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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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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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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25일 23시 16분 등록

 

나는 부정적인 편인가? 긍정적인 편인가? 나는 스트레스와 긴장을 잘 감당하는 편인가? 버거워하는 편인가? 나는 무언가를 모색함에 있어 실패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큰 편인가? 아니면 그 모색 자체를 즐겁게 여기는 편인가? 나는 갈등의 국면이 찾아오면 그 국면을 잘 조정하고 넘어설 줄 아는 편인가? 조정과 타협을 힘겨워하는 사람인가? 이런 질문에 답한다면 그대에게는 어떤 모습이 더 많은가요?

 

글쎄요, 내 경우는 혼재되어 있는 듯합니다. 내가 민감하게 생각하는 부분, 특히 내가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와 신념이 훼손되는 것만 아니라면 나는 가벼울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런 부분이 아닌 영역이라면 나는 꽤나 긍정적이고, 적당한 스트레스와 긴장을 즐기고, 모색하고 새로워지려 하며, 타자들이 겪는 갈등을 제법 잘 중재하고 조정할 수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내가 품은 훼손 받고 싶지 않은 신념과 가치와 관련될 경우 나는 결코 가볍지 않은 사람으로 변하는 나를 보게 됩니다. 그럴 때 내게서는 단단한 쇳덩어리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타협 없이 맞서곤 했습니다.

 

살아갈수록 그런 내 모습이 불편해집니다. 할 수만 있다면 한결 더 부드러워지고 싶어집니다. 더 자주 웃는 삶을 살고 싶어집니다. 나의 스승님이 그러하셨듯 부드러움 속에서 스스로 품은 씨앗을 단단하게 지켜내며 푸르러지고 깊어지고 싶습니다. 미리 판별하기보다 다가오는 모든 존재를 물끄러미 분별없이 바라보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나는 내 씨앗을 품고 지키고 피워내려는 실행과 전개의 과정에서 여전히 자주 거칠고 차갑고 날카로워지는 나를 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런 모습의 상당 부분은 내가 놀 줄 모르는 놈으로 자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 생각은 유년기의 놀이와 성인이 된 이후의 행복감의 관련성을 화두로 잡고 생각하다가 갖게 된 것입니다. 화두 속에서 나는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났습니다. 어릴 적에 나는 비교적 잘 논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또한 놀이에 결핍과 긴장, 외로움도 만만치 않게 있었습니다. 나 살던 동네에 동갑내기 남자아이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여자아이들만 있던 마을이라서 어머니 품에서 놀거나 조금 더 커서는 고추에 털 날 즈음까지 또래 아이들 보다는 주로 형을 따라다니며 놀았습니다. 형 입장에서는 세 살이나 어린 동생이 때로는 귀찮고, 나는 어떻게든 참여하고 싶고또 놀이에서 마주하는 문제들은 내 수준보다 늘 몇 년 앞서 있었을 테고

 

놀이에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놀이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힘을 키웁니다. 딸 녀석 어릴 때 우리 가족은 젠가라는 놀이를 자주 했습니다. 나무블록 쌓아 놓고 그 중에 블록을 하나씩 빼는 놀이입니다. 물론 전체 블록이 무너지도록 블록을 빼는 경우 지는 놀이입니다. 녀석은 블록을 빼다가 전체가 와르르 무너지면 화를 내기보다 오히려 환호성을 지르며 신나했습니다. 그것은 즐거운 놀이일 뿐이니까요. 딸 녀석은 종종 실컷 놀고도 한 판만 더 놀자고 졸랐습니다. 내가 거절하면 녀석은 늘 협상을 걸어왔습니다. 뽀뽀 세례를 하기도 하고, 내가 좋아할 만한 무언가를 카드로 내밀기도 했습니다. 놀이 속에서 녀석은 협상과 설득을 익혔고 결국 녀석의 대인관계 능력을 키우는 데도 기여했습니다. 당연히 놀이 속에서 마주하는 문제를 통해 해결능력도 키웠지요. 대부분의 놀이는 정답이나 오답이라는 요소에서 멉니다. 풀지 못한다 해도 심각한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놀이는 답에 이르러야 한다는 강박을 키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음처럼 희망하게 됩니다. ‘이제부터라도 삶에서 더 자주, 그리고 더 잘 놀고 싶다. 내가 목숨처럼 여기는 신념과 가치조차 데리고 놀 수 있어서 마침내 새털처럼 가벼워지고 싶다. 집으로 들어가 밥을 먹어야 하는 시간, 그 해 지는 시간이 돌아오는 것이 너무도 아쉬울 만큼 그렇게 재미있었던 유년시절의 놀이를 삶의 곳곳으로 다시 데려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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