 가슴과 공명합니다. 울림의 본질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입니다. 울림은 천복을 향한 행동을 점화시킵니다. 행동을 위한 동기는 감정이고, 감정은 들불처럼 열정을 일으킵니다. 화가를 꿈꾸던 젊은이의 마음은 디자인에서 사진으로 돌아섰습니다. 폐품 팔아 번 돈을 모아 중고 카메라를 구입하고 독학으로 사진에 매달렸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사진 한 점 한 점에 생명력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나는 오랜 세월 기다리던 소식이 당도한 것처럼 사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이것이 내 인생의 앞날을 결정할 서막임을 희미하게 감지하고 있었다.”

 

천복이란 내게 살아있음의 황홀을 주는 활동 혹은 분야입니다. 스스로에게 가장 큰 희열을 주는 행위입니다. “예술은 자연스럽게 자신 안에서 완성되는, 그 자체로서 삶의 목적일 때 끊임없이 새 힘을 얻을 수 있으며, 희열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는 최민식 선생의 말은 천복에 대한 또 하나의 정의입니다. 천복은 내 삶을 예술로 승화시켜주는 것이고, 천복을 따르는 사람은 예술가입니다. 천복은 따르는 삶은 스스로를 알아가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55년 동안 인물 사진을 찍은 사진가는 말합니다.

 

“내가 속한 세상, 내 생각, 내 일상, 내가 한 시대에서 부딪히는 사건들.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사진의 한 부분이며, 그러한 현실의 조각에서 나를 인식하는 것, 그리고 그 인식을 통해 보다 완성된 인간으로 발돋움하려는 정신이 곧 나를 이룬다. 그래서 사진은 늘 세상 속으로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지난 2월 12일 아침 최민식 선생이 타계했습니다. 자서전과 사진집을 보며 반세기 넘게 천복을 따른 그의 삶을 반추해봅니다. 문득 내가 천복을 만났던 순간이 떠오릅니다. 천복이 나를 부르는 소리를 처음 듣고 느낀 떨림은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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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식 저, 진실을 담는 시선, 예문, 2006년 11월

 

* 출간 소식 : 박경숙 연구원의 첫책 <문제는 무기력이다>

박경숙 연구원의 첫 책 <문제는 무기력이다>가 출간되었습니다. 인지과학을 연구한 저자의 전문성과 10년간의 체험이 담긴 책입니다. 많은 관심과 축하 바랍니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 혹은 아래 이미지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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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숙 저, 와이즈베리, 2013년 2월 19일 출간

 

* 안내 : ‘크리에이티브 살롱9’ 목요 아카데미 3월 강좌 소개

<크리에이티브 사롱 9>에서 인문학을 만나는 목요아카데미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3월 강좌는 ‘역사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한국교원대 조한욱 교수가 진행합니다. 조한욱 교수는 여러 권의 저서와 역서를 낸 ‘신문화사’의 권위자입니다. 커리큘럼과 참가자 모집 등 자세한 내용은 여기 혹은 아래 이미지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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